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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사상 | 정치 | 군사 | 문학 | 미술 | |
이황 | 이이 | 이순신 | 최치원 | 솔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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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종교 | 과학 | 산업 | 교육 | 사회개선 | |
최제우 | 서경덕 | 문익점 | 최충 | 유길준 | |
원효 | 정약용 | 흘간(屹干) | - | -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하지 않음.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백제국 좌보 흘우 | 屹于 | |
<colbgcolor=#00A6A9> 직위 | 우보(右補) ➝ 좌보(左補) |
출신 | 동부(東部) |
출생 | 미상 |
사망 | 48년 3월 |
이름 | 흘우(屹于) |
재임기간 (음력) | 백제 좌보 |
37년 10월 ~ 48년 3월 (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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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 온조왕, 다루왕대의 대신.2. 생애
백제의 개국공신 10인 중 한명이다. 동부(東部) 출신으로 그 관직이 백제 초기의 최고 관직인 좌보(左輔)에 이르었다.흘우는 전씨세보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이 남쪽으로 옮겨가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개국할 때 공을 세운 10명의 십제공신(十濟功臣) 중 한 명이다.[1]
30년(다루왕 3년) 10월, 마수산 서쪽에서 말갈과 싸워 이겨서 큰 전과를 올리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에 다루왕은 무척 기뻐하며 흘우에게 말 10필과 벼 5백 석을 상으로 내렸다.[2]
이후 34년(다루왕 7년) 봄 2월에 우보 해루(解婁)가 90세의 나이로 죽자 우보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3년후인 37년 10월에 우보 자리를 북부(北部)의 진회(眞會)에게 물려주고 좌보(左輔)의 자리에 올랐다.
48년(다루왕 21년) 3월에 흘우는 사망하는데 이때 다루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울면서 슬퍼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왕과 무척 사이가 가까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3. 흘간(屹干)과 흘우(屹于)?
1921년 개벽에서 2305명의 투표로 정치, 군사, 과학, 종교 등등 10 부문의 조선 10대 위인을 선정했을때, 산업 부문에서 697표의 문익점에 이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흘간(屹干)이라는 인물이 534표로 2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본항목의 흘우(屹于)의 오기일 가능성이 유력하며, 이전 최남선이 1918년 본인 발간한 청춘지 14호에서 조선의 만고도목이라는 모의 올스타 내각 선정할때, 흘우를 농상부대신으로 선정하며 농업과 상업을 숭상하고 벼농사를 개창했다고 설명하며 각색한 결과로 보인다. 당시 만고도목에서 최남선 본인 또한 천도교 신자였기에 기존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조선시대의 인물들은 최대한 배제하고 신지, 팽오, 여수기, 왕수긍 등 현재에는 많이 낮선 고조선의 전설상의 인물들과 기록이 단편적인 삼국시대 초기의 인물들을 각색하여 대부분 내각에 선정하는 경향성을 보이는데, 흘우는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실제로 다루왕 6년(서기33년)삼국사기에 영을 내려 남쪽 고을에 처음으로 논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국내 최초로 논이 개간된 기록이다. 하지만 흘우는 말갈을 격퇴했다는 공만 기록되었을 뿐 다루왕 시기 논개간과 관련되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얼마없는 삼국사기 초기의 기록에서도 말갈과의 전투에서 공적을 올리고 이후에도 재상으로서 좌보와 우보를 역임하며 국정의 실력자로 기록을 남긴 흘우에게 그 공이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진대법의 실시가 을파소와 연관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 국상이자 국정의 실력자였던 을파소의 업적으로 취급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진대법을 시행할때 국상을 역임중이던 을파소와 달리, 다만 쌀을 개간한 것은 다루왕 6년 흘우가 재상격인 우보에 오른 것은 다음해인 7년으로 1년의 시간차가 있다. 어디까지나 가정의 영역이긴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논을 개간한 다루왕 6년 당시 우보였던 해루가 다음해 90세의 나이로 고령으로 사망해 이를 흘우가 승계했고 3년 뒤에는 최고위직인 좌보까지 올랐기에 사실상 이전부터 흘우가 실권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동부 또는 북부 출신의 인사가 번갈아 임명되던 백제의 우보는 주로 지역 통치와 함께 외적과의 전쟁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추정되며#, 수도 방위와 병마를 관장하던 한나라와 고구려의 좌우보와 유사하게도 추정되며, 이에 입각하면 우보 흘우는 동부의 세력가이거나 군사적 실력자일 수는 있어도, 내정을 관할하는 재상직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없다고 보여진다.
4. 여담
- 흘우의 사망 이후 백제본기에는 213년(초고왕 48) 이전까지 새로운 백제인명이 단 한 건도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