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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3:01:33

오귀스트 로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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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1e1e19><colcolor=#bab5b4> 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파일:Auguste Rodin.jpg
본명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
François Auguste René Rodin
출생 1840년 11월 12일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917년 11월 17일 (향년 77세)
프랑스 뫼동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조각가, 화가
종교 가톨릭
수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서명
파일:Signatur_Auguste_Rodin.jpg

1. 개요2. 위상3. 생애4. 기타5. 대표작

[clearfix]

1. 개요

프랑스조각가, 화가.

2. 위상

근대 조각의 아버지이며,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조각에 자율성을 부여했다.

3. 생애

하급 관리의 아들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사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늘 "나는 바보 같은 아들을 두었어"라고 한탄하며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었던 로댕을 부끄러워했었다고 한다. 자라서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그 즈음에 자신의 공예학교 진학을 지원했던 친누나가 죽어서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한동안 사제가 되겠다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다만, 예술적인 천분이 도저히 신부의 길을 가는 것에는 맞지 않음을 알아 본 수도원장이, 스스로 가끔 로댕의 조각과 스케치의 모델이 되어줄 만큼 그를 무척 신경써주었다. 결국 수도원장의 설득으로 세속에서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환속했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났는데, 로즈는 1866년 아들 오귀스트외젠 뵈레(Auguste-Eugène Beuret, 1866~1934)를 낳았으나[1], 정식으로 결혼식은 하지 않다가 로댕이 죽기 전인 1917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친한 사람들을 불러 결혼식도 올렸는데, 로즈는 평생의 염원을 이뤘기 때문인지 결혼 2주 만에 로댕보다도 몇 달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상속권 문제가 있어서 결혼을 서둘러야 했는데다[2], 오랫동안 사실혼 관계로 살면서 평생을 자신에게 헌신한 아내 로즈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어차피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아직 로댕이 조각가로 성공하기 전이었기에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래서 식을 치를 여력이 없었는데, 이후에 그가 큰 성공을 거두어서 재산 상속 문제가 거론될 만큼의 부를 얻자, 부부가 평생의 소원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 때문에, 로즈가 결혼식 이후 고작 2주 만에 사망하자, 로댕은 큰 상실감에 빠졌다.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열었던 그해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찌그러진 사나이>는 그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이후 1875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크게 영향을 받은 후 1878년 프랑스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에서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하였다. 이 청동시대는 또한 실제 사람에 찰흙을 붙여 모델링을 했다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완벽했다.[3]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특별 개인전을 가져 국제적 명성을 얻은 로댕은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4] 등으로부터 찬사를 들었으며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관계로 대중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카미유의 작품은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돌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오히려 로댕이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둘은 같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고 카미유가 로댕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작품을 바치기도 했으니 서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게 정설이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댕이 가지는 미술사적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의도적인 왜곡을 한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칼레의 시민>을 보면 손이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더 크게 묘사가 되어있는데 이로써 더욱 효과적인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이는 회화에서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사실묘사에서 벗어난 것과 필적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사실주의 작가가 아님에도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조각 자체에 감정이입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는 잘 취하지 않는 동작[5] 등을 통해서 역동성을 부여하며,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인체비례와 사실주의적 조각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여질 만큼 정밀하다기 보다는 몇 번 덜 깎은 것 같은 조각기법은 감정과 생기를 불어 넣는다. 예로서,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이 자세에서 오는 '고뇌'와 조각기법에서 오는 아우라 또는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보다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 지옥의 문의 한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것인데 너무나도 유명해진 나머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것처럼 원래의 군체(群體) 작품보다도 더 유명해져 버렸다.

<칼레의 시민>의 경우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해서 당대엔 큰 논란이 되었다. '칼레의 시민'이란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에 항복할 때 칼레 주민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칼레의 시민 대표 6명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로댕은 이 시민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당연히 공개된 직후에는 영웅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기대했던 대중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로댕의 의도는 이 6명의 시민 역시 특별한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임을 묘사함으로서, 오히려 평범한 인간이면서도 희생을 감수한 용기를 더욱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로댕의 의도도 받아들여지고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칼레 문서의 '칼레의 시민들' 항목을 참조.

1917년, 온갖 병과 같이 치매까지 걸려서 77살 생일을 며칠 지내고 병원에서 발작하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유언"난 신이다!" 였다고 한다. 이에 돌보던 간호사가 귀찮다는 듯이 "맞아, 당신은 신인데 똥오줌 누고 헛소리하며 죽어가는 신이야."라고 톡쏘는 말로 답했다고 한다.

4. 기타

5. 대표작

파일:800px-Rodin_The_bronze_age-2.jpg
《청동시대 (L'Âge d'airain)》 (1878)
파일:external/roundtheworldin60days.files.wordpress.com/p9130387-e1317250006289.jpg
지옥의 문 (La Porte de l'Enfer)》 (188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Thinker,_Auguste_Rodin.jpg
《생각하는 사람 (Le Penseur)》 (1880)
파일:1280px-Statue_bourgeois_calais_rodin.jpg
칼레의 시민 (Les Bourgeois de Calais)》 (1884- 1889)
파일:발자크 기념상.jpg
《발자크 기념상 (Monument to Balzac)》 (1892 - 1897)


[1] 정신박약아였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호적에도 넣지 않고 로즈 성을 따르게 된 사생아로 만들어서 로댕 부모조차도 이해를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즈는 로댕 부모와도 잘 지냈다고 한다.[2] 하지만 로즈 뵈레의 죽음으로 인해, 상속권은 프랑스 정부에 귀속되었다.[3]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때 많은 곳에서는 엄청난 극찬을 받았으나 어느 모 예술 평론가가 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석고뜨기를 했다는 음모론을 펼치며 작품 평가가 깎아 내려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벨기에에서는 그가 석고뜨기 전문가로 이름이 난 탓에 평가가 절하되기도 했다. 로댕은 필사적으로 이 작품을 박물관에 계속 두고 싶었으나 여론 악화로 인해 내려지고 만다. 그 뒤부터 로댕은 언론사를 극도로 두려워했다고.[4] 릴케 같은 경우 로댕의 조수였는데 너무 나대는 탓에 주위에서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로댕은 릴케와 싸운 후에 절교했으나 나중에 화해한다.[5] 실제로 <생각하는 사람>의 턱을 괴는 오른팔 팔뚝이 살짝 벌려진 왼쪽 대퇴부에 교차해서 올라가 있는데 실제 자세를 취하면 몸을 의도적으로 비틀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하기 어렵게 만드는 자세'가 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6] 로댕의 조각상의 모조품이 한국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품이다. 애초에 청동을 깎은 것이 아니라, 원형은 석고로 제작되어 청동을 녹여 부어 만드는 것이다. 마치 판화와 비슷하다 볼 수 있겠다. 때문에, 청동상을 보면, 몇번째 에디션이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어있기도 하다.[7] 이 작품은 로댕의 다른 작품인 《지옥의 문》 건너편에 배치되었으며, 《지옥의 문》은 단테신곡에 나오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조각한 작품이다. 즉,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 문 앞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며 이 사람들을 도와줄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