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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1:04:26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이름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Georges Ier de La Trémoille
출생 1384년
프랑스 왕국 파리
사망 1446년 5월 6일 (향년 62세)
프랑스 왕국 쉴리쉬르루아르 성
아버지 기 6세 드라트레무아유
어머니 마리 드 쉴리
형제자매 장, 마리, 마르그리트, 이자보
아내 잔 2세 도베르뉴, 카트린 드 릴부샤르, 마리 기포드(정부), 마리 라 샹파뉴(정부)
자녀 루이 1세, 조르주 2세, 루이즈, 마르그리트(사생아), 장(사생아), 자크(사생아)
직위 트레무아유와 종벨의 영주, 기옌 백작, 볼로뉴와 오베르뉴의 백작, 쉴리의 영주, 프랑스 대의원, 시종장
1. 개요2. 행적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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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백년전쟁 시기에 샤를 7세의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 행적

1384년경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기 6세 드라트레무아유는 트레무아유의 영주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신임을 얻어 종벨의 영주권을 수여받았다. 이후 부르고뉴의 새 공작인 용맹공 장 1세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십자군에 가담할 때 동행했지만,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생포된 뒤 몸값을 지불한 후 귀환하다가 1397년 로도스에서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어머니 마리 드 쉴리는 부아벨 공국과 쉴리, 라 샤펠 당길롱, 엑스당기옹, 생공동, 샤토메양, 생트에르민 영주였던 루이 1세 드 쉴리의 유일한 자녀로, 기 6세가 사망한지 4년 후인 1401년에 드뢰 백작이자 프랑스 무관장을 맡았던 샤를 1세 달브레와 재혼했다. 남동생으로 장[1]이 있었고, 누이로 이자보[2], 마리[3], 마르그리트[4]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부르고뉴 궁정에서 자랐으며, 1413년 용맹공 장 1세의 시종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섬겼고, 1413년 프랑스 대의원이자 물과 숲의 관리인을 역임했다. 1416년 베리 공작이자 프랑스 전임 국왕 장 2세의 아들이었던 장 드 베리의 미망인이고 오베르뉴 백작 장 2세의 딸인 잔 2세 도베르뉴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는 탐에 있는 생 쉴피스 성에 아내를 가두었고, 용맹공 장 1세와 함께 아내의 영지를 점거하고 통치를 행사했다. 잔 2세는 연금도 제대로 주지 않는 남편 때문에 곤궁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위조된 동전을 발행한 혐의로 기소되어 모든 땅을 박탈당한 뒤 부르고뉴파에 맞서 싸우던 아르마냑파의 중심지인 부르주로 이주했고, 1424년에 쓸쓸히 사망했다.

이렇듯 부르고뉴 공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1419년 장 1세가 피살당한 후 새 부르고뉴 공작으로 등극한 선량공 필리프와 결별하고 도팽 샤를과 동맹을 맺었으며, 1422년 부르주 궁정에 합류했다. 1427년 2월,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왕의 총애를 받아 일개 종자에서 시종장으로 발탁된 뒤 정계와 군부에 많은 간섭을 하고 자기 사람을 대거 임용하던 피에르 2세 드 지악을 잡아 죽일 때 협조했다. 이후 피에르 2세 드 지악의 미망인이며 방대한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카트린 드 릴부샤르와 결혼했으며, 프랑스 대의원에 선임되었다. 1427년 6월 리슈몽의 부하들이 푸아티에 인근에서 도팽 샤를의 또다른 시종장이었던 장 베르네를 습격해 살해한 뒤, 베르네의 후임으로서 도팽 샤를의 시종장이 되었다.

1428년 9월, 조르주는 태도가 거친데다가 잉글랜드와 손잡은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동생이기도 한 아르튀르에 대한 도팽 샤를의 의심을 부추겼다. 아르튀르는 이 상황을 만회하고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잉글랜드와 협상을 추진하려던 조르주와 마찰을 벌였고, 나중에는 프랑스 궁정에서 배척당해 변두리로 밀려났다. 이리하여 그는 샤를 7세의 총애를 한 몸에 얻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이에 아르튀르와 정치적 동맹을 맺고 있던 투아르 자작 루이 당부아즈, 기사 앙투안 드 비본, 르제 영주 앙드레 드 보몽은 조르주를 몰아내고 왕실 의회를 개편한 뒤 아르튀르를 복권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발각당한 뒤 추방되었다가 1430년 6월에서야 사면되었다. 잔 다르크랭스 행진을 완수한 후인 1429년 7월 17일, 그는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에 참여했다.

19세기의 역사가 쥘 키체라(Jules Quicherat, 1814 ~ 1882)와 앙리 마틴(Henri Martin, 1810 ~ 1883)은 조르주가 잔 다르크의 원정을 시도때도 없이 방해했고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의심하고 저버리도록 부추겼다고 비난했다. 특히 1차 파리 공방전 때 잔 다르크를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 그녀가 실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조르주는 이로 인해 샤를 7세의 눈과 귀를 흐려서 잔 다르크를 음해한 간신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하며, 쥘 키체라와 앙리 마틴이 공화주의와 반성직주의의 옹호자로서 이를 홍보하기 위해 조르주를 악역으로 내세웠다고 본다. 실제로 잔 다르크의 가장 믿음직한 부관 중 한 명이었던 질 드 레는 조르주와 계약을 맺고 전장에 투입된 것이었으므로, 조르주가 잔 다르크를 지원해줬다고 볼 수도 있다.

다만 조르주가 부르고뉴파와 평화 협약을 맺기를 강하게 희망했고, 이로 인해 적극적인 공세를 주장하는 잔 다르크의 지지자들과 여러 차례 마찰이 벌어졌던 건 사실이다. 여기에 그가 콩피에뉴의 총독에 선임된 뒤 기욤 드 플라비를 콩피에뉴 수비대장으로 선임했는데, 1430년 5월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한 잔 다르크가 요새로 돌아가려 했다가 성문이 닫혀 버리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르고뉴군에게 생포된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조르주가 플라비에게 잔 다르크를 부르고뉴군에게 붙잡히도록 사주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샤를 7세는 몸값을 지불하고 잔 다르크를 데려가라는 부르고뉴 측의 요구를 거들떠 보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조르주가 왕에게 잔 다르크를 버리라고 조언했을 거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후 조르주는 외교 활동에 전념했고, 1433년 3월 5일에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프랑스 왕국간의 협약을 맺음으로써 브르타뉴 공국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게 했다. 그러나 그해 6월 3일 시농에서 얀 2세 드 로스니비넨에게 배를 찔러 부상을 입었고, 요양 생활을 하던 중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보낸 장병들에게 체포되어 몽트레조 성에 감금되었다. 샤를 7세는 자신의 시종장을 무단으로 체포한 아르튀르에게 별다른 처벌을 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프랑스 무관장에 복직시켰다.

이후 조르주는 석방되어 영지로 돌아가 수년간 은거했다. 그러던 1440년, 장 드 뒤누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장 2세 달랑송, 샤를 1세 드 부르봉, 도팽 루이가 샤를 7세의 왕권 강화 및 사병 해체 명령에 반발하여 프라그리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납치하여 강제로 실각시켜버린 아르튀르와 곤경에 처한 자신을 외면해 버린 샤를 7세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가담했다. 그러나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이끄는 토벌대가 반란군을 조기에 제압해버렸고, 왕에게 용서를 구해 겨우 사면받았지만 다시는 정계에서 활동하지 못하다가 1446년 5월 6일 쉴리쉬르루아르 성에서 사망했다.

3. 가족



[1] ? ~ 1449, 종빌의 영주[2] 1385 ~ ?, 기사 피에르 드 투젤 달레그레과 초혼, 샤를 6세의 기사이자 시종이었던 기욤 드 샤토빌랭과 재혼[3] ? ~ 1433년 또는 1439년, 토네르 백작 루이 2세 드 샬롱토네르의 부인[4] ? ~ 1413, 폰스 영주 르노 6세 드 폰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