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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05 18:43:49

베베르-고무라 각서

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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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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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F6F6F6,#2D2F34> 한국어 베베르-고무라 각서
러시아어 Меморандум Комуры – Вебера
일본어 小村・ウェーバー協定 (こむら・ウェーバーきょうてい)、小村・ウェーバー覚書 (こむら・ウェーバーおぼえがき)、第1次日露議定書 (だいいちじにちろぎていしょ)

1. 개요2. 주요 내용 및 배경

1. 개요

1896년 5월 14일 주한 러시아 공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vanovich Wäber, 1841~1910)와 일본 공사 코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1855~1911)가 조선과 관련해 체결한 각서.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조선의 안위를 두고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2. 주요 내용 및 배경

을미사변 이후로 일본 제국의 내정간섭과 외교적, 물리적 위협이 지속적으로 행하여짐에 따라서, 고종은 춘생문 사건울 통해 미국 공사관으로 피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영사관 피난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며 일본 제국의 압박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에 고종은 일본 제국의 정치적 간섭을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이후 아관파천을 통해서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 제국 황실의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하게 되는데, 일본 제국은 고종이 러시아 제국의 공사관으로 피난을 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터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일본 제국의 조선 정부 내외 영향력은 일정한 부분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 국왕을 공사관에 거주 및 보호하게 된 러시아 제국은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 제국은 조선 내부에서의 영향력이 붕괴되는 일 만큼은 막아내겠다는 계산 하에 러시아 제국과 본격적인 협상에 나섰다. 러시아 제국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한반도보다는 만주를 우선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제국과 본격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더욱이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아직 공사중이었기에,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군사적 우위가 확보되는 바로 그때 까지는 직접 충돌하거나 군사적으로 마찰을 일으키기를 꺼렸다. 이에 주 러시아 제국 공사 베베르와 일본 제국 공사 코무라 주타로가 양국의 입장을 서로 전달하였다. 마침내 이를 바탕으로 1896년 5월 14일,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베베르-고무라 각서가 비밀리에 체결되게 된다.

베베르-고무라 각서는 총 4조항으로 구성되어져 있으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조
조선 국왕의 환궁 문제는 국왕 자신의 판단에 일임하며,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은 안정상 문제가 없다고 여겨질 때 환궁하는 것을 충고한다.
제2조
현재 조선 정부의 내각 대신들은 국왕의 의사대로 임명되었으며,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과 일본제국은 국왕에게 관대하고 온화한 인물을 내각 대신에 임명하도록 항상 권고한다.
제3조
조선의 안녕을 위해서 부산과 경성 사이에 설치된 일본제국 전신선 보호를 위해 배치한 일본 위병을 헌병으로 대신하며, 이들 헌병은 조선 정부가 안녕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지역부터 차례대로 철수시킨다.
제4조
한성 및 개항장에 있는 일본인 거류지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제국은 일본군을 배치하고서 상황이 안정되면 철수시킬 것이며, 러시아 제국 또한 제국의 공사관 및 영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할 수 있다. 러시아 제국 역시 상황이 안정되면 즉시 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명시한다.
일본 제국은 이 각서를 통해 반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한반도에서 러시아 제국 영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위 조약 제3조와 제4조에서 볼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조선과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