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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17:43:53

기유각서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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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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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공식 명칭
<colbgcolor=#f6f6f6,#2d2f34> 한국어 大韓帝國 司法 및 監獄 事務 委託에 關한 覺書
일본어 구자체 [ruby(大韓帝國, ruby=だいかんていこく)]の[ruby(司法, ruby=しほう)][ruby(及, ruby=およ)]び[ruby(監獄事務委託, ruby=かんごくじむいたく)]に[ruby(關, ruby=かん)]する[ruby(覺書, ruby=おぼえがき)]
일본어 신자체 [ruby(大韓帝国, ruby=だいかんていこく)]の[ruby(司法, ruby=しほう)][ruby(及, ruby=およ)]び[ruby(監獄事務委託, ruby=かんごくじむいたく)]に[ruby(関, ruby=かん)]する[ruby(覚書, ruby=おぼえがき)]
1. 개요2. 내용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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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己酉覺書

대한제국 사법 및 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 또는 기유각서는 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공식 명칭은 대한제국 사법 및 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각서이며 말 그대로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 행정권을 일본제국에게 양도한다는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사법권이 박탈되었고 순종의 실권은 일제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에 의해 전격 박탈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국권과 경찰권[1]만 안 빼앗겼을 뿐 사실상 일제의 속령이 되었다.[2] 오늘날에도 속령은 온전한 주권국가로 취급받지 못하며 아예 국가 분류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으니[3] 사실상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만 합병 처리가 되지 않았고 명목상의 주권만 남았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이미 멸망한 국가가 된 셈이다.

2. 내용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 대신인 이완용과 일본의 2대 통감인 소네 아라스케 사이에 맺어졌다.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국의 사법과 감옥에 대한 사무를 개선하고 한국의 신민(臣民), 아울러 한국에 있는 외국 신민 및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확실하게 할 목적과 한국 재정의 기초를 공고하게 할 목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항을 약정한다.

제1조 : 한국의 사법과 감옥에 대한 사무가 완비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는 한국 정부는 사법과 감옥에 대한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

제2조 : 일본 정부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일본인과 한국인을 한국에 있는 일본 재판소와 감옥의 관리로 임용한다.

제3조 : 한국에 있는 일본 재판소는 협약 또는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 한국 신민들에 대하여 한국의 법규를 적용한다.

제4조 : 한국의 지방 관청과 공공 관리는 각기 직무에 따라서 사법과 감옥 사무에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의 당해 관청의 지휘 명령을 받으며 또는 이것을 보조한다.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사법과 감옥에 관한 일체 경비를 부담한다. 이상을 각각 본국 정부의 위임을 받아 한국과 일본의 글로 된 각서(覺書) 각 2도(度)를 작성하여 이것을 교환하고 뒷날의 증거로 하기 위하여 기명(記名)하고 조인한다.

융희(隆熙) 3년 7월 1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메이지(明治) 42년 7월 1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대한제국이 사법권과 감옥 사무(교도 행정권)를 일본 제국에 넘기는 것을 뜻한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사법부와 재판소 및 형무소는 전부 폐지되고, 그 사무는 통감부의 사법청이 맡게 되었다. 이로써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정치적 권력을 강탈했고 완전히 일제의 꼭두각시가 된 대한제국은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3. 기타



[1] 그나마 그 경찰권도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로 박탈되었다.[2] 속령은 군사권과 사법권이 외부 국가에 있는 지역인데, 정미 7조약 & 대한제국 군대 해산 당시까지만 해도 명목상의 사법권은 대한제국에 있었으나 기유각서로 인해 명목상의 사법권도 박탈당했다.[3] , 푸에르토리코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