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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0:50:41

참정권

공민권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
2.1. 인류학에서 정치적 참여의 변화2.2. 징병제와의 관계2.3. 빈민층 참정권의 역사2.4. 흑인 참정권의 역사2.5. 여성 참정권의 역사
2.5.1. 고대 그리스2.5.2. 여성 참정권 운동
2.6. 장애인 참정권의 역사2.7. 청소년 참정권의 역사
3. 대한민국 헌법에서의 참정권4.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②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을 받거나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참정권()은 국민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공민권(公民權, civil rights) 또는 민권[1]이라고도 한다.

흔히 선거권이나 피선거권 등을 참정권이라고 아울러 부른다. 참정권의 확대는 그 사회의 인권의식의 진보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회 운동 분야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현재는 선진국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이고 다른 권리들에 대한 요구가 높은 편이다. 다만 독재국가와 제정일체 국가 등에서는 여전히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2. 역사

다른 모든 권리와 같이 인류사에서 참정권이 공짜로 주어진 적은 없다.[2]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다면 정당한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한국에 그런 일이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아침과 심야에 투표할 수 없어 권리를 빼앗기는 노동자들도 있다. 투표 시간 연장과 투표 시간 보장이 필요하다. 사실 이미 근로기준법을 통해 근로자에 대한 사용자의 투표 시간 보장이 의무화되어 있다.[3]

2.1. 인류학에서 정치적 참여의 변화

파일:영국 선거법 개정.png
영국의 선거법 개정 과정.
인류학에서 사회의 변동에 따라 사회 구성원의 정치적 참여 방법의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는 바를 조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 옛날, 흔히 무리사회(band)라고 불리던 유랑 시절에는 정치라는 개념 자체가 불분명했다. 수렵채집을 통해 하나 또는 소수의 확대가족이 그날그날 풀칠하는 정도였으므로 구성원들 중 좀 더 사냥감의 집단적 움직임을 잘 이해하고, 먹을 수 있는 식물의 대규모 자생지를 잘 찾는 등의 노하우가 뛰어난 사람이 부각되었으며, 좀 더 완력이 좋고, 사냥을 잘 하고, 과단성이 있고, 리더십이 있는 등의 지도자적 특질이 있는 사람들도 주목받았다. 즉 본인이 잘 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암묵적인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고 그 지도자를 지지하는 것도 당연히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수백 명으로 인구가 증가, 부족사회(tribe)가 되고부터는 빅맨(대인)이라는 지도자 계층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단순히 그 부족의 유력자일 뿐이며 어디까지나 개인적 인망과 영향력만으로 선출된 것이므로 그 입지는 불안정했으며 여전히 누구나 본인 하기에 따라서 빅맨이 될 자격이 있었다. 또한 직접민주주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중요한 안건은 부족원 전체를 모아놓고 부족회의를 열고 결정했으며, 여기서 발언권도 공평하게 주어졌다. 빅맨은 단순히 의견을 최종 수렴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다 인구가 더욱 증가하여 사회분쟁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사회는 추장사회(chiefdom)로 진입한다. 여기서부터는 신분제도가 생겨나고 추장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의 것이 되며, 추장직은 대대로 세습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이 직접 선출할 권리를 상실한다. 추장은 깃털이나 문신으로 스스로를 치장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으로 생활했으며, 평민들은 추장을 보면 자리에 엎드리는 등의 복종을 해야 했다. 의사결정권을 추장이 독점하므로 민주적 회의를 열 필요가 없었으며, 평민들은 그저 시키는 일이나 잘 하면 되었다. 대신 추장은 그 사회의 지속성과 안정성에 책임을 져야 했고, 자연재해 등으로 위태로울 때는 축출당하기도 했다.

이후 인구가 수만에 달하면 국가사회(state)로 진입하는데 정치적 참여의 측면에서 볼 때 초기 국가사회에 대해 특기할 만한 건 별로 없다. 과거 제도처럼 제도화된 방법을 통해 전문화된 가신이 되어 국왕의 국정을 보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정도? 그러다가 현대적인 의미의 국가, 즉 후기 국가사회에 들어서면서 많은 선진국들이 국민의 참정권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투표, 집회와 시위, 국민의 감시 외에도 국회의원, 시의원, 구의원 등을 대리인으로 세우는 간접적인 정치참여 방법이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국가의 꼴을 갖추고도 참정권 따위 씹어먹는 경우도 있거나 부정선거를 통해서 참정권을 제약시키는 경우 또한 많다.

2.2. 징병제와의 관계

인류 문명에서 정치권력을 가진 특권층은 청동기 시대에 등장했다. 당시의 지배 계층은 '신관'같이 종교적 권위를 가진 '제사장 계급'과 '귀족'처럼 세속정치 권력을 가진 '전사 계급'이 있었는데 이 중 전사 계급을 살펴보면 중국에서 청동기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계급인 는 갑골문의 해석에 따르면 도끼를 든 전사를 형상화한 한자이며 전쟁에서 말 4마리가 수레 1대를 끄는 병거 1승()을 타는 귀족으로써 농민 출신의 보병대를 이끌었다. 전쟁이 전차를 탄 귀족들의 단기결투에서 대규모 보병들의 총력전 형태로 바뀌면서 士는 전사 계급의 성격이 옅어지고 행정업무를 하며 오늘날 선비의 이미지로 변화한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초기엔 호위무사의 의미였으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문관과 무관을 포함하여 '칼을 차고 다닐 권리를 가진 지배계층'을 의미하는 말로 변화되었다. 왕()은 군 통수권을 가진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였으며 로마의 황제를 뜻하는 임페라토르는 '총사령관'이라는 의미이다. 로마 군단에서 기사계급인 에퀴테스원로원 의원 다음가는 신분이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 말 타고 싸우던 전사 계급이다. 국가원수는 군대에 대한 통수권을 가진다.

무력은 권력 획득의 수단이기도 하고, 공동체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적 중요성은 무력의 독점이 곧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총기와 화약의 발달로 전사귀족이 몰락하고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용병제 대신 징병제와 시민군을 실시하면서 참정권이 확대된다. 그러나 이때도 남성만이 군복무를 하였기 때문에 여성의 참정권은 제한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군수산업에 여성의 노동력이 동원되어 전시지원과 같은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여성 참정권이 부여된다. 미국에서는 1792년 민병대법을 통하여 흑인의 군 복무가 금지되었다가 남북 전쟁 도중에 흑인의 모병이 이루어지고, 전후 1870년에 수정헌법 15조를 통해 흑인 참정권이 부여된다. 미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20년 수정헌법 19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스 아테네는 원래 귀족정이었으나 교역 활동을 통하여 부농과 상인, 수공업자 계급이 부상하고, 군사전술이 귀족들에 의한 기병중심의 전술에서 중산층의 중장보병에 의한 팔랑크스 전술로 바뀌면서 참정권이 확대된다.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인 BC 621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에서 제정된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에서는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시민에게 참정권이 부여되었다.#
고대 도시국가는 일정한 영토를 지배하는 정치공동체로서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도시국가들 간에는 영토 확장, 적대세력의 토지나 식량 약탈, 전쟁포로의 노예화 등을 목적으로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에 따라 전투를 전담하는 군사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다. 고대문명의 발전으로 검, 창, 방패 등의 무기가 개발되면서 전투는 주로 사람의 근육이나 이러한 도구의 힘을 이용해서 제한된 범위에서 행해질 수 있었다.
아테네는 일정 재산을 보유하고 자비로 무장 가능한 시민에게 군대참가 자격을 개방하여 민병대(militia)의 형태로 군대를 유지했다. 따라서 병역은 시민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조건이자 ‘시민적 특권’이었다. 마찬가지로 병영국가(garrison state)로서 스파르타에서 군복무는 시민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이었다. 로마제국은 토지보유자로 구성된 민병대를 보유하였고, 재산에 따라 등급을 구분하여 군복무의 대상자를 선발하였기 때문에 군복무는 로마시민만의 특권으로 인식되었다.
이혜정, 국방의 의무의 헌법적 의미와 정당화 조건, 헌법학연구 vol.26, no.3, 2020, pp. 263-296#
이렇듯 고대부터 전사계급이 세속정치의 권력을 가진 특권계층이었으나 총기의 발달로 일반시민도 강력한 무력의 사용이 가능해지면서 전사 계급인 기사가 몰락하고, 근대에는 민족주의공화주의,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국민개병제상비군 제도가 이뤄지게 된다. 근대에 등장한 공화주의사회계약론에서는 인간이 사회의 필요성을 느끼고 합의에 의해 법을 만들어 권리와 의무가 따르게 되었다고 보는데[4] 사회계약론의 이론적 근거에 따라서 병역의 의무 수행에 대한 대가로 참정권이 확대된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으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혁명의 산물로서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에 이어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면서 근대 헌법국가가 탄생하였다.
근대 헌법국가의 탄생으로 군주 개인의 자의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의회에서 승인된 객관적인 법에 의해 국가권력이 제한되었다. 이것은 법으로써 권리를 형성하여 모든 권력으로부터 시민적 권리를 보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의 자의적인 의무 부과로부터 시민적 권리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시민적 권리뿐만 아니라 시민의 의무도 법을 통해 규정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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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프랑스 혁명 이래 헌법제정과정에서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의무가 규정되기 시작하면서, 사인 상호간의 인간적 자연적 의무는 국가에 대한 법적 의무로 그 성격이 변화하였다.
1791년 헌법은 납세의 의무, 무상교육의 의무, 그리고 국가 법률 국왕에 대한 충성과 헌법수호의 의무에 대해 규정하였다.
국방의 의무는 1793년 프랑스 헌법에서 처음으로 규정되었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한 혁명전쟁이 시작된 이후 군대에 복무할 병력이 부족해지자 총동원령을 통해 병력부족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를 위하여 법적 근거가 필요했고, 1793년 헌법 제107조에서 “공화국의 군대는 전체 프랑스 인민으로 구성된다”고 하고, 제109조에서 “모든 프랑스인은 군인”이라는 규정을 마련하면서, 국가방위는 법에서 규정한 시민적 의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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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이후 헌법국가의 탄생으로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법적으로 규정되면서 구체제(ancien régime)에서 군주(국가)에게 복종하던 신민은 주권보유자 즉, 국민이 되었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로 구성된 국민은 민주주의를 매개로 국가와 결합하였다. 절대국가에서 전쟁이 군주 개인의 목적을 위하여 사병에 의해 수행되었다면, 이제 전쟁은 국가와 결합한 국민 ‘자신’들의 존립과 직결된 문제가 되었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라는 주인 의식과 함께 모든 국민이 전쟁에 참여하는 명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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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자인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통해 자신의 자유(정치적 권리)를 확대해 나갔다. 프랑스 혁명 직후 병역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능동적 시민’을 중심으로 확립되었고, 혁명전쟁이 계속되면서 병력을 충족하는 과정에서 1793년 헌법은 제한선거를 폐지하고 ‘수동적 시민’으로 참정권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들은 “병역 없이 참정권 없다”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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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정에서 국방의 의무는 선거권이 확립되면서 시민들의 참정권이 확대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국방의 의무가 선거권을 부여하는 기준이자 일종의 특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참여에서 자의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 즉 다른 시민들과 구별되는 차별취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방의 의무는 평등원칙을 매개로 하여 권리주장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혜정, 국방의 의무의 헌법적 의미와 정당화 조건, 헌법학연구 vol.26, no.3, 2020, pp. 263-296#
이렇듯 징병제의 실시는 참정권의 확대와 깊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세계 최초의 징병제는 프랑스 혁명 이후 성립된 프랑스 혁명 정부가 1793년 8월 23일 총동원령을 일시적으로 선포하였고, 1798년 장 바티스트 주르당에 의하여 '주르당 법' 혹은 '주르당과 델브렐의 법'이라 불리는 모집령을 실시하여 법적으로 제도화하였다.프랑스혁명과 1798년 국민개병제 법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러한 징병제로 모집되고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단결된 대육군(Grande Armée)으로 유럽을 휩쓸었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에 대항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해야 했고, 징병제 수행에 대한 대가로 참정권 부여와 같은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현대 프랑스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하던 시절에는 병역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피선거권이 없었으며 선거에 의해 임명되는 직책은 물론, 여타의 공직에도 취임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의 참정권을 얻기 위하여 징병제 요망 운동이 자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없이 동등한 대우와 조선인의 권익 향상을 요구하며 징병제와 참정권을 요구하였다.일제시기 참정주의 세력의 ‘징병제요망운동’과 전쟁협력, 태평양 전쟁시기 조선인・대만인 참정권 문제, 식민지 조선과 병역 의무의 정치학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전시 체제가 형성되면서 조선인 징병제가 수면 위로 부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참정권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동안 참정권을 주장해 온 국민협회뿐만 아니라 同民會, 時中會, 甲子俱樂部 등 식민지배 협력 단체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참정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1936년 11월 징병제 실시를 슬로건으로 하는 간담회에서 "우리 조선 사람도 이제는 병역의 의무까지 다하여 바친 뒤 그런 뒤, 일본 내지인과 같이 의무교육도 시켜주는 권리를 달라 할 것이요, 참정권도 조만 달라고 할 것이요"하였는데, 이는 징병제와 참정권을 연계시키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민협회, 동민회, 시중회 등의 ‘징병제요망운동’은 일본 국민과 동일한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그 이면에는 동일한 권리부여 즉 참정권획득을 내용으로 한 조선과 일본 간의 차별제도 철폐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성주현, 조선총독부 관료의 구술기록을 통해 본 참정권 문제, 한일민족문제연구 vol. 38, 한일민족문제학회, 2020, pp. 55-87 #
논의 초기에 일본 귀족원에서는 조선인 징병제와 참정권은 시기상조라고 보았고 조선총독부는 신중론을 취하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인의 참정권과 의무교육, 병역의무에 대한 간담회가 논의되었으나 결국 징병제와 참정권이 실시되지 않고 조선총독부는 1938년 1월 15일 조선인 지원병 제도를 발표했다. 1943년에는 아예 조선에 징병제를 도입했고 그 대가(?)인지 1945년 3월 17일 일본 정부는 '귀족원령 중 개정안'과 '중의원의원선거법 중 개정 법률안'을 제국의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기간 조선인의 참정권은 실현되지 않았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18세 선거권에 대한 근거로 18세가 되면 병역의 의무납세의 의무를 수행 가능하기에 투표권을 줘야 된다는 주장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런 주장을 하였다.#

2.3. 빈민층 참정권의 역사

빈민층은 남자여도 여성들과 똑같이 참정권을 얻지 못했다. 고대 부분적 민주주의 사회를 대표하는 그리스아테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참정권은 보통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느냐가 기준인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무기와 갑옷을 마련할 돈이 필요했으며 이런 돈이 없는 빈민이 참정권을 얻기 매우 힘들었다. 다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해전이 많이 벌어지게 되고 빈민들도 노잡이로 참전이 가능해지면서 참정권을 얻을 기회가 생겼었다.

미국에서도 빈민은 참정권을 얻지 못했다. 이 문제는 산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서서히 불거지기 시작했으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이 그 대표 예시이며 1880년대 남성 보통선거권 획득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

2.4. 흑인 참정권의 역사

미국에서는 1792년 민병대법을 통하여 흑인의 군복무가 금지되었다가 남북전쟁 도중에 흑인의 모병이 이루어지고, 전후 1870년에 수정헌법 15조를 통해 흑인 남성들에게 참정권이 부여된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문서 참조.

2.5. 여성 참정권의 역사

2.5.1. 고대 그리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부분적 민주주의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아테네에서도 여성은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시 참정권이 주어졌던 대상은 국가방위의 의무를 수행하는 성인 남성뿐이었다.

아테네에서 고대에 부분적 민주주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도시국가라는 규모가 작은 집단인 동시에 지중해의 요충지에 위치한 풍족한 환경과 더불어 성인 남성 개개인이 (특히 전쟁에서)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당시 기준에서 중요한 인적자원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집단(여성, 빈민층 등)은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참정권도 부여받지 못했다.

사실 아테네에서는 여권이 낮아서 여성이 남편의 허락 없이 외출해서 돌아다닐 수 없었고, 여성이 야외에서 돌아다니는 경우는 가난하여 여성도 노동에 종사하는 빈민이나 창녀, 노예에 한정되었다. 아테네 여성에게는 종교적인 의례와 가사노동만이 허락되었으며 경영이나 재산 관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다른 대표적인 도시인 스파르타에서는 민회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고 5명의 감독관과 30명의 원로회에 의해서 주도되는 과두정이었다. 다만 스파르타는 여성의 권리와 지위가 아테네보다 훨씬 높았다. 스파르타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니었기에 참정권이 없었지만, 여성도 군사훈련과 운동과 같은 교육을 받았으며, 자유로이 외출해서 돌아다닐 수 있었고, 재산도 상속가능했다. 이에 따라 재산 상속으로 부유한 여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는 여성들에게 방종을 허락하여, 스파르타 토지의 40%를 여성이 소유하였고, 스파르타가 여성들에게 지배당하여 몰락하였다는 비판을 하였다.#

2.5.2. 여성 참정권 운동

서유럽의 여성은 시민 운동 등을 통해 참정권을 얻어왔다. 유럽 지역의 여성 참정권에 대한 요구는 대체로 19세기 말엽부터 본격화되었으나 보통 20세기로 넘어가서도 완전히 정립되진 않았다. 이를테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일부 에서 인정한다든지,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참정권에 차별이 있다든지 하던 식이다.

다만 비독립국이거나 각국의 지방에서는 제한적으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핏케언 제도의 여성 후손들은 1838년 이후에 참정권을 줬으며 미국 뉴저지주는 재산을 가진 미혼 여성에 대해 1776년부터 1807년까지 투표권을 인정했다.

영화로도 나온 바 있는 서프러제트 운동은 비인간적인 강압에 맞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한 유명한 사례이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단체 서프러제트는 오래된 평화적 참정권 및 여권 신장 운동에도 불구하고도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인식 및 법적 변화가 시작되지 않았기에 폭력시위를 전개하였다. 불평등과 차별이 분명히 존재한 당시 시대상 여성 참정권의 상황이 암울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정도였냐면 단식투쟁을 벌이는 여성들의 목에 억지로 호스를 꽂고 강제로 음식을 주입시키는 등의 가혹한 압제가 있을 정도였다.
파일:external/www.johndclare.net/Women11.jpg
여성 참정권 운동 중 하나인 서프러제트(Suffragette)에 대한 풍자 만평.
당시 가부장제의 많은 반대와 마주했다. 출처
다만 서프러제트 운동에 대해 정치 지형도를 바꾸는 데는 공헌했을지언정 여성 참정권 운동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스럽다는 평가도 있다.[5] 다만 영국 정부와 합의안을 협상하는 단계까지는 갔으며 운동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일부 운동가들은 시위를 중단하고 전쟁 수행에 협조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총력전 경험 이후 여성이 군수산업에서 전시근로노동을 하므로 여성도 국가방위에 기여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여성 참정권이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1 #2

현재 존재하는 독립국 중 처음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된 국가는 뉴질랜드다. 1894년에 여성들도 참정권(투표권에 한정되며 피선거권은 1919년에 획득)을 쟁취했다. 이어 호주 의회1902년 여성을 포함한 모든 호주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키면서 호주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피선거권은 핀란드(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 핀란드 대공국)가 1906년 선거법을 제정함으로써 처음 확립되었고 1907년에 19인의 여성 의원이 선출되었다.

영국은 1907년에 핀란드보다는 조금 늦게 지방 의회에서의 여성 피선거권을 보장하는 법을 제정했으며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들의 참정권을 허용하였다. 완전한 보통선거는 1928년의 선거법 개정 결과 21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며 이뤄졌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의 여성 참정권 보장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남성들이 대부분 전쟁터로 끌려가면서 여성들이 후방에서 군수 생산이나 보급, 기타 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늘어난 결과로 보기도 한다.

미국1919년에 여성 보통선거에 관한 법이 통과되어 1920년에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각 주마다 자치권이 인정되어 연방법뿐만 아니라 주법도 개정 되어야 했다. 그나마 연방 선거에서는 연방법으로 참정권의 온전한 보장이 가능했지만 연방 기관들이 개입하기 힘든 주 선거와 관련된 참정권에 대해서는 각 주의 결정이 필요했고, 이 과정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1984년에야 미시시피 주가 여성 보통선거에 관한 법을 인정하며 미국 여성 참정권 운동이 마무리되었다.

민주주의에 관하여 꽤나 진보적인 프랑스는 의외로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박한 편이었다. 사실 프랑스는 1848년 혁명을 계기로 유럽 최초로 보통 선거 제도를 확립했지만 이는 남성에만 한정된 일이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시기 때부터 여성 참정권에 대한 담론이 나오기는 했지만, 사회적으로 아직 이를 받아들일 분위기가 아니었고 되레 여성의 집회, 정치 참여 등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6] 이후 미국, 영국 등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도 19세기 말엽부터 다시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프랑스 법에 남녀가 평등한 참정권을 갖는다고 명시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도 아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인 1946년이었다.

유럽에서는 국가 단위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이 1984년에 마지막으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고, 스위스의 아펜첼이너호덴 주가 1990년에 여성참정권을 마지막으로 인정하였다.

이슬람권에서는 구 소련 지역에서 1917년부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으며 1920년 알바니아, 1930년 튀르키예가 인정하였다.

대한민국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무렵인 1919년 초창기부터 임시헌장에 남녀평등을 표방해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했으며[7]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여성 참정권을 전면적으로 보장했다.[8][9] 한국은 독립 직후 사회, 경제가 거의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여성 참정권 보장에 대한 유의미한 논의 자체를 할 시간이 없어 꽤 빨리 이루어진 편이다. 유교 문화권은 사실 여성이 정치를 '주도'하는 것을 싫어했지 여성이 가정을 돕는 관점에서 현실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오히려 권장되었기 때문에 여성 참정권에 거부감이 다소 적은 편이었다. 중국, 북한도 2차 대전 후 국가의 기틀이 갖춰지자마자 참정권이 주어졌다. 이는 유럽의 대표적 선진국인 스위스(1971)보다도 무려 23년이나 앞선 대단히 선진적인 결과다.

일본일본 제국 시절에는 여성들한테 참정권이 없었다가 2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인 1946년에 GHQ에 의해 비로소 여성의 참정권이 주어졌다.

식민지배를 당하던 많은 나라가 독립할 무렵에 민주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법률상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였다.

스위스는 1971년에야 전지역에서의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였다.

아직도 여성 참정권이 없는 나라로는 바티칸 시국이 있다.

2.6. 장애인 참정권의 역사

장애인에 대한 참정권은 나치 독일이나 북한[10] 같은 극단적인 사례나 후술하는 후진국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역사적으로 딱히 제한을 둔 경우는 없었다.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구 지적장애 1급처럼 참정권 행사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참정권 자체는 보유한다.[11] 그러나 장애인의 참정권 행사 확대는 현대 사회운동가들이 주목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장애인이 참정권, 즉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하는 것은 사회 참여를 증대하고 장애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결과, 장애인은 특히 자신들의 복리와 관련된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강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비장애인과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개발도상국에서는 장애인이 참정권을 행사하는 것을 저해할 수 있는 장벽들이 다수 존재한다.이 중 몇 가지는 대한민국에서도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2.7. 청소년 참정권의 역사

청소년 참정권은 기존에 성인으로 제한되었던 참정권을 청소년에게도 부여하는 것으로서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투표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부 국가에서 만 16세에서부터 17세 청소년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기도 하는데 오스트리아(16), 브라질(16)[13] 스코틀랜드(16:지방선거에 한정), 에콰도르(16), 니카라과(16), 쿠바(16:사실상 지방선거에 한정), 남수단(17), 수단 공화국(17)등이 있다. 한국에서 국정선거 투표권과는 별개로 교육감 선거에 한해 16세부터 투표권을 주자는 논의가 있지만 지지부진하다.

OECD 국가 중 대부분의 국가들이 18세가 된 사람에게 참정권을 준다. 그러나 사실 이들 국가에서는 18세가 성인이라 엄밀히 말하면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준 것은 아니다. 즉, 성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는 경우다. 18세가 성인이 아닌 곳은 스코틀랜드(16), 한국, 미국캐나다의 몇몇 주, 호주, 인도네시아(19), 일본(20) 등 소수이다. 출처

동학계의 아동권 보장 논의도 세계적 수준에서 주목할 만하다.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든 소파 방정환 선생이 바로 동학의 후신 천도교 소속이었다.

2019년 12월까지 대한민국은 19세 미만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동영상도 나왔다. 참정권 연령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국회에서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으며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선거권을 달라는 고3 학생의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

결국 더불어민주당, 바른미래당 당권파, 정의당, 민주평화당, 그리고 대안신당이 선거권 연령 인하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하는 선거제도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런데 당시 제1야당이던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비당권파[14]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선거 연령을 만 18세로 인하하는 본 개정안에 반대하면서 쌍방 간 정치적 갈등이 일어났다. 이후 2019년 선거법·공수처법 패스트트랙 파동2019년 국회 난입 사태, 2019년 국회 필리버스터 등의 각종 정치적 공방 속에서 2019년 12월 27일, 본회의 표결을 통해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대한민국도 만 18세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의외로 몇몇 독재국가들은 선거 가능 연령이 낮아 청소년 참정권을 형식적으로 보장해 주기도 하는데 쿠바, 이란, 북한 등이 그 예시다. 이 경우 독재의 명분을 위한 투표율 조작 목적이 있다.

3. 대한민국 헌법에서의 참정권

헌법 제24조 선거권, 25조 공무담임권

①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
②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담임권을 가진다.
헌법 제26조 청원권

①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
②국가는 청원에 대하여 심사할 의무를 진다.
헌법 제67조(대통령의 선출)

①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
헌법 제72조(대통령의 중요정책의 국민투표 부의)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국방·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
대한민국은 헌법상 민주공화국이므로 당연히 모든 국민[15]에게 참정권이 주어지며 이는 위와 같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 문서 참조.

4. 관련 문서



[1] 참정권보다는 범위가 약간 넓다. 즉, '선거권∈참정권∈공민권'이라고 볼 수 있겠다. 참고로 근로기준법에서는 참정권 행사 부분에서 '공민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한국어와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민권과 참정권', 'civil and political right'로 두 용어를 묶어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일본어 위키백과는 '민권과 참정권'을 '공민권'으로, '선거권'을 '참정권'으로 하였다.[2] 부탄이라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옆에서 네팔과 시킴이 막장화되는 것을 목도하였고 왕이 미국 물을 많이 먹은 예외적인 사례다.[3] 근로기준법 제10조(공민권 행사의 보장) 사용자는 근로자가 근로시간 중에 선거권, 그 밖의 공민권(公民權) 행사 또는 공(公)의 직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청구하면 거부하지 못한다. 다만, 그 권리 행사나 공(公)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으면 청구한 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4]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민의 4대 의무가 있고 그 중에 병역의 의무가 포함된다.[5] 상기 만평과 출처 동일.[6] 프랑스 혁명 시기 여성 참정권을 강하게 주장했던 여성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1748 ~1793)는 '여성으로서의 미덕을 망각한 죄'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는데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7] 대한민국 임시 헌장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임.',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8]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2장 국민의 권리의무 - 제8조. '모든 국민은 법률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후략)'[9] 근데 저 표현은 잘못됐다."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모든 국민에게 참정권을 보장했다"가 맞다. 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여성은 물론 남성도 참정권이 없었기 때문이다.엄밀히는 임시정부 수립 당시에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긴 했지만 그 당시는 아무래도 참정권을 행사하는 게 매우 어려운 시절이긴 해서...[10] 여기는 헌법으로 정신질환자의 참정권을 부정한다. (북한 헌법 제66조 (중략) 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여 선거할 권리를 빼앗긴자, 정신병자는 선거할 권리와 선거받을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11] 종전에는 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금치산 선고를 받았다면 선거권이 없었지만 2013년 민법에 성년후견제도가 도입될 때 그 부칙에 '법 시행일로부터 5년이 경과한 때에는 종전의 그 금치산 또는 한정치산의 선고는 효력을 잃는다'는 단서가 달리면서 피성년후견인 투표권의 단초가 생겼다. 서울시 선관위의 유권해석에 따르면 '2018년 7월 1일부터 금치산자(피성년후견인 포함)의 선거권은 공직선거법 제18조 제1항에 의해 제한되지 아니한다'고 하는데 문의를 한 공익법센터의 관계자는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입원하더라도 선거권이 박탈되지 않듯이 피성년후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거권을 자동 박탈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12] KOICA, 장애포괄적 개발협력 추진방안 연구, 101-102쪽[13] 18세에서 70세 사이는 의무투표[14] 이후 새로운보수당을 만듦.[15] '18세 이상'인데 이는 '법률(공직선거법)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제한된 것이지 헌법 자체에서 일부 국민만을 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참정권은 선거권/피선거권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