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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42년 11월 2일 ~ 1443년 8월 14일, 잉글랜드군과 프랑스군간의 디에프를 둘러싼 공방전.2. 상세
노르망디의 조그마한 마을이었던 디에프는 노르망디 공작을 겸임하던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에 의해 어엿한 항구도시로 자리잡았지만 1195년 노르망디를 공략하던 필리프 2세에 의해 프랑스 왕국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백년전쟁 초기엔 잉글랜드 해안지대를 습격하여 해적행위를 일삼은 프랑스 함대의 기항지로서 많은 수익을 챙겼다. 잉글랜드 측은 당연히 이곳을 눈엣가시로 여겨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디에프 시 당국은 잉글랜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 모두에 강력한 성벽과 성채를 세웠다.그러나 1415년 헨리 5세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뒤 1417년 본격적으로 노르망디 전역을 공략하자, 디에프의 상황은 매우 위태로워졌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간의 내전으로 인해 이들을 도울 여력이 없었기에, 디에프 시민들은 1420년 2월 헨리 5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항복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던 디에프는 1435년 10월 28일 프랑스 하급 기사 샤를 데스마레가 이끄는 프랑스 분견대가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잉글랜드 수비대를 몰아내고 성채를 접수하면서 프랑스 왕국에 돌아왔다.
디에프는 영국해협간 해상 무역과 경비에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잉글랜드군은 디에프 탈환을 여러 차례 게획했지만 어린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직을 놓고 전개된 심각한 정쟁으로 인해 9년이나 미뤄졌다. 그러던 1442년, 존 탈보트는 지난해 프랑스군에게 항복한 에브뢰를 기습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방향을 돌려 디에프로 향했다. 그는 여러 성채에서 끌어모은 병력과 잉글랜드에서 파견된 베테랑 무장병들을 규합해 총 800명 가량의 군대를 이끌고 11월 2일 디에프를 포위했다. 이후 디에프의 지형을 살펴보다가 디에프의 교외 지역인 폴레트 언덕에 목조 요새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곳은 동쪽에서 디에프 시를 내려다볼 수 있고 썰물 때 디에프와 연결되기 때문에, 디에프 수비대와 시민들을 압박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탈보트는 플레트 언덕에 포대를 설치한 뒤 도시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특히 도시의 민간 건물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해, 시민들이 공포에 굴복해 수비대를 압박하여 항복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한달이 지나도록 포격을 퍼부었는데도 샤를 데스마레와 수비대는 굴복하지 않았고, 샤를 7세가 수비대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파견한 장 드 뒤누아의 프랑스군 300명이 11월 29일 디에프에 입성했다. 탈보트는 탄약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잉글랜드로 돌아가서 추가 병력과 탄약을 구하기로 하고, 윌리엄 페이토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잉글랜드군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권력 분쟁에 집착하는 권력자들은 탈보트의 간절한 설득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지원군은 끝내 파견되지 않았다.
잉글랜드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도시를 계속 포격했고, 썰물 때마다 디에프로 쳐들어가서 적 수비대와 교전했으나 격퇴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수비대 역시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기에, 공방전은 8월까지 이어졌다. 1442년 7월 24일, 도팽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 구원군 1,600명이 퐁트누아에서 출발해 디에프로 진군했다. 8월 10일 디에프 근교에 도착한 루이는 윌리엄 페이토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페이토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방어하겠다"라고 답했다. 루이는 500~600명의 군인을 적 성채 앞 숙영지로 보내 봉쇄하게 했고, 성벽에 내걸 다리와 바퀴가 달린 공성탑 5~6개를 건설했다.
8월 14일 오전 8시, 프랑스군은 나팔 소리에 맞춰 잉글랜드 요새를 공격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은 압도적인 숫자로 몰아붙이는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프랑스군 100명이 전사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프랑스군 장병들은 이를 악물고 공세를 이어갔고, 도시 수비대와 시민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서 성채를 향해 석궁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성채는 함락되었고, 300명이 전사하고 페이토를 비롯한 나머지는 체포되었다. 루이는 잉글랜드 포로 중 "프랑스어를 하는" 자들을 프랑스인인데 잉글랜드를 위해 싸운 반역자로 간주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잉글랜드군이 세웠던 요새는 루이의 명령으로 철거되었고, 대포는 디에프 무기고로 옮겨졌다. 페이토는 사로잡힌 뒤 3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445년 3,000에쿠스의 몸값을 지불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프랑스 전선에서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유일한 잉글랜드군 장성이었던 탈보트의 디에프 공략 실패는 잉글랜드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안겼다. 여기에 프랑스군이 가스코뉴 전역을 단행해 상당수 영토를 상실하자, 잉글랜드 당국은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샤를 7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샤를 7세 역시 거듭된 전쟁으로 많은 손실을 입은 군대를 재편성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1444년 5월 28일, 양국은 샤를 7세의 조카인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6세의 결혼, 노르망디 바로 남쪽에 있는 프랑스 북부의 메인 일대를 프랑스에 넘기는 내용의 투르 협약을 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