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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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6년 7월 9일[1] |
한성부 동부 연화방 연지동계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2] | |
사망 | 1949년 6월 21일[3]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4가 자택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19호 |
본관 | 신 안동 김씨[4] |
국적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조선 → 대한민국 |
별칭 | 호(號)는 송암(松巖), 송석 도호(道號)는 법암(法菴) |
종교 | 천도교 |
서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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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2.1. 초년기
1876년 7월 9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연지동계(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병유(金炳游, 1856 ~ ?)와 어머니 연일 정씨(1855 ~ 1918. 9. 13) 영장(營將) 정극현(鄭克鉉)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상헌의 10대손으로, 조부 김우근(金友根, 1808. 6. 6 ~ 1886. 7. 3)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정3품)에 올랐다.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그가 1876년 7월 9일에 태어났다고 기술되었고, 다른 기록에는 그가 1878년 8월 7일 생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또한 안동김씨 족보에는 1877년 7월 7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훗날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된 그를 심문한 조서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양반 신분이었다. 그가 여수 통신주사(通信主事), 한성부 주사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있고, 1897년 12월 13일 한성전보사(漢城電報司) 주사에 임용되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분명하지 않다.#
2.2. 천도교 신자
1908년 '대한협회 회보' 제4호에서 대한협회 회원으로 기재되었다.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 10일 서울에서 조직되어 한일병합 때까지 활동한 정치단체로, 조선 민중들의 계몽 운동을 지도한 민족단체였다. 이후 1910년 9월 한일병합이 발표되었을 무렵, 그는 천도교에 가담했다. 그가 어떤 경위로 천도교에 입문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교주 손병희와 절친했다는 얘기가 있는 걸 볼 때 손병희의 추천으로 입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천도교의 기관지 '천도교회월보' 창간호에는 발행인으로 김완규라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천도교회월보 주간 이교홍은 한일병합이 공표되었을 때 일제의 조선침략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각국 영사관에 비밀리에 발송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이교홍을 비롯해 오상준, 이종린, 김건식, 그리고 김완규 등 천교도 간부들이 투옥되었다. 김완규는 체포된 지 며칠 만에 석방된 뒤 봉도(奉道), 법암장(法奄長) 등을 역임했다.
2.3. 3.1 운동
1919년 2월 20일, 천도교의 권동진, 최린, 오세창은 기독교의 이승훈, 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제작과 배포, 민족대표의 선정 등에 대해 협의해 대체적인 사항을 마무리했다. 당시 김완규는 고종의 국장 참배를 위해 2월 25일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다가 권동진 등으로부터 3.1운동 거사계획을 듣고 찬동했다. 이튿날인 2월 26일, 그는 김상규의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해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한 후 민족대표로서 서명했다.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점검 모임이 모였다. 김완규 역시 이날 모임에 참석하였으나 실내에는 들어가지 않아 회의 내용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거사장소가 당초의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바뀐 사실은 이튿날 아침 오세창으로부터 듣고서 알게 되었다. 그 후 3월 1일 오후 2시, 예정대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렀다. 곧이어 일본 경찰이 들이닥쳤고, 민족대표 33명은 김병조를 제외한 전원이 체포되어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김완규는 취조 및 재판 과정에서 한일병탄에 반대한 이유, 조선 독립의 의지 등에 대해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그는 1919년 3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사로부터 "피고는 조선독립이 될 줄로 아는가?"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되고 안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될 수 있는 데까지는 하여 볼 생각이다.
형사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도 또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김완규가 답했다.
그렇다. 나는 한일병합에는 반대하므로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할 것이다.
그리고 4월 17일 경성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검사로부터 앞으로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기회가 있으면 (독립) 운동을 할 것이고, 또 나는 일본 국민이 되지 않을 것을 명심하고 있다.
이에 검사가 힐난했다.
조선이 금일과 같이 평화로운 것은 일본 치하에 있기 때문인데, 조선이 일치하여 이탈된다면 동양은 매일 전란(戰亂)의 구렁텅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가. 독립국이란 허명(虛名)을 가지고 인민의 행복을 얻지 못할 것을 생각지 않는가.
김완규는 냉소적으로 답했다.
그런 것까지는 생각지 않는다.
또한 8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김완규는 "선언서를 다수 인쇄해 그것을 조선 안 각지에 배포하고 청원서를 일본 정부나 귀족원, 중의원, 양원, 총독부 및 강화회의, 그리고 미국 대통령 등에 보내면 독립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렇게 하면 곧 독립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언서는 민족자결주의에 의하여 우리들이 독립을 발표했다. 따라서 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를 발표하라는 의미이다. 일본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한 것은 독립을 바라고 있으니 허락해 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각국 대표자에게 보낸 것은 이와 같이 조선민족이 독립을 바라서 의사를 발표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조선은 아직 독립은 되어있지 않지만 자기 마음속에는 이것으로 이미 독립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1920년 10월 30일, 김완규는 최종심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2.4. 이후
1921년 11월 4일 출옥한 그는 이후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조용히 지냈다. 1925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완규는 동두내(東豆川)에서 농사를 짓다가 충청남도 서산(瑞山)으로 이사해 개간사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11일 민족의 번영과 지도자 계발을 목표로 삼은 민생협회(民生協會)의 회장을 맡았고, 1946년 2월에 3.1 운동 기념행사를 앞두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명예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그해 4월 5일 종로 YMCA 건물에서 열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성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해 지부장에 선출되었고, 석달 뒤에는 오세창, 권동진,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고문으로 선출되었다.소련과 김일성의 총선거 거부로 1948년 초, 유엔은 효력이 있는 남쪽 지역에서의 선거를 통한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미국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에 김구가 이끄는 한국 독립당은 남북협상을 통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다. 그해 3월 12일, 민족진영은 7거두 명의의 단독선거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성환, 조소앙, 홍명희, 조완구였다. 성명서 성명서 초안은 홍명희가 잡고 조소앙이 손질을 했으며, 개별 서명을 받는 일은 김의한이 맡았다. 김의한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초 원안은 9거두였으나 이시영과 김완규는 단독선거 반대 운동의 취지엔 동의했지만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고 한다.
1949년 6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4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장례식은 6월 25일 오후 1시 경운동 천도교당 대광장에서 애국단체 연합장으로 치러졌다. 장례식장에는 오세창을 비롯해 신익희 등 다수의 조문객이 참석했으며 오화영 목사가 추도사를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김완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본래 화장되었으나, 1966년 5월 18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