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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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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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19><colcolor=#fff> 민영린 閔泳璘 | |
성명 | <colbgcolor=#FFF,#191919>민영린(閔泳璘) |
초명 | 민영언(閔泳彦) → 민영기(閔泳琦) |
자 | 기옥(奇玉) |
본관 | 여흥 민씨[1] |
출생 | 1872년(고종 9)[2] 11월 15일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
사망 | 1932년 6월 1일 (향년 59세) |
직업 |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
주요 경력 | 홍문관 정자, 성균관 대사성 궁내부 특진관, 동지돈녕부사 규장각 제학,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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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한 말의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한 수구파 관료로 아편 흡입으로 인해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박탈당하기도 한 마약사범이기도 하다. 초명은 민영기(閔泳琦)이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기옥(奇玉)이다.
2. 상세
1872년(고종 9) 11월 15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민술호(閔述鎬, 1838 ~ 1921. 4. 2.)와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래 여흥 민씨 입암공파 후손이었으나 21촌 지간의 족숙(族叔)인[3] 삼방파의 민태호에게 입적했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순명효황후의 남동생이다.그는 종9품 교관(敎官)을 지내다가 18세의 나이로 1890년(고종 27) 별시 문과에 병과 18위로 급제했고#, 곧 출사하여 홍문관 응교, 춘추관 편수관, 태자비궁 대부, 비서원승, 장례원 장례, 궁내부 협판, 홍문관 부학사, 궁내부 특진관, 회계원경, 시강원 담사 등을 역임했다.
1904년 예식원 부장으로 승진했고, 같은 해 특파일본보빙대사 이지용의 수행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내장원 감독, 예식원 부장, 군부대신 관방장, 동지돈녕원사 겸임 특명전권공사, 비서원경,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찬정, 태의원경, 시강원 첨사, 장례원경, 지돈녕사사, 규장각 제학 등을 역임했다.
경술국치 이후 강제 병합에 협조한 공로로 1910년 10월,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습작했고, 1911년 1월 12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9년 5월, 아편을 흡입해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이에 따라 동년 7월에 작위를 박탈당했다.
1932년 6월 1일,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3. 여담
- 1933년 잡지 별건곤 5월호에서 민영린이 호색과 마약을 일삼다 작위를 박탈당하고 도박으로 재산까지 다 날렸다며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