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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방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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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방 전투
영어: Battle of Cravant
프랑스어: Bataille de Cravant
파일:크하벙 전투.jpg
시기 1423년 7월 31일
장소 프랑스 왕국 크라방
원인 헨리 6세의 등극을 틈탄 도팽 샤를의 반격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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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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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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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윌러비 드 에레스비 남작 로버트 윌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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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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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병력 잉글랜드군 4,000명
부르고뉴군 1,000명
프랑스군 4,000명
스코틀랜드군 4,000명
피해 미미함. 프랑스군 1,200명 사상, 스코틀랜드군 궤멸
결과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승리.
영향 앙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대공세
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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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3년 7월 31일,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이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투.

2. 상세

1422년 8월 31일, 7년간 프랑스를 침략해 수많은 영토를 공략하고 정신병에 걸린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를 공인받았던 헨리 5세모 공방전 도중에 걸린 이질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형제인 베드퍼드 공작 존을 프랑스의 섭정으로 지명하고, 샤를 7세의 딸인 발루아의 카트린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정했다. 그 후 샤를 6세가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하면서,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프랑스 서부 도시 부르주를 중심지로 삼고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던 샤를 도팽은 지금이야말로 대대적으로 반격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력이 닿는 지역에 전령을 잇따라 보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으려 하니 프랑스를 구하는 데 앞장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남부 전역의 장정들이 부르주로 몰려들었고, 아라곤, 롬바르디아에서도 용병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이 용병들은 이미 프랑스에 와서 보제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스코틀랜드군과 통합되었다.

1423년 여름, 보제 전투를 이끈 스코틀랜드 장군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방돔 백작 루이가 이끄는 8,000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부르주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오셰르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욘 강에 있는 크라방을 먼저 공략한 뒤 강을 따라 북상하여 부르고뉴로 진격하기로 했다. 베드포드 공작은 이 소식을 접하자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 크라방을 구원하게 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아르투아의 본은 1,000명의 부르고뉴군을 파견해 잉글랜드군과 합류하게 했다.

1423년 7월 29일 오세르에 집결한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은 오세르 대성당에서 전쟁 회의를 개최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고, 부르고뉴 장군들은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7월 30일 오세르에서 출발한 연합군은 욘 강의 동쪽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했다. 한편, 크라방에서 4마일 떨어진 지점에 이른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은 욘 강변에 숙영지를 세웠다. 솔즈베리 백작은 적을 발견한 뒤 그들이 설치한 숙영지를 공격하기엔 지형이 너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몇 마일을 되돌아가서 욘 강을 건너기로 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은 몇 마일을 되돌아가 빈셸스에 있는 욘강 서쪽 제방을 건넌 뒤 크라방 마을 맞은편에 이를 때까지 서쪽 강둑을 따라 행진을 이어갔다. 이윽고 마을 맞은 편에 도착한 연합군은 적군이 자신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크라방으로 다시 이동해 욘 강과 마을 성벽 사이의 제방을 장악하고 욘 강을 건너는 것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솔즈베리 백작은 최전선에 잉글랜드군 2개 사단을 배치하고 부르고뉴군을 그 뒤에 배치한 뒤 강을 도하할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전투 대형을 형성한 지 3시간 후, 솔즈베리 백작은 "성 조지! 배너(Banners)여, 전진하라!"라고 외치며 도하 명령을 내렸다. 이에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강으로 돌진했고,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강 건너편에 있는 프랑스군을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부르고뉴군이 뒤를 따라갔고,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윽고 욘 강변에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우익 사단은 성문으로 이어지는 욘 강 다리를 공략하기 위해 그곳을 지키고 있던 스코틀랜드군을 몰아붙여 조금씩 전진했다.

전투가 한창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때, 크라방에 주둔하고 있던 부르고뉴 수비대는 적군이 다리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출격해 프랑스군과 스코틀랜드군 후방을 요격했다. 그러자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은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롬바르드인과 아라곤인이 먼저 대열을 무너뜨리고 달아났고, 프랑스인들이 뒤따라 도주했다. 반면 다수의 스코틀랜드인들은 도주를 거부하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섬멸되었다. 특히 다리에 갇힌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몰살당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군은 크라방 전투에서 1,200명을 상실했으며, 스코틀랜드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스코틀랜드 사령관 존 스튜어트, 프랑스 사령관 방돔 백작 루이를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때 스튜어트는 한쪽 눈을 잃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군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미미했을 것이다. 샤를 도팽은 생포된 장군들을 데려오기 위해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그 후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은 서로 갈라져서 샤를 도팽을 따르는 도시들을 향한 공세에 착수했고, 얼마 안가 피카르디와 프랑스 남부 간의 연락망이 단절되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