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38:33

야마나시 한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61041, #062861 20%, #062861 80%, #061041)"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대행 제4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하세가와 요시미치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야마나시 한조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사이토 마코토 우가키 가즈시게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니아키 아베 노부유키
한국통감 · 군정사령관 }}}}}}}}}}}}}}}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육군경 (1873년~1885년)
1·2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3대
사이고 주도
4대
오야마 이와오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rowcolor=#fff> 육군대신 (1885년~1945년)
1·3대
오야마 이와오
2·4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1·3대
오야마 이와오
2·4대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5대
가쓰라 다로
5대
가쓰라 다로
6대
고다마 겐타로
7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7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8대
이시모토 신로쿠
9대
우에하라 유사쿠
10대
기고시 야스쓰나
11대
구스노세 유키히코
12대
오카 이치노스케
13대
오시마 겐이치
14·16대
다나카 기이치
15대
야마나시 한조
15대
야마나시 한조
14·16대
다나카 기이치
17·19대
우가키 가즈시게
18대
시라카와 요시노리
17·19대
우가키 가즈시게
20대
미나미 지로
21대
아라키 사다오
22대
하야시 센주로
23대
가와시마 요시유키
24대
데라우치 히사이치
25대
나카무라 고타로
26·30대
스기야마 하지메
27대
이타가키 세이시로
28대
하타 슌로쿠
29대
도조 히데키
폐지
26·30대
스기야마 하지메
31대
아나미 고레치카
33대
시모무라 사다무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b0313f> 대장
大將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육군
陸軍
시라카와 요시노리 | 우가키 가즈시게 | 미나미 지로 | 아베 노부유키 | 야마나시 한조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도이하라 겐지 | 마쓰이 이와네 | 야마시타 도모유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 이마무라 히토시 | 기무라 헤이타로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 오카무라 야스지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 다치바나 요시오 | 아나미 고레치카 | 가와베 마사카즈 |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 |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해군
海軍
야마모토 곤노효에 | 스즈키 간타로 | 사이토 마코토 | 나구모 주이치 | 요나이 미쓰마사 | 이노우에 시게요시 | 오카다 게이스케 | 시마다 시게타로
중장
中將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육군
陸軍
창덕궁 이왕 은 | 홍사익 | 무토 아키라 | 이시이 시로 | 스즈키 데이이치 | 도미나가 교지 | 무타구치 렌야 | 이시와라 간지 | 사토 겐료 | 사토 고토쿠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 히구치 기이치로 | 이병무 | 조동윤 | 혼마 마사하루 | 오시마 히로시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해군
海軍
야마구치 다몬 | 오자와 지사부로 | 우가키 마토메 | 모리 쿠니조 |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
少將
파일:일본 제국 육군기.svg
육군
陸軍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 이희두 | 조성근 | 왕유식 | 김응선 | 어담 | 이치키 기요나오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해군
海軍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윗 첨자 : 사후 추서
※ 둘러보기 | 파일:일본 황실.svg 일본군 원수
}}}}}}}}}

제4대 조선총독
야마나시 한조
파일:조선 총독 야마나시 한조.jpg
<colbgcolor=#062861><colcolor=#fff> 출생 1864년 4월 6일
사가미국 오스미군
(現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
사망 1944년 7월 2일 (향년 80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재임기간 제4대 조선총독
1927년 12월 10일 ~ 1929년 8월 17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62861><colcolor=#fff> 학력 육군대학교 (8기)
직업 군인, 정치가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구8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886년 ~ 1925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의 정치인, 군인. 제4대 조선 총독.

2. 생애

1864년 4월 6일사가미국 오스미군에서 태어났다. 1886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892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한 뒤 1921년 하라 다카시 내각의 육군대신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정치군인으로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의 군 개혁에 크게 반발하여 이를 무산시키면서도 세계적 대세였던 감군과 군축에는 동의하여 2차례에 걸쳐 이른바 야마나시 군축을 단행하는 등 정당 세력과 군벌 세력간에서 중간적인 입장에 있었고 그 덕분에 당시 수차례 내각이 바뀌었음에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육군대신을 그만둔 후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간토 계엄 사령관 및 도쿄 경비 사령관을 하기도 했다.

1925년 4월 동기이자 정치선배인 다나카 기이치입헌정우회의 총재로 되자 곧바로 다음 달인 5월에 전역해서 예비역이 되었고 정치에 발을 담그면서 당초에는 정우본당에 가까웠으나 곧 다나카가 있는 정우회에 접근하고 다나카는 야마나시를 이용하여 정우본당의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헌정우회로 끌여들이는 등 적극적인 정치공작을 벌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야마나시는 정우본당, 그리고 나중에 정우본당이 헌정회와 합당하여 창당된 민정당과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의회에서 문제의 추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금 출처가 문제로 되면서 시베리아 출병 당시 비자금을 빼돌렸다가 썼다는 의혹까지 일어났다.

전임 조선 총독사이토 마코토 제독1927년 4월 4일 제네바 해군 군축조약(6월 2일 ~ 8월4일)의 전권대표로 조선 총독직을 일시 사임하자 신임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는데 그가 총독이었을 때는 사이토의 문화 통치를 이어 받아 느슨한 통치를 했으며 심지어 더 느슨해졌다. 단적인 예로 구색맞추는 기관에 불과했던 친일파 중추원 의원들이 조선인의 권익을 증진하자는 대규모 청원과 요구를 하였는데 그는 '관대하게도' 이에 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경성일보>에서 비판적으로 표현되었다. 심지어 이 보도에 조선인들이 반발하자 경성일보 사장을 불러 미공개 회의록을 유출했다며 나무라고 경성일보에서 사죄문을 게시하는 일이 터졌을 정도다.[1]

그러나 이 직책을 맡으면서 그의 정치생명은 완전히 끝장나게 되었는데 당시 미곡상이 경성(서울)에 미곡 거래소 설립을 허가해주는 대가로 야마나시 장군의 측근에게 당시 금액으로 5만엔의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조선총독부 의옥 사건이라고 한다.

여기에 더해 조명하 의사가 타이완에서 천황 히로히토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을 살해 시도하는 사건도 발생해 불과 1년 8개월만에 조선 총독에서 사임했고 전임 총독 사이토 제독이 다시 총독으로 복귀했다. 일제의 패전으로 인해 물러난 아베 노부유키를 제외하면 최단임 총독이다.

그는 재판을 받고 주변 사람들은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해 1929년 말에 모든 공직을 내놓아야 했다. 이후 계속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1944년 7월 2일에 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에 있는 자신의 자택에서 80세에 자연사했다.

3. 여담



[1] 이런 현대 한국인이 봤을 때 당황스러운 전개가 일어난 건 <경성일보>가 재조선 일본인이 운영하는 언론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일본인 이주민들은 대부분 하층민이었기에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집착했고, 조선인을 착취하여 자신들이 지배계급이 되기를 원했다. 반면 조선 통치에 책임이 있는 총독 입장에선 조선인들을 너무 쥐어짜다가 문제가 터지면 당장 본인 커리어에 흠집이 나기에 적어도 어르고 달래는 척은 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 전에도 조선인 토지를 수탈하여 일본인에게 나누어 주고 조선인들은 황무지나 개간하게 시키라는 재조선 일본인의 주장을 이토 히로부미가 반려하고, 일본어 신문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가혹한 언론통제조선인 우대정책을 비판하는 어이가 없는 사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