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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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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383년 6월 8일 ~ 8월 8일, 십자군을 자처한 헨리 르 디스펜서의 잉글랜드군이 프랑스에 충성하는 플란데런의 이프르 시를 포위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한 공방전.

2. 상세

1379년 8월 헨트 직조공들이 자신들의 라이벌인 브뤼헤를 편애하고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북부 플란데런의 나머지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자, 루이 2세는 토벌군을 규합한 뒤 반란군과 맞붙었다. 1382년 5월 3일, 헨트 지도자 필리페 반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반란군이 베버하우트 평원 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많은 토벌군을 격파하고 브뤼헤에 입성했다. 루이 2세는 강에 몸을 던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고 릴로 도주했다.

이후 플란데런 전역이 반란에 가담했고, 오직 덴데르몬드와 오우데나르데 만이 루이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프랑스 북부 백성들 역시 플란데런 반란에 고무되어 봉기를 일으켰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루이 2세는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필리프 2세는 이 기회에 플란데런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기로 마음먹었고, 자국의 농민 반란에 영향을 끼친 플란데런 반란군을 경계한 프랑스 귀족들 역시 그를 지원하기로 했다.

1382년 11월 초 아라스에서 10,000명의 병력을 집결한 프랑스군은 올리비에 드 클리송의 지휘 하에 플란데런으로 진격했다. 그 해 11월 27일, 프랑스군이 루즈베케 전투에서 헨트 반란군을 격파했고 필리페는 전사했다. 이 소식이 프랑스 북부에 전해지자, 플란데런 봉기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농민들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플란데런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헨트 주민들은 끝까지 항전하기로 결의하고 잉글랜드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들은 루이 2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따른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자신들은 우르바노 6세를 위해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단을 토벌할 십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우르바노 6세는 플란데런에서 발생한 사건을 전해듣고 클레멘스 7세를 추종하는 이들을 상대하는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교서를 반포하면서, 노리치 주교 헨리 르 디스펜서에게 십자군에 참여하거나 지원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상인들은 프랑스의 플란데런 침공으로 중단된 양모 수출이 이번 십자군 원정을 통해 재개될 수 있다고 여겨 호응했고, 의회 역시 부유한 플란데런 백국과의 우호 관계를 회복하고 상당한 이권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겨 찬성했다.

한편,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는 삼촌인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십자군을 운운하며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던 터라, 디스펜서 주교의 십자군을 지원한다면 삼촌이 원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보고 지지를 표했다. 또한 그는 1년 전 막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한 농노들이 와트 타일러의 난을 일으킨 것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세금을 부과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십자군에 들어가는 비용은 교회가 전적으로 부담하니 꺼릴 게 없기도 했다.

1382년 12월 6일, 리처드 2세는 잉글랜드 전역에 십자군을 선포했다. 그리고 12월 말에 디스펜서 주교와 기사들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클레멘스 7세를 숭배하는 이단을 토벌할 때까지 십자가를 지겠다고 맹세했다. 1383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국왕에게 지급하던 전쟁 수행 보조금을 디스펜서에게 할당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383년 5월 칼레에 상륙한 뒤 프랑스군의 지배를 받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 플란데런의 여러 마을을 공략했으며, 5월 25일 루이 2세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플란데런 연합군을 됭케르크 인근에서 격퇴했다.

잇따른 승리에 기세가 한껏 오른 기사들은 플란데런 백작과 프랑스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는 이프르 시를 공략하자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리처드 2세는 전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의 휘하에서 맹활약한 노장 윌리엄 뷰챔프가 이끄는 추가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프랑스와 플란데런에 대한 공격을 미루라고 지시했다. 디스펜서는 왕의 이같은 명령에 따르려 했지만, 기사들이 이프르를 공략해야 한다고 계속 촉구하고 헨트 수뇌부 역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밝히자, 그들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383년 6월 8일, 디스펜서의 십자군이 이프르에 도착한 뒤 포위 공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이프르 주민들은 수비대장 장 돌트르(John d'Oultre)의 지휘하에 농성 준비를 이미 완료했다. 도시 교외의 주거지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이때 나온 목재는 흙으로 된 성벽과 돌로 만들어진 성문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두 개의 도랑을 도시 주위에 파 두었고, 말뚝으로 강화된 높은 가시 울타리와 나무 방책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성벽의 방어를 보강했다.

십자군은 포위 첫날부터 사흘 동안 도시의 정문인 템플 게이트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추가 병력이 도착하여 성벽을 완전히 포위했고, 흙을 사용하여 외부 도랑을 메웠다. 포위 8일째인 6월 15일에 포병대를 동원해 방어 시설을 공격해 손상을 입혔지만, 수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히 버텼다. 십자군은 이후에도 수시로 도시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포격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도시를 돕기 위해 인근에 군대를 배치한 루이 2세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가 수비대와 연락을 원활하게 주고받으면서 잉글랜드군을 앞뒤로 괴롭혔다.

8월 8일, 디스펜서는 헨트 동맹군에게 알리지 않고 철수했다. 헨트군은 이후에도 도시를 포위했지만 9월 10일 갈수록 불어나는 손실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디스펜서와 기사 휴 칼블리는 프랑스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다른 사령관들은 프랑스의 압도적인 병력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기를 거부했다. 일부 십자군은 아예 전쟁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다. 이후 십자군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년 왕 샤를 6세를 대동한 프랑스군이 8월 15일 아라스에서 소집된 뒤 플란데런으로 이동해 8월 말에 테루안에 이르자, 디스펜서는 그하블린느로 퇴각했다.

얼마 후 십자군이 점령했던 됭케르크, 부르부르, 베르그, 포페링에, 뉴포르트 등이 차례로 프랑스군에 재정복되었고, 십자군이 플란데런에 마련한 마지막 거점인 그하블린느도 며칠 뒤 포위되었다. 디스펜서는 처음엔 항복을 거부하고 리처드 2세가 원군을 보내주기를 희망했지만, 리처드 2세가 프랑스와 정면 대결하기 싫어서 군대를 보내주지 않는데다 그하블린느 시민들이 프랑스군에 항복하겠다고 통보하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으로 항복하겠다고 제안했고, 프랑스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디스펜서의 십자군은 10월 말까지 영국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디스펜서는 잉글랜드에 돌아온 뒤 1383년 10월 26일에 소집된 의회에 소환되어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총리 마이클 드 라 폴은 그가 사전에 합의한 대로 칼레에 충분한 병력을 모집하지 않았으며, 군사 지도자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았고, 군대를 조기에 해산했다고 비난했다. 디스펜서는 이에 대응해 이프르에 충분한 병력이 모였고 지휘관을 잘 선택했으며, 왕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장군들이 이프르에서 철수한 뒤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잉글랜드로 도주하거나 명령에 불순종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재산이 압류되어 이번 십자군에 들어간 비용을 메꾸는 데 쓰였다. 디스펜서는 이렇게 실각한 뒤 수년간 조용히 지내다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전장이 터지자 종군 사제로서 정계에 복귀했다.

한편, 헨트는 잉글랜드군이 허망하게 떠난 뒤에도 계속 항전했고,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이들을 굴복시키지 못한 채 1385년 사망했다. 장인이 죽은 후 플란데런 백작위를 물려받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는 1385년 헨트 시민들의 반역죄를 사면하고 몰수한 재산과 특권을 돌려준다는 내용의 투르네 평화 협약을 체결해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프르는 공방전 이후 쇠락하여 1383년 20,000명이었던 인구가 15세기 말에 7,600명으로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