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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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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국권 피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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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9월 20일 운요호 사건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1882년 7월 23일 임오군란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1882년 8월 30일 제물포 조약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1885년 1월 9일 한성조약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1885년 4월 18일 톈진 조약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1894년 7월 23일 갑오사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1894년 7월 25일 청일전쟁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1895년 4월 23일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1896년 5월 14일 베베르-고무라 각서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1896년 6월 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1898년 4월 25일 니시-로젠 협정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1902년 1월 30일 1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1904년 5월 31일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1904년 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1905년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1905년 4월 16일 대한제국군 감축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1905년 7월 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1905년 8월 12일 2차 영일동맹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1905년 8월 13일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1907년 7월 20일 고종 황제 퇴위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해산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1909년 9월 4일 간도협약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1910년 6월 24일 한일약정각서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1910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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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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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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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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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제국 국장.svg 대한제국의 대외 전쟁 ·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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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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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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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체포된 호남 의병들
1. 개요2. 배경3. 작전 개요4. 진행5. 결과6. 둘러보기

1. 개요

남한 대토벌 작전(일본어: [ruby(南韓大討伐作戦, ruby=なんかんだいとうばつさくせん)])은 일본 제국19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 한반도 남부의 의병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실시한 군사 작전이다. 여기에서 '남한'은 대한제국의 남부, 삼남지역(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의미하며 그 중 동학농민운동의 근거지였던 전라남도 지역이 마지막 작전 지역이었다.

일본 육군의 정예 2개 보병 연대, 육군 헌병일본 해군의 보조를 받아 투입되어 진행된 이 작전은 의병과 같은 게릴라 저항 세력의 생존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해당 지역 민간인들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각종 초토화 작전을 동시 수반하였고, 결국 작전이 종결될 시점에 이르면 호남 지역의 의병들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된다.[1] 이후로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국내에서의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은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주로 중국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이 활동하는 것으로 그 맥을 잇게 된다.

2. 배경

역사스페셜 - 잊혀진 전쟁 1907 제2부
1907년 정미 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는 강제 해산당하고, 해산된 정규군은 남대문 전투와 각 지방 진위대의 봉기 이후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움직임을 보이던 의병에 가담하게 된다.[2] 이 시기 일어난 의병들을 정미의병이라고 부르는데, 각종 신식 무기를 손에 든 정규군[3]이 가담함에 따라 의병들의 전력은 대폭 증강된다.

각개 활동하던 전국의 의병들이 13도 창의군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조직을 만들어 서울 진공 작전을 펼치기까지 한다. 애초에 전력이 명백한 열세였던데다가, 총사령관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면서 전투 직전에 진영에서 이탈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4] [5]까지 터지면서 이 작전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고, 각 지역의 의병들의 근거지를 진압하게 된다.

1907년대의 정미의병은 원주, 여주, 진주, 양주, 강화 등 진위대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나 지속되는 일제의 토벌로 의병활동의 근거지는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가 차례로 진압되면서 점차 전라도로 옮겨가게 된다. 1908년 전라도의 의병 교전 횟수는 전국 전체에서 25%를 차지하였고, 의병의 수도 마찬가지로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더더욱 심화되어 1909년 6월까지 전투 횟수의 47.3%, 전투 의병 수의 50.1%가 호남에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의병들의 마지막 근거지인 전라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작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일제의 추산에 의하면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 호남 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000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이곳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본거지[6]로서 반일 의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반일 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호남 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남한대토벌작전 [南韓大討伐作戰]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한국학 중앙 연구원)

3. 작전 개요

4. 진행

작전은 총 3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단계 작전은 변산반도 - 남원 - 하동군으로 이어지는 봉쇄선을 설치하는 것이 골자였다. 제2단계에서 육군 2개 연대는 광주, 영광 등으로 남하하면서 의병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서부를 맡은 제1연대는 영산강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 쪽으로, 동부를 맡은 제2연대는 섬진강에서 소백산맥을 통과해 영산강으로 진격했다. 제3단계에서는 해상 루트를 이용해 섬으로 숨으려는 의병을 추적하기 위해 해군 수뢰정 4척을 이용하는 도서 지방 초토화 작전이었다.

의병은 활동 지역 근처의 민간인들의 후원을 필수적으로 하는 게릴라 세력이었으므로, 호남 일대 민간인들에 대한 탄압도 이 과정에서 뒤따랐다. 의병을 후원해주는 것으로 의심되는 마을을 포위하고, 호적 또는 명부나 민적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하면서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이 나타나면 추궁하였으며, 의병을 숨겨주고 식량을 제공했다는 증거가 잡히면 해당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이때문에 호남의 민간인들은 일본군에게 보복당할까봐 의병을 숨겨주거나 지원해주는것을 기피하였고 의병들은 이전처럼 민간인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한 번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하면서 일본군의 단속을 피해 숨었다가 안심하고 다시 나타난 의병을 사살하고 체포하는 치밀함까지 보여주었다.[7] 이러한 일제의 군사적 압박에 의병들은 전면전을 회피하고 은신처를 자주 옮기거나, 부대를 나눠 각개적으로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으려고 시도하면서 전력 보존을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 군경이 친일 밀정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예상 이동로에 매복까지 하면서 철저하게 때려잡는 바람에 큰 소득은 없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행정 구역마저 파괴하는 짓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전라남도 낙안군에 있던 벌교라는 마을에서 의병장 안규홍이 맨손으로 일본 육군 헌병을 때려죽였다는 이유로 낙안군을 폐군해 버렸다. 게다가 낙안 지역을 2개로 나누어 보성, 순천에 각각 편입하여 행정 구역이 갈려버렸다. 그리고 옛 낙안군 지역은 옆도시 순천이 산업이 탄탄한 중견도시로 성장하는 동안 완전히 소외되었다.[8]

5. 결과

일단 일본이 공식적으로 작성한 1909년 10월 27일자 통감부 보고서를 보면 일본군 사망자는 불과 육군 병사 8명이 전부로, 계급별로 상등졸 1명(병사), 일등졸 5명(전사 2명, 경비정 전복으로 익사 1명, 도하 중 익사 1명, 추락사 1명), 이등졸 2명(전원 경비정 전복으로 익사)이다. 붙잡은 의병이 1,100여명, 항복한 수는 7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의병장만도 103명이다.[9] 특히 뼈 아팠던 것은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 지방 사족 출신이 다수였던 주요 의병장들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1906년부터 1911년 6년간 1852회의 전투가 있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한 남한대토벌작전 전체 기간 중 양측의 피해규모를 살펴보면, 토벌대측은 사망자가 136명, 부상자 277명이었던 반면, 의병측은 사망자가 17,779명,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이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한편 포로로 잡힌 의병들은 '폭도'로 규정당하고 일본군에 의해 해남에서 강진, 장흥, 보성, 벌교, 순천, 광양 등을 거쳐 하동까지 도로(현재의 국도 2호선)를 개설하는 강제 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이 작전 이후에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에서는 아직 의병이 남아있었으나 일본의 토벌로 인해 그 기세는 점점 약해졌다. 결국 한국이 일본에 완전히 병합당한 이후 국내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항일 전투 세력은 국경을 넘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그 명맥을 잇게 된다.

덧붙여 이 학살로 인해 국내에서 대규모 항일 무력 세력이 와해되고 국내에서는 황해도 산간과 경북 일월산, 그리고 서남해 섬 지역 등지에 소규모 조직만이 남게 된다. 이후 항일 무장독립운동의 근거지는 국외인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가게 된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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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지하드 깃발.svg 알카에다 및 저항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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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결과는 일본 정부 측의 선전과 맞물려 서구권 일각에서 한국인(당시에는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한국인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에 순응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물론 3.1 운동이나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같은 대규모 반일 시위, 1915년까지 진행되었던 채응언 의병 부대의 투쟁, 의열단의 국내 의거와 의병의 후예인 독립군들이 진행한 192~30년대 해외 무장투쟁 사례들과 같이 이런 인식에 대해 반박할 근거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가진 서구인들을 만날시에는 대처가 쉬운 편이다.[2] 특히 일본의 통제와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지방의 진위대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했다.[3] 물론 그래봤자 일본군의 장비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기는 했다.[4] 유교적 사고 방식으로 당연히 정당화되고 모두들 납득할 수있었다면 당시 이인영의 낙향을 되돌리려 설득을 시도한 같은 유림들이 왜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예시에서 보듯 유교 역시 전쟁 등 피치 못한 긴급한 상황인 경우 집안 제사 등은 잠시 유보하는 걸 허락했다. 때문에 정통 유학자의 관점에서도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빠져야 할 이유가 없었고 부친상은 얼마든지 연기하는 게 당시 유교적 시각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5] 그래서 이를 두고 이인영이 혼자 도망쳤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떠나기 전부터 그냥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이인영은 나름 자신의 할일을 다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실제로도 허위나 민긍호의 합류로 이인영이 없어도 체제가 굴러갈 수 있었기에 실제로는 어처구니 없이 작전이 터진게 아니라 이건 아니라고 보고 서울진공작전을 취소하는 대신 기존의 유격전 작전체계로 다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6] 그도 그럴게 전라도는 곡창지대다. 당연히 농민운동의 본거지가 될 수 밖에..[7] 의병과 관련이 깊은 곳은 수십번까지도 수색을 했다.[8] 21세기 현대에 낙안 지역의 유명 관광지가 된 낙안읍성은 전국이 경제발전하던 시대에 발전 동력이 전혀 없다보니 오히려 보존이 잘 되어 관광지가 된 케이스다. 일제의 만행이 전화위복이 된 극단적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9] 남한 대토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