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구 일본 해군에서 추축국 동맹과 대미 개전을 반대하는 스탠스를 취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가리키는 호칭.'해군성 좌파 트리오'(海軍省の左派トリオ), 해군 좌파 트리오, 해군 좌파 세 까마귀(海軍左派三羽烏)로도 불린다.
해군선옥론은 일본 해군이 아니라 이 3인에 대한 미화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 3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해군 출신 작가 아가와 히로유키(阿川 弘之, 2015년 사망)가 쓴 3인에 대한 평전, 일명 '제독 3부작'에 많은 기반을 두고 있다.
정치경제적으로 평등주의나 사회주의적 의견을 비쳐서, 혹은 당시의 유행처럼 공산주의를 주장해서 좌파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고 일본 해군 내에서 기존 보수(우파) 세력과 대립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정치적 의견과는 상관없이 겐다 미노루 등 급진 항공주병파가 기존의 전통적 우파 거함거포주의와 대립했다는 이유로 좌파로 일컬어진 경우도 있다. 현대에는 흔히 반미가 좌파, 친미가 우파로 프레이밍되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2. 행적
1930~1940년대 당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 찬성하는 조약파와 그에 반대하는 함대파가 있었는데, 야마모토를 포함한 삼인방이 조약파로 불렸다. 또한 미국과의 전쟁이 필패임을 주장하며 대미개전 반대, 삼국 동맹 반대 등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피력하였는지는 설왕설래가 있으며, 당시 일본군 지도층 전반이 우파적, 즉 이 삼인방의 반대의견을 냈기 때문에 정치 판도를 엎기에는 이 셋을 포함한 일부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의견도 있다.그 중에서 특히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며 대미개전을 반대하기는 하였으나 요나이가 총리직에서 내려오고 전쟁을 주장하는 내각이 들어서자 의견을 180도 바꾸어 "진주만을 공습해서 기선을 제압하면 승리 가능성이 있다"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 정말로 미국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개전주의자가 되었다기보다는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으로 육군이 해군을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등으로 협박했다는 설도 있고 지난 십수년간 먹은 예산의 성과를 어떻게든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이라는 설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1940년 말 즈음을 기점으로 전혀 좌파라고 부를 수 없는 행보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이후 그 업보였는지 1943년 태평양 전쟁 중 미군에 의해 사망하였다.
요나이 미쓰마사는 개전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히로히토 천황에 의해 내각총리대신에 올랐다.[1] 하지만 온건파였던 요나이를 해군 내 강경파와 육군이 반대하여 취임 당일부터 요나이 내각 타도 목소리가 나왔으며, 결국 반년만에 총리직을 내려놓게 되었다. 이후 제2차 고노에 내각이 들어서고 2개월 만에 삼국 동맹이 체결된다. 야마모토와는 달리 이후에도 전쟁에 적극적인 행보는 보이지 않았으며, 정계에서 잠깐 은퇴한 후 해군대신으로 항복을 지지하는 등 전쟁 말기 수습에 관여한 공은 인정받고 있다. 이후 전범재판에서도 기소되지 않았을 정도. 때문에 일본 내 극우 세력을 제외하면 크게 안티는 없는 편이며, 미국 등 외국에서도 요나이를 아는 사람 중에는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나이에게도 충격과 공포의 에피소드가 있으니 해군대신 시절 어뢰판 카미카제인 가이텐의 제식화를 최종 결재한 것이다.
이노우에 시게요시는 고위직이었던 나머지 둘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웃사이더였기 때문에 굵직한 정치적 행보는 없으나, 전쟁 말기 요나이의 밑에서 해군 차관으로 재직하면서 각종 카미카제 병기의 실무를 담당하는 '마루 특 위원장' 직무에 있었다. 젊은 시절 반대파의 영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에게 칭찬받을 정도의 강직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부분이다.
이렇듯 야마모토의 후반부와 요나이, 이노우에의
이 셋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각 문서 참조.
3. 능력
야마모토는 군 행정가로서는 준수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이유야 어찌되었건 항공전력의 육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야전 지휘관으로써는 그냥 그런 수준으로 진주만 공습으로 전쟁 초반을 유리하게 만들었으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상대를 만만하게 보고 작전 과정에서 온갖 삽질을 한 끝에 항공모함 4척을 날려먹었고 과달카날 전역에서 소모전에 말려들어가 복구 불가능한 피해를 남기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이노우에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에 돌입하면 안 되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할 정도의 안목이 있었고 일본해군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자로서의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산호해 해전의 실패 이후 전술 지휘 능력을 의심받아 다시는 일선 지휘관직을 맡지 못했다. 일본군 내부에서도 '싸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4. 평가
'제독 3부작'의 내용만큼 긍정적인 인물들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 추축국 고위층에서는 이들 정도의 안목이 있는 사람이면 나름 개념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추축국 고위층은 막장이었다.[2]일본 내부에서 해군선옥론을 주로 비판하는 서적, 인물, 네티즌들이 대부분 '야마모토가 연합함대를 말아먹은 것은 무진전쟁의 복수다', '요나이는 소련의 스파이다' 같은 음모론 수준의 극우들이다 보니[3] 해군선옥론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으면서도 일반적인 평가는 아직 제독 3부작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단적인 예로 2011년작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시 제독 3부작의 스탠스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1] 히로히토 천황의 회고록에 직접적으로 삼국 동맹이 결성될 것을 우려하여 요나이를 임명하였다고 나온다. 다만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책임 문서에서도 볼 수 있듯 이 회고록 자체가 천황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쓰여진 것이라는 의견이 많은 만큼 어느정도 걸러들어야 한다. 다만 요나이 내각의 반대파가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그가 반전주의 노선을 탄 것은 맞아보인다.[2] 독일에는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나 아돌프 갈란트 같은 사람들이 있겠다. 야마시타나 만슈타인 등은 능력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전쟁범죄자라는 점에서 개념인이라고 볼 수 없다.[3] 심지어 삼인방이 삼대오물보다 못한 국적이라고까지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