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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시게요시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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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우에 시게요시
[ruby(井上 成美, ruby=いのうえ しげよし)]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oue_Shigeyoshi.jpg
출생 1889년 12월 9일
일본 제국 미야기센다이
사망 1975년 12월 15일 (향년 86세)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복무 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 1906년 ~ 1945년
최종 계급 대장
근무 일본제국 해군 항공 본부
일본제국 해군 제4함대
일본 해군병학교
지휘함 소야(방면순양함), 미카사(전함), 카스가(장갑순양함)
쿠라마(순양전함), 타카치호(방호순양함), 사쿠라(구축함)
후소(전함), 요도(통보함), 쿠마(경순양함), 히에이(전함)
주요참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전쟁)
산호해 해전
서훈내역 욱일장[ruby(旭日章, ruby=きょくじつしょう)](1등급)
묘소 다마 공동묘지[ruby(多磨霊園, ruby=たまれいえん)]

1. 개요2. 행적3. 삼국동맹 반대론4. 평가5. 대중매체6. 저서

[clearfix]

1. 개요

일본 제국군인. 해군 제독.

요나이 미쓰마사,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함께 삼국 동맹 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했던 소위 해군 좌파 삼인방의 일원으로 유명하다.

2. 행적

일본해군병학교 37기로 임관.

1932년 해군성 군무국 1과장에 임명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찬성하는 조약파의 일원으로, 함대파의 영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추진하는 해군성 고유권한을 군령부로 이전하는 시안에 결재를 끝까지 거부하고 결국 한직인 요코스카 진수부로 전출되지만, 후시미노미야가 비롯 자신의 뜻에는 반대했지만 그 강직함을 칭찬한 덕분에 전역을 면하고 당시 런던 해군 군축조약으로 연습전함으로 개장되었던 공고급 순양전함 2번함 히에이의 함장이 된다. 연습함 함장이라니 별 것 없어 보이지만 당시의 히에이는 덴노의 좌승함으로 사용되는 어소함(御召艦)이었기에 주력함 함장에 필적하는 엘리트 코스였다.

1940년 해군 항공본부장으로 취임, 이듬해 거함거포주의에 기반한 마루5계획(야마토급 전함의 건조계획)에 반대하며 신군비계획론을 주창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항공기가 발달한 오늘날, 이제부터의 전쟁에서는 주력함대간의 결전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 거액의 돈이 필요한 전함을 건조할 필요가 없다. 적의 주력함이 어떤 것이든 충분한 항공병력이 있다면 능히 침몰시킬 수 있다.
* 육상항공기지는 절대적인 불침 항공모함이다. 항공모함은 기동성을 가지고 있어 사용상 편리함은 있으나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해군항공세력의 주력은 기지항공세력으로 해야한다.
* 대미전에 있어서 육상기지는 국방세력의 주축이고 태평양에 산재한 섬들은 하늘이 준 요새이다.
* 대미전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지쟁탈전이 주요작전으로 될것임을 단언한다. 바꾸어 말해 상륙작전과 병행하여 상륙대항 방어전이 주요작전이 된다.
* 이에 따라 기지의 전력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므로 만사를 제쳐두고서도 기지의 요새화를 급속히 실시해야 할 것이다.
* 기지의 항공세력을 정비하는데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전함, 순양함 등을 희생(건조포기)해도 좋다.
* 일본이 생존하고 동시에 싸움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해상교통로의 확보는 매우 중요하며 이에 필요한 해상호위세력은 두번째로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잠수함은 기지방어에도 통상보호(해상교통로 방어)에도 공격에도 사용하는 함종으로써 3번째로 고려하여 충실해야 할 것이다.

해상에서의 항공병력의 잠재성을 일찍이 알아본 대단히 합리적인 주장이었지만 이미 구축해놓은 전략 체계를 수정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무능한 대본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이런 요구사항이 전부 반영되기에는 당시 일본 해군의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다.

다만 이노우에의 예상이 꼭 다 맞은 건 아니고, 전함이나 순양함 등으로 수행하는 구식 함대 전술은 태평양 전쟁에서 생각보다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한 육상항공기지는 해군이 아닌 공군(육군 항공대)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일본이 미국을 이길 수 없는 6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 미국은 영토가 광활해서 점령하기 불가능하다.
* 미국의 수도도 공략하기 불가능하다.[1]
* 미국의 군사력은 막강해서 섬멸할 수 없다.
* 미국은 대외의존도가 낮은 데다 물자가 풍부하기 때문에 해상 봉쇄를 해도 효과가 없다.
* 미국은 해안선이 장대하기 때문에 해상 봉쇄 자체가 불가능하다.[2]
* 미국은 캐나다·중남미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남북으로부터 물자를 조달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무시되었고 태평양 전쟁은 일어났다.

개전 당시는 4함대 사령장관직에 있었고, 산호해 해전을 지휘하지만 전략적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철수한다. 상세는 항목 참조.

이후 해임되어 1942년 10월 일본해군병학교 교장으로 전출된다. 교육 활동에 전념하던 당시의 그는 해군선옥론에 의한 미화를 빼고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적성국 언어라는 이유로 영어 교육을 폐지하자는 주장[3]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어 교육 중시를 관철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는 대영제국이 해양 인프라에 끼친 영향력 때문에 영어를 모르고서는 대양 항해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가 교장으로 있었던 당시의 생도들은 전후에 군문을 떠난 뒤에도 그 당시에 외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메리트로 작용해서 괜찮은 민간 직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사관은 무엇을 어느 정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보아 사관의 자유 재량을 존중하는 교육 철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 전황(戰況)이 어려워 상기했듯 영어 교육을 폐지하고 군사학 위주로의 커리큘럼 전환을 꾀하자는 강경론이 팽배했던 도중에도 보통학(일반 교양) 교육을 중시하였다.

한편 당시 해군성 교육국에서 '학생 교육을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황국사관(皇國史觀)으로 유명했던 히라이즈미 기요시(平泉澄)[4]를 내려보냈을 때에도, 그의 강연을 교관들에게만 듣게 했고 생도들에게는 무턱대고 들려 주지 않았다. 균형 잡힌 교육에 대한 그 나름의 신념이 있었던 듯하다. #

1944년 막장을 달리는 전황 속에서 해군대신으로 복귀한 요나이 미쓰마사의 밑에서 해군차관으로 취임, 요나이를 보좌해 종전공작에 기여했다.

전후 요코스카의 자택에서 은거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다 1975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3. 삼국동맹 반대론

나치독일이 삼국 동맹 조약 체결을 제의했을때, 일본은 중일전쟁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던 시점이었다. 1937년 일본 육군은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쇼와 덴노 앞에서 지나 따위는 한달이면 끝난다 고 말하는 등 큰소리치면서 대륙침략을 개시했지만, 현실은 상해 공략에만 3개월을 소모하고 3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끝내지 못하며 막대한 인력과 물자만 블랙홀처럼 빨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일본의 대서방 외교관계를 악화시킴은 물론이고 일본의 경제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똑같이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하게되면서 미국영국의 산업 생산력, 기술력, 경제력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해군차관을 지내고 있는 동안 일본제국 육군 우익 장교들의 쿠데타 2.26 사건이 일어났 때에는 육전대[5]에게 해군성 경비를 지시하여 침착하게 대응하였다.

요나이 미쓰마사, 야마모토 이소로쿠,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나치 독일, 이탈리아왕국, 일본제국의 삼국동맹을 유일하게 반대[6]하였고 이로인해 신문기사에서는 신문을 낼때마다 요나이, 야마모토, 이노우에를 "해군의 좌파 3마리"라고 비아냥 하였다. 신문을 본 일본제국 국민은 이 3명을 해임시키라면서 거리에서 소리친 적도 있었다. 기자회견장(3명 이외도 나왔었다.)에서도 반대를 표명하면서 욕도 먹었다고 한다.

전쟁에 이길 수 없는 이유, 삼국동맹을 체결해선 안되는 많은 이유를 말했지만 무시되었다. 그러다가 삼국동맹조약을 1940년 9월 7일에 베를린에서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이 체결하면서 세계의 비극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결국 삼국동맹을 체결하고 당당하게 전쟁을 일으키던 최후는 항복과 최초의 원폭실험장이 되고 말았다.

4. 평가

신기술을 활용한 미래전을 완벽하게 예측한 일본군 톱클래스의 전략/군정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산호해 해전의 사례를 보면 본인의 탓만은 아니었다고 해도 전시의 전술적 역량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군 좌파 삼인방의 일원으로서 해군선옥론의 주된 미화 대상이지만 요나이나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비해서는 직위도 높지 않았고 지명도도 낮다. 대전 말기 가이텐 제식화를 최종 결재한 요나이의 밑에서 '마루 특 위원장' 으로 특공병기를 총괄했다는 주장[7]도 있다.

5. 대중매체

6. 저서

회상기(추억의 기록)


[1] 워싱턴 D.C.는 일본 함대가 닿을 수 없는 미국 동부에 있다.[2] 나치 독일조차도 미국의 대서양 방면 해안선은 직접 건드리지 못하고 유보트로 대서양의 에어갭(항공 공백 지대)을 견제하는데 그쳤다.[3] 이는 적국인 일본의 통신을 해독하기 위해 일본어 구사자를 다수 육성한 미국과 비교하면 매우 근시안적인 사고였다.[4] 이 사람은 민중의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학생에게 "돼지에게도 역사가 있느냐"라며 비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5] 전전에 일본 해군에서 해병대 기능을 하던 군대.[6] 물론 해군내에서도 위 3명외에도 반대하는 이가 어느정도 있었다.[7] 출전 "격투구축함대" 倉橋友二郎 작.[8] 해당 배우와 싱크로율이 매우 높다.[9] 영화에선 어느정도 각색이 들어갔다. 실제 역사에선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산호해 해전에서 철수하는 것때문에 야마모토 이소로쿠에게 엄청난 질책을 받았다. 그 후 해군병학교장으로 전출된다. 그러나 영화해선 그런거 없고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해군병학교로 돌아가는 이노우에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