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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46년 9월 4일 ~ 1347년 8월 3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칼레를 포위 공격한 공방전.2. 상세
1346년 8월 26일, 에드워드 3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하고 사망자들을 매장한 뒤, 보급품과 지원군을 확보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했다. 그는 당초 노르망디의 항구도시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장군들과 논의한 끝에 칼레를 잉글랜드 해군의 집결지이자 잉글랜드 본토에서 프랑스로 건너갈 육군을 수송할 기지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칼레는 노르망디보다 브리튼 섬과 가까웠고 백년전쟁 발발 이래 에드워드 3세를 지속적으로 돕는 플란데런 백국과 가까웠기에 이 역할에 적합했다.9월 4일 칼레에 도착한 에드워드는 칼레를 단시일에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챘다. 칼레는 넓은 습지대에 있었고 대부분 물에 잠겼기 때문에 육지에서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또한 성벽은 높고 탄탄했으며, 성벽 주위에 바다와 연결된 해자가 이중으로 흘렀고, 수비대가 수문을 열어서 주변 일대를 수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급품은 바다를 통해 항구에 하역할 수 있기에 육지에서 봉쇄해도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따라서 이 곳을 공략하려면 육상에서 봉쇄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함대로 해상 봉쇄를 수행해야 했다. 에드워드는 빌뇌브라아르디(Villeneuve-la-Hardie)라는 이름의 숙영지를 건설하고 장기 포위에 필요한 물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는 본국 의회에 크레시에서의 대승 소식을 전달하며 칼레 포위에 병력과 물자를 보태달라고 요구했다. 서유럽 제일의 강대국인 프랑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에 잉글랜드 의원들과 국민들은 열광했고, 기꺼이 왕의 요청에 응했다. 선원 15000명을 포함해 상선 700척이 징발되었고 병사 3만 명이 칼레 포위군 주둔지에 배치되었다. 동맹인 플랑드르 시민 정부의 민병대 모집도 활기를 얻어서 최소 2만 명 이상이 소집되었다. 에드워드는 칼레가 함락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겠다고 맹세하고, 매일 도시 주변을 정찰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사절을 맡은 두 추기경이 그를 찾아와 프랑스 왕과 화해할 것을 권고하려 했지만, 에드워드는 아비뇽 유수에 놓인 교황은 프랑스의 앞잡이니 그가 보낸 추기경들을 만나줄 필요가 없다며 무시했다.
한편, 필리프 6세는 크레시 전투에서 완패한 뒤 파리로 귀환한 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대부분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는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으로 가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거나 잉글랜드로 돌아갈 거라 여겼다. 그러다 칼레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9월 9일 콩피에뉴에서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야전군을 소집했지만 10월까지 모인 병력은 맨앳암즈 3,000명과 보병 5,000명에 불과했다. 이걸로는 도시를 에워싼 수만에 달하는 잉글랜드-플란데런 연합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구나 남부 프랑스 일대에서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던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가 앙주, 푸아투를 거쳐 북쪽으로 160마일 이동해 푸아티에를 공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러다가 헨리의 군대가 파리까지 쳐들어올 가능성을 우려한 프랑스 수뇌부는 헨리를 격퇴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나마도 콩피에뉴에 모인 소규모 병력에게 지급할 자금마저 없었기에, 필리프 6세는 10월 27일 모든 공격 준비를 취소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렇듯 일이 자꾸만 틀어지자 프랑스 정부 인사들간의 비난이 만연했다. 프랑스 원수 샤를 1세 드 몽모랑시는 왕에게 잘못된 조언을 해 크레시의 파국을 야기한 혐의로 해임되었고, 프랑스 재무부의 모든 관료들은 군대에게 지급할 급료를 제때 마련하지 않고 국고를 횡령한 혐의로 해임되었으며, 모든 재정 문제는 3명의 고위 수도원장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담당했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왕위 후계자인 장은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져 몇 달 동안 왕실 회의에 출석하기를 거부했고, 삼부회는 왕의 측근들을 매섭게 비난했다. 나바라 왕국의 여왕이자 샹파뉴 백국 상속권자 호아나 2세는 필리프 6세의 군대가 자신의 영지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한 끝에 1346년 11월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이렇듯 프랑스 수뇌부가 자중지란에 시달리면서, 가까운 시일에 칼레를 구원할 프랑스군이 올 가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도시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의 상태 역시 좋지 많았다. 많은 군인의 복무 기간이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이질이 군영 내에 돌면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탈영자도 속출했다. 1346년 말과 1347년 초 사이의 어떤 기간에는 가용 가능한 잉글랜드군의 수가 5,000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에드워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투석기와 대포를 동원해 성벽을 뚫으려 시도했고, 육지나 바다 쪽에서 칼레를 공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칼레 총독 장 드 비엔이 이끄는 수비대는 결사적으로 항전해 잉글랜드의 모든 공세를 격퇴했다. 여기에 프랑스 함대가 그들에게 물자를 지원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347년 3월과 4월 동안 1,000톤 이상의 보급품이 잉글랜드 해군의 봉쇄를 뚫고 칼레로 들어왔다.
필리프 6세는 칼레가 잘 버티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적을 격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1347년 4월 말에 군대 소집령을 재차 발동했다. 그러나 그가 콩피에뉴에 이르렀을 때 도착한 군인이 거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후에도 병력 소집에 응한 이가 매우 적어서 6월이 다가도록 충분한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 많은 도시가 잉글랜드군의 슈보시에 맞서기 위해 성벽을 보강하거나 민병대를 결성하고자 모든 가용 자금을 사용했고, 대부분의 귀족은 지난 9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지불한 빚이 너무 많이 쌓여서 파산의 위협에 시달렸다. 심지어 몇몇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를 프랑스 왕으로 섬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이렇듯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병력 규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칼레의 입지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1347년 4월, 잉글랜드군은 칼레의 바다쪽 항구 입구에 있는 리스방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요새를 건설하고 포병을 배치해, 칼레에 프랑스 수송선들이 진입하는 것을 차단했다. 여기에 80척 가량의 잉글랜드 전함이 도착해 항구 입구를 차단했다. 이제 칼레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칼레 주변 프랑스 민병대가 도시를 구하려 했으나 격퇴되었고,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을 도우러 오는 것을 막고자 플란데런을 공격한 프랑스군 마저 격퇴되었다.
1347년 6월 말, 필리프 6세는 일단 모인 병력이라도 이끌고 칼레로 접근하여 칼레 남쪽으로 50마일 떨어진 헤스딩 마을에 이르렀다. 그런데 얼마 후 브르타뉴의 라 로슈데리앙 전투에서 필리프 6세의 조카이자 브르타뉴 방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샤를 드 블루아가 잉글랜드군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필리프 6세는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브르타뉴 전선으로 파견하고 브르타뉴 방면 전선군 수뇌부를 재구축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렇듯 구원군이 지체되는 상황에서, 칼레에 있던 식량이 바닥났다. 주민들은 개, 고양이, 말을 잡아먹었고, 심지어 안장의 가죽을 갉아먹어야 했다. 또한 식수 공급이 매우 부족해 갈증에 시달려야 했고, 전염병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347년 6월 25일, 약 40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가 보급품을 가지고 센 강 어귀를 지나 칼레로 항해하다가 더 많은 잉글랜드 함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선박이 나포되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같은 날 칼레 총독 장 드 비엔은 필리프 6세에게 서신을 보내 칼레에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를 위해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 서신을 지닌 제노바 장교가 도시 밖으로 나갔지만 도중에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혔다. 에드워드 3세는 서신을 읽어본 뒤 필리프 6세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했다. 그 이유는 알려진 바 없지만, 필리프 6세가 칼레를 구원하기 위해 무리하게 달려오도록 유도한 후 무찌르려는 생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구호 함대를 칼레로 진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프랑스 수비대는 노인, 허약자, 부상자, 여인과 어린이들을 도시에서 추방해 입을 줄이려 했지만, 포위군이 이 난민들이 포위망을 통과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을 때까지 성벽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이윽고 잉글랜드에서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5,300명의 중장병, 6,600명의 보병, 20,000명의 궁수로 구성된 대군을 갖추었다. 여기에 함대에는 15,000명의 선원이 있었고, 인근 국경에는 20,000명의 플란데런군이 잉글랜드군을 지원하기 위해 주둔했다.
1347년 7월 14일, 20,000명 가량의 병력[1]이 헤스뎅에 집결했다. 필리프 6세는 이들을 이끌고 칼레 구원을 시도해보려 했지만, 프랑스 영토를 통해 남쪽에서 포위군 주둔지를 공격한다면 플란데런군이 비어있는 후방을 노릴 위험이 있었으므로, 플란데런 영토를 기습해서 베뒨과 카셀을 점령하고 칼레 포위군 진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지역에 대한 기습공격이 모두 실패로 끝나면서 포위군 진영을 직접 공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졌다. 결국 7월 27일 칼레 인근 상가테 고지에 도착한 필리프는 포위군 진영 외곽의 감시초소 하나를 점령한 뒤 정찰병들을 보내 적진을 정탐했다. 함 강과 해안 지역의 장애물로 인해, 잉글랜드군을 공격할 수 있는 경로는 강력한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는 나울레 다리를 건너는 것뿐이었다.
크레시 전투 때보다 훨씬 안 좋은 조건에서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필리프 6세는 무력으로 도시를 구할 방도는 없다고 여기고 에드워드 3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아키텐 공국 전체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다만 프랑스 왕실이 아키텐 공국의 명목상 주군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에드워드는 칼레를 얌전히 내놓는 것이 협상에 응할 최소한의 조건이며, 그러지 않는다면 협상에 임할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필리프는 마지막 시도로 2명의 교황 사절에게 잉글랜드 진영에 찾아가 중재를 제의하게 했으나, 에드워드는 이번에도 그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1347년 8월 1일, 칼레 수비대는 상가테 고지에 있는 프랑스군에게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 항복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프랑스군은 그날 밤 숙영지를 불태우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칼레 수비대장 장 드 비엔은 성문 밖에서 월터 매니가 이끄는 잉글랜드 기사단을 만나 수비대와 도시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에드워드는 매니로부터 수비대의 뜻을 전해듣자 차갑게 답했다.
"저놈들 때문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고 너무 많은 잉글랜드인이 목숨을 잃었다. 저들이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항복하지 않는다면 받아줄 수 없다."
그러나 잉글랜드 기사들은 왕의 이같은 뜻을 전달하길 꺼렸다. 그들이 숭상하는 기사도에 어긋나기도 했고, 만약 프랑스 왕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한다면 칼레 수비대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대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와 동료 기사들은 에드워드에게 뜻을 돌려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고, 에드워드는 군심이 이반할 것을 우려해 "칼레 수비대와 주민들의 자유는 보장해주지 않겠지만 너희들의 생명을 구하겠다"며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도시에 전령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너희 중 여섯 대표를 뽑아라. 그들은 셔츠만 입고 목에 올가미를 감고 도시의 열쇠를 들고 내 앞에 와야 한다. 나는 그들을 내키는 대로 처리할 것이다."
1347년 8월 3일, 에드워드 왕이 에노의 필리파 왕비, 휘하 장군, 기사, 고문, 영주, 플란데런 인사들과 함께 칼레 성문 앞에 집결한 가운데, 여섯 명의 칼레 시민이 마을의 열쇠를 들고 성문에서 나왔다. 그들은 에드워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했다. 에드워드는 자신에게 저항하려는 다른 도시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사형집행인을 불러 즉시 여섯 시민을 참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필리파 왕비와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했고, 에드워드는 한동안 자신 앞에 엎드린 여섯 시민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풀어주라고 지시했다.
단 이 항복 의식 자체가 에드워드 왕이 의도한 퍼포먼스였고 후대에 각색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후대엔 이 시민 대표들이 마치 스스로 희생해서 도시를 구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알려졌는데, 실제로는 이미 대략적인 항복 내용은 칼레 측과 에드워드 왕 양측에서 논의가 끝났고, 에드워드 왕은 단순히 자신의 관용을 극적으로 과시하며 항복을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하지만 이 항복 이야기는 후대에 널리 퍼졌으며 오귀스트 로댕은 이 6명의 시민 대표의 모습을 묘사한 조각을 제작하기도 했다.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진입한 뒤 칼레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전체가 추방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모조리 몰수되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에서 주민들을 불러들여서 칼레에 정착하게 했다. 장 드 비엔을 비롯한 고위급 장교 및 상인들은 잉글랜드로 끌려가 몸값을 마련할 때까지 억류되었다. 칼레에서 추방된 주민들은 인근의 프랑스 마을에 기거했다. 필리프 6세는 그들의 운명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들이 선택한 프랑스 어느 도시에든 정착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으며, 공석이 된 국가 관직에 칼레 출신 인사가 앉히는 것을 허용했다. 여기에 그들을 단기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기금을 마련했다.
에드워드는 칼레 공방전을 마무리한 뒤 플란데런군을 돌려보낸 후 파리를 향한 공세에 착수했다. 그러나 생 오마르 요새를 공략했다가 큰 손실을 보고 칼레로 향하던 보급 호송대가 볼로뉴에서 파견된 유격대에게 포획되는 악재가 터진 데다 자금 조달에 또다시 문제를 겪자, 그는 비로소 교황 사절단의 요청에 응해 평화 협상에 임하기로 했다. 9월 4일부터 협상이 시작되었고 9월 28일에 휴전이 합의되었다. 이른바 '칼레 휴전'으로 명명된 이 휴전은 1348년 7월 7일까지 9개월간 지속되기로 합의되었지만, 중세 흑사병 도래 등 여러 악재로 인해 1355년 공식적으로 취소될 때까지 수년간 반복적으로 연장되었다. 이후 칼레는 백년 전쟁 내내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잉글랜드군의 주요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 이중 11,000명은 기마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