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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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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
John of Lancaster, Duke of Bedford
파일:John,_Duke_of_Bedford.jpg
이름 랭커스터의 존
(John of Lancaster)
출생 1389년 6월 20일
잉글랜드 왕국 케닐워스
사망 1435년 9월 14일 (향년 46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루앙
장례식 1435년 9월 30일
루앙 루앙 대성당
배우자 부르고뉴의 안 (1423년 결혼 / 1432년 사망)
자클린 드 뤽상부르생폴 (1433년 결혼)
아버지 헨리 4세
어머니 메리 드 보훈[1]
형제 헨리 5세, 토머스, 험프리, 블랜치, 필리파
종교 가톨릭
문장 파일:Arms_of_John_of_Lancaster,_1st_Duke_of_Bedford.svg.png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헨리 5세 시기2.3. 프랑스의 섭정
2.3.1. 베드퍼드 공작의 활약2.3.2. 잔 다르크와의 대결2.3.3.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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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자. 헨리 4세의 아들이자 헨리 5세의 동생이다.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유능한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작위인 베드퍼드 공작으로 더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년기

1389년 6월 20일 잉글랜드 왕국 케닐워스에서 당시 더비 백작이었던 헨리 4세와 제2대 노샘프턴 백작, 제7대 헤리퍼드 백작, 제6대 에식스 백작인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인 메리 드 보훈의 세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으로 헨리 5세, 토머스가 있었고, 남동생으로 험프리가 있었고, 누이로 블랜치[2], 필리파[3]가 있었다.

1394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할머니인 헤레퍼드 백작부인 조앤 피츠앨런[4]의 집에서 자랐고, 1397년부터는 먼 친척인 노퍽 공작부인 마가렛 브라더턴[5]의 집에서 자랐다. 8살 때 라틴어 문법에 숙달하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능숙하고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로 명석했다고 한다. 또한 잘생겼고 체격도 좋았으며 성품도 좋았기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399년 10월 12일에 아버지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하기 전날 설립된 바스 기산의 일원이 되었다. 1400년 자신만의 작은 궁정을 아버지로부터 수여받았으며, 예배당 역시 받았다. 이 예배당은 곧 학장이 이끄는 성직자와 성가대가 있는 본격적인 교회 기관으로 변모했다. 그가 전쟁에 나설 때, 이 성직자들과 성가대도 동행했다고 전해진다. 1402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에 선임되었으며, 1403년에서 1405년 사이에 아버지가 반란을 제압하고 몰수한 퍼시 가문 영지와 위트셔에 있는 오그본의 작은 수도원을 부여받았다. 또한 1403년 9월 10일에 잉글랜드의 고위 순경이 되었고, 동부 국경 사령관 및 베릭 성주로 선임되었다. 이후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지휘하에 스코틀랜드군과 맞서 싸우면서 전쟁 경험을 쌓았다.

존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스코틀랜드 국경 관리인으로서 겪는 재정적 어려움이 많이 기술되어 있었다. 이에따르면, 1404년 중반까지 그의 급여는 4,000파운드였지만, 군인들에게 밀린 급여를 주기 위해 보석을 담보로 잡고 접시를 녹여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급료가 계속 밀려서 병사들은 허구헌 날 폭동을 일으키고 끊임없는 적대 행위에 연루되어 있어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다고 했다. 나중에 일부 자금이 그에게 보내졌지만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귀족에게 돈을 빌려서 병사들을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1411년 또는 1412년에 3,000파운드에 달하는 빚을 져야 했다.

1405년 제5대 바르톨프 남작 토머스 바르톨프의 반란을 의회에 알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웨스트모어랜드 백작과 동맹을 맺었다. 쉽튼 무어 전투에서 반란군을 물리친 뒤 반군 지도자 중 한 명인 요크 대주교 리처드 르 스크루프를 체포해 아버지에게 넘겼다. 헨리 4세는 스크루프를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했고, 존은 요크 민스터에 편지를 보내 대주교의 묘지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를 비난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대가로 아버지로부터 반란에 가담했다가 스코틀랜드로 도주한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압수된 성 중 일부를 받았다. 1408년 4월과 1411년 4월에 스코틀랜드와 협상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북부 지역을 사수해 버윅 성을 강화하고 자신이 힘이 닿는 한 동부 국경의 평화를 유지했다.

2.2. 헨리 5세 시기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한 후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5세는 동생 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전쟁, 정치, 외교에서 더 큰 역할을 맡겼다. 1414년 5월 16일 레스터에서 열린 의회에서 베드퍼드 공작과 켄달 백작 칭호를 존에게 수여했으며, 11월 24일에는 리치먼드 백작 칭호를 수여했다. 1415년 이전에 존에게 넘겨졌던 퍼시 가문의 영지가 퍼시 가문에 되돌아가게 한 뒤, 헨리 5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얀간 2,000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동생 존에게 넘겼다. 이 당시 존의 연간 수입은 7~8천 마르크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그를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거물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1415년,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을 개시했다. 이때 그는 자신이 부재한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하는 역할을 존에게 맡겼다. 존은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형을 돕기 위해 의회를 개최해, 승전에 기여한 병사들에게 지급할 포상금을 마련하게했다. 1416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잉글랜드 방문과 관련된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로체스터에서 지기스문트를 만났고 런던으로 안내했다. 이후 성 조지의 날을 기념하여 윈저에서 열린 연회에서, 그는 지기스문트의 왼편에 앉았다.

1416년 7월 22일, 존은 프랑스의 아르플뢰르 봉쇄를 종식시키기 위한 원정군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8월 15일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 해군과 셰프드코 해전을 치른 끝에 적선 3척을 나포하고 대형 선박 한 척을 침몰시켰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1,500명에 달했지만 잉글랜드군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그의 공적을 치켜세우려는 잉글랜드인들에 의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417년 에드워드 3세가 다시 프랑스 원정을 단행했을 때, 존은 또다시 왕국의 섭정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군이 헨리 5세가 부재한 틈을 타 록스버그를 포위하자, 즉시 6,000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요크셔에서 프랑스로 파견할 군대를 모집하고 있던 엑서터 공작 토머스 보퍼트,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요크 대주교 헨리 보웻의 군대와 합세했다.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군이 접근한 걸 알게 되자 철수했고, 존은 버윗 성주 로버트 4세 드 움프라빌에게 국경 수비를 맡기고 병력을 남겨둔 뒤 런던으로 귀환했다.

1417년 11월 16일, 존은 의회 의장을 맡아 롤라드파 지도자인 존 올드캐슬을 반역 및 이단 혐의로 끌어낸 뒤 롤라드 신앙을 포기하고 가톨릭을 받아들이겠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올드캐슬이 끝까지 거부하자, 의회는 유죄 판결을 내렸고, 존은 올드캐슬의 화형식에 참석했다. 1418년 에노 백작 기욤 4세의 딸이자 상속녀인 에노의 자클린이 리에주 주교였다가 바이에른 공작이 된 요한 3세의 공세를 피해 잉글랜드로 망명한 것을 받아줬다. 또한 그는 자신들의 선박이 잉글랜드군에 의해 부당하게 나포되었다고 주장하는 플란데런, 브르타뉴, 제노바 상인들의 주장을 해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1419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가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승인을 받고 존을 자신의 왕위 계승자로서 입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추밀원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었다. 1420년 봄, 이탈리아 용병대장 스포르차 아텐돌로와 앙주 공작 루이 3세가 쳐들어오자, 조반나 2세는 이에 맞서면서 잉글랜드에 재차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고 일전에 한 제안을 반복했지만, 추밀원은 교황 마르티노 5세가 루이 3세를 부추겨서 나폴리를 공격하게 했던 것을 고려해 그녀를 도왔다간 교황청과 척질 것을 우려하여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라곤 왕국-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알리폰소 5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루이 3세와 대적하게 했다.

1419년 10월, 존은 의회를 소집해 성직자와 귀족들로부터 전쟁에 쓸 군자금을 조달받았다. 이후 12월 말에 잉글랜드 섭정 직을 사임한 뒤 1420년 5월 궁수 800명과 맨앳암즈 2,000명을 이끌고 두형 헨리 5세와 클라렌스 공작 토머스를 돕기 위해 프랑스로 향했다. 1420년 5월 21일 형 헨리 5세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하고,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프랑스 차기 국왕으로 인정받는다는 내용의 트루아 협약 서명식에 참석했다. 1420년 6월부터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저에 참여해 상스 공방전에 참가했고, 7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된 멜룬 포위 공격을 수행하기 위해 노르망디에서 지원군을 데려왔다. 12월 1일에 헨리 5세의 파리 입성식 때 클라렌스 공작과 함게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들의 뒤를 따라갔고, 헨리 5세와 함께 루브르 궁정에서 겨울을 보냈다. 12월 10일 프랑스 귀족들이 트루아 조약을 비준할 때 참석했으며, 12월 23일 부르고뉴 전임 공작 용맹공 장을 살해한 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원 심리에 참석했다.

1421년 초 헨리 5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1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린 카트린 드 발루아의 잉글랜드 왕비 대관식에 참석했다. 그해 3월 22일 클라렌스 공작 토머스가 보제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에 분노한 헨리 5세가 1421년 6월부터 1422년 5월까지 프랑스 원정을 떠났을 때 잉글랜드에 남아 대리 통치했으며, 1421년 12월 자신의 삼촌이자 윈체스터 주교인 헨리 보퍼트와 함께 헨리 5세의 아들 헨리의 대부가 되었다. 같은 달에 오그본의 영적 보물을 가터 기사단의 정신적 고향인 윈저 궁에 있는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 기증했다.

1422년 5월 중병에 걸린 헨리 5세의 소환령을 받자 카트린 왕비와 함께 프랑스로 이동하면서 남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에게 잉글랜드 왕국을 맡겼다. 이후 헨리 5세를 대신해 부르고뉴 북부의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베즐레, 아발롱, 콩쿠르 공방전을 지휘했다. 그해 8월 31일, 헨리 5세는 뱅센에서 병사했다. 존은 형이 임종하는 걸 지켜보면서 형의 갓난아들 헨리 6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충실히 보필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생드니와 루앙을 거쳐 칼레까지 형의 장례 행렬에 동행했고, 이후엔 노르망디 총독으로서 루앙으로 돌아갔다.

2.3. 프랑스의 섭정

2.3.1. 베드퍼드 공작의 활약

헨리 5세는 생전에 존이 잉글랜드 섭정,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가 프랑스의 섭정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선량공 필리프가 이를 거부하면서, 존은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고 험프리는 잉글랜드의 수호자가 되었다. 험프리는 자기가 잉글랜드의 섭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윈체스터 주교 헨리 보퍼트가 이를 강력하게 막아서는 바람에 성사하지 못했다. 이후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는 더 많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게다가 험프리는 존의 권세를 질투했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당국의 정책이 서로 모순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가 1422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11월 5일 파리에 도착한 존은 11월 9~11일 샤를 6세의 장례식에 잉글랜드 왕자로서 유일하게 참석했다. 장례 행렬이 생드니에서 파리로 돌아왔을 때, 존은 국가의 검을 자신 앞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왕좌에 대한 잉글랜드의 주장을 상징하는 이 장면은 프랑스 국민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존은 프랑스인들이 잉글랜드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그림과 시의 형태로 지속적인 정치적 선전을 벌였다. 뒤이어 프랑스 의회 의장을 맡은 존은 헨리 5세의 정책을 따를 것이라고 선언했고, 참석자들에게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트루아 조약을 존중할 것이며, 프랑스의 섭정으로서 자신의 명령을 따르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의 섭정으로서 헨리 6세가 프랑스 전역의 국왕으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1423년, 존은 선량공 필리프 3세의 누이인 부르고뉴의 안과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공국의 동맹을 굳건히 함으로써, 헨리 6세가 잉글랜드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지게 하길 희망했다. 또한 그는 1423년 12월 17일 부르고뉴 공작과 브르타뉴 공작과 함께 아미앵에서 상호 지원을 약속하는 협약을 맺음으로써, 도팽 샤를을 받드는 '프랑스의 반역자'들을 토벌하는 데 서로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후 존은 자신의 통제하에 있고 그동안의 전쟁으로 큰 고통을 겪은 프랑스 지역의 번영을 회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는 첫 2년간 주화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화폐 개혁을 실시했고, 상인들에게 특권을 부여했으며, 루앙, 에브뢰, 보베 제조업자들에게 양모를 공급하고 파리로 실크를 배달하는 걸 장려함으로써 무역을 키우고자 했다. 또한 주로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프랑스 추밀원 및 평의회를 자주 소집해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정책을 추진했으며, 학대를 근절하고 뇌물 수수를 억제하며 수감자들에 대한 잔인한 처우를 금지했다. 여기에 행정 및 군사 개혁을 수행하고 강도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공정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인도적인 통치자임을 모두에게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존은 초기부터 장애에 부딪혔다. 이보다 앞서, 잉글랜드에 망명했던 에노의 자클린은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주지 않다가 요한 3세와 일방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해버린 남편인 브라반트 공작 장 4세를 원망했고, 교황청에 남편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으며 성적 결합도 이뤄지지 않았으니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요청서를 발송한 뒤 새 남편감을 물색했다. 마침 존의 권세를 질시해 이에 버금갈 세력을 갖추길 희망했던 랭커스터의 험프리는 그녀와 결혼하고 저지대 국가에 진출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1423년 10월 20일, 헨리 6세는 험프리의 요구에 따라 자클린과 그녀의 후손들이 잉글랜드에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권을 내렸으며, 글로스터 공작부인으로 인정했다.

이후 험프리와 자클린은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와 아비뇽의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에게 혼인을 승낙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부르고뉴 공작이자 자클린의 사촌이었던 선량공 필리프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저지대 국가에 잉글랜드가 진출하기를 바라지 않아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험프리, 자클린 부부와 부르고뉴 공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험프리는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1424년 가을에 자클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칼레에 상륙한 뒤 11월 말에 몽스에 입성한 후 12월 5일에 몽스에서 에노 백작으로 취임했다.

1425년 1월 6일,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요한 3세는 자식이 없었고, 죽기 1년 전에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를 저지대 국가 내 영지들의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선량공 필리프는 요한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빠르게 군대를 보내 두 백작령을 장악하고는, 자클린과 험프리의 결혼은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에 간통이며,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자클린의 진정한 남편이니 이 영지들의 주권자라고 선포했다. 이후 험프리와 필리프간의 날이 선 편지가 오갔고, 급기야 양자는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진만 존이 급히 두 사람을 중재하면서 결투는 취소되었다. 이후 험프리는 의회에 자신을 도울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부르고뉴 공국과 척지고 싶지 않았던 의회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그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한편, 도팽 샤를은 헨리 5세가 사망한 지금이야말로 대대적으로 반격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력이 닿는 지역에 전령을 잇따라 보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으려 하니 프랑스를 구하는 데 앞장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남부 전역의 장정들이 부르주로 몰려들었고, 아라곤, 롬바르디아에서도 용병이 추가로 고용되었다. 이 용병들은 이미 프랑스에 와서 보제 전투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스코틀랜드군과 통합되었다. 1423년 여름, 보제 전투를 이끈 스코틀랜드 장군이자 프랑스 무관장인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방돔 백작 루이가 이끄는 8,000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이 부르주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오셰르에서 남쪽으로 9마일 떨어진 욘 강에 있는 크라방을 먼저 공략한 뒤 강을 따라 북상하여 부르고뉴로 진격하기로 했다.

존은 이 소식을 접하자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에게 4,000명의 병력을 맡겨 크라방을 구원하게 했다. 여기에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아르투아의 본은 1,000명의 부르고뉴군을 파견해 잉글랜드군과 합류하게 했다. 토머스 몬타구는 탁월한 전술과 뛰어난 통솔력을 발휘해 크라방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1423년 9월 26일 앙주와 메인을 약탈한 뒤 노르망디로 귀환하던 잉글랜드군을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에서 습격해 섬멸하는 등 저항을 꿋꿋이 이어갔다.

1424년, 존은 프랑스 중부의 앙주와 메인을 공략하고 도팽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를 압박하기로 마음먹고, 8,000~9,000 가량의 병력을 모집했다. 여기에 부르고뉴에서 파견된 3,000명도 가세했다. 도팽 샤를은 이에 맞서 일글랜드와 부르고뉴 세력이 보유한 도시와 성을 가능한 한 많이 공략하기 위해 프랑스 장정들을 대거 징발했고, 해외에서 용병대를 대거 모집했다. 특히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는 1424년 3월 7일 6,500명의 스코틀랜드 병사들을 이끌고 라 로쎌에 상륙한 뒤 도팽 샤를로부터 "프랑스 왕국 전역에서 전역을 수행하는" 중장 직위를 수여받고 투렌 공작에 선임되었다.이렇게 해서 끌어모은 프랑스군의 전력은 14,000~16,000명에 달했다.

당시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이브리 성은 도팽 샤를을 지지하다가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될 기미를 보이자 1424년 8월 14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존은 이브리 성으로 전군을 집결시킨 뒤 이곳을 구하러 오는 적군을 섬멸한 후 앙주와 메인으로 진격하려 했다. 실제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이브리를 구하기 위해 이브리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노낭쿠르에 이르렀다. 하지만 존이 브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연합군 수뇌부는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다.

프랑스 장성들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 대규모 야전에서 참패를 겪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지형상 절대 우세하는 등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브리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반 잉글랜드 정서가 매우 극렬했고,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자신들이 맹활약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에 잉글랜드군과 대규모 야전을 벌일 때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크라방 전투 때 프랑스인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최선을 다해 싸우던 동족들이 몰살당했다고 여겼기에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도팽 샤를로부터 지휘권을 부여받은 장 8세 다르쿠르의 뜻대로 이브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대신, 베르뇌유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있는 잉글랜드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잉글랜드 본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유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발한 꾀를 고안했다. 그들은 동포의 목에 갈고리를 씌운 뒤 피를 잔뜩 묻힌 후 베르뇌유 성채로 데려가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으며 이들은 겨우 살아남은 포로라고 소개했다. '잉글랜드 포로'로 가장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목놓아 통곡하며 "이제 잉글랜드는 끝났다. 우리는 패망했다."라고 소리지르자, 베르뇌유 수비대와 시민들은 정말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다고 착각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한편, 8월 14일 이브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존은 다음날 베르뇌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3,000명의 부르고뉴 파견대를 피카르디에 별도로 보내 별도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그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눈앞에 두고 부르고뉴 부대를 다른 곳에 보낸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8월 16일 잉글랜드군이 베르뇌유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많은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잉글랜드군에서 이탈해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한편,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이 근처에 이르자 이들과 맞붙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 우위이며 저들은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프랑스 장군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이에 설득되었다. 그럼에도 장 8세 다르쿠르는 교전을 섣불리 벌였다가 일을 망칠까봐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존은 프랑스-스코틀랜드 동맹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전투 후 르타뉴 원정을 이끌던 토머스 램프스턴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7,262명의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군 6,000명 중 단 40명 만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프랑스 지휘관 장 8세 다르쿠르, 나바르 자작 기욤 2세 등 여러 프랑스 장교들이 사살되었고, 더글러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 뷰컨 백작 존 스튜어트 등 스코틀랜드 장성들도 살해되었다. 나르본 자작은 지난날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를 살해한 전력이 있었기에 시신이 4등분되고 머리는 교수대에 매달리는 수모를 겪었다.

대승을 거둔 베드퍼드 공작은 파리로 돌아와서 시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남부로 곧장 진격했다가 형 헨리 5세가 겪어야 했던 것처럼 적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기 보다는 메인과 앙주의 복속을 완료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이후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잔존했던 도팽 샤를의 요새들이 모조리 잉글랜드군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라 이르가 이끄는 현지 프랑스군은 루아르 강 너머로 철수했다. 이에 도팽 샤를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브르타뉴 공국, 부르고뉴 공국과 긴밀하게 접촉했고, 1425년 3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삼아 브르타뉴 공국을 회유했다.

결국 1425년 10월 초,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는 도팽 샤를과 접견한 뒤 도팽 샤를에게 신하로서 선서한 후, 부르고뉴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도팽 샤를과 화해하라고 권유했다. 존은 이 소식에 격분해 브르타뉴 공국에게 2년 전 아미앵에서 맺은 조약에 따라 헨리 6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응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뒤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했다. 1426년 1월, 존은 런던으로 가서 험프리와 헨리 보퍼트가 서로 화해하도록 종용했다. 두 사람은 존 앞에서는 서로 화해하겠다고 맹세했지만, 이후에도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후 존은 어린 왕 헨리 6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고, 의회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약속한 뒤, 의회의 결정에 따라 군대를 소집한 후 1427년 3월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후 브르타뉴 공국에 대한 공세를 감행해 브르타뉴 공작 장 5세를 굴복시키고 잉글랜드의 동맹으로 돌아가도록 강요했다.

1427년 7월, 존은 앙주, 메인 지역을 어느정도 복속시킨 뒤 파리에서 60마일 떨어진 몽타르지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은 렁 강, 베흐니쏭 강의 교차점에 자리잡은 곳으로, 운하가 잘 깔려 있어서 상업 및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 또한 루아르 강, 센 강과도 가까워끼에 프랑스 남부로의 해운 수송에도 적합했다. 이곳을 공략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고, 아직도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압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에게 도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리처드 뷰챔프는 2개월 가까이 포위 공격하다가 9월 5일 장 드 뒤누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격파되었다.(몽타르지 공방전)

2.3.2. 잔 다르크와의 대결

1428년 10월, 존은 오를레앙 원정을 단행하기로 했다. 사실 그는 처음엔 오를레앙보다는 앙주의 중심지인 앙제 요새를 공략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는 앙제를 공략한들 도팽 샤를의 저항은 계속 이어질 거라며, 루아르 강변의 핵심 거점인 오를레앙을 공략한 뒤 루아르 강을 도하한 후 샤를의 본거지인 부르주를 포위해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은 당시 잉글랜드의 포로였던 오를레앙 공작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소유인 곳을 압수하는 것은 기사로서 가치가 없는 일로 여겼기에 망설였지만, 다른 장성들이 솔즈베리 백작의 주장에 동조하자 마음을 달리 먹고 오를레앙 공략을 지시했다. 1427년 7월 17일 오를레앙 백작과 서퍽 백작, 부르고뉴 대표가 런던에서 오를레앙 공국이 침략당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조약에 서명했지만, 존은 이를 비준하지 않았다.[6]

그러나 오를레앙 공방전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초기에 오를레앙 공략을 맡은 토머스 몬타구는 구원군이 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붓다가 1429년 10월 24일 오를레앙 인근의 요충지인 투렐 요새의 2개 탑 중 하나에 올라가서 창문을 통해 도시를 바라보던 중 오를레앙의 노트르담 탑에 설치된 대포가 그쪽으로 쏜 포탄에 맞아 죽었다. 이후 새 사령관으로 부임한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은 공성전을 감행했다가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게 자명하니 포격을 도시로 끊임없이 퍼붓고 철저하게 봉쇄해서 적을 굶겨 죽이기로 하고, 수비대가 파괴한 수녀원 폐허 위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후 수많은 목조 요새가 도시 주변에 세워졌지만, 도시를 완전 포위하기에는 병력이 매우 부족했기에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생 세베르, 롬바르드인 용병 테오돌트 드 발페르그 등이 구원군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이 미처 봉쇄하지 못한 지점을 통과해 요새로 진입했고 보급품도 꾸준히 전달되었다.

12월 1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포위군을 돕기 위해 현장에 도착했다. 12월 7일 수비대가 투렐 요새를 탈환하기 위해 출격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오를레앙 수비대는 12월 29일까지 도시 외곽에 남아있는 여러 교회를 불태웠다. 이듬해인 1249년 1월,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은 오를레앙의 서쪽 요새 주변에 울타리와 도랑으로 연결된 일련의 요새를 세우고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은 1429년 4월까지 오를레앙 동쪽 강둑의 생 루에 추가 요새를 세웠다. 그 동안 보급품이 도시의 북쪽과 북동쪽 도로를 통해 오를레앙으로 들어왔다. 잉글랜드군은 이를 막기 위해 요새화된 기지를 그쪽에 세우려 했지만, 그러기엔 병력이 부족해서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렇듯 잉글랜드군의 공세가 지지부진하던 1429년 2월 8일, 한 처녀가 오를레앙에 곧 나타날 것이며 프랑스가 그녀에게 구원받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2월 11일, 존 파스톨프가 지휘하는 1,000명의 기마 궁수 및 기사들이 300대의 마차에 식량, 화살, 화약, 대포, 그리고 사순절 기간에 병사들에게 먹일 청어를 가득 싣고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루브레 마을 인근 평원에서 오를레앙을 구원하러 가던 클레르몽 백작 샤를 1세와 에브뢰 백작이자 스코틀랜드 장군인 존 스튜어트 드 단리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 4,000명과 마주쳤다. 하지만 이어진 루브레 전투(일명 '청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참패했고, 잉글랜드 수송부대는 유유히 아군 진영으로 가서 보급품을 전달했다. 오를레앙 수비대를 지휘하던 장 드 뒤누아는 이 전투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은 뒤 오를레앙으로 가까스로 돌아왔다.

뒤누아는 구원군이 격파된 것에 낙담해 적 진영에 저명한 시민 대표단을 보내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 넘기고, 잉글랜드인과 부르고뉴인들이 루아르 강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도시의 세금 중 절반을 잉글랜드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오를레앙 공작의 몸값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이 제안에 혹해 파리로 달려가서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이 곧 함락될 거라 확신했던 베드퍼드 공작은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게 넘기기 싫었기에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한 부르고뉴군에 철수를 명령했고, 부르고뉴군은 1429년 4월 17일에 전장을 떠났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부족했던 포위 병력은 더욱 부족해졌고, 오를레앙 북쪽 도로를 막기 위해 설치될 예정이었던 북쪽 초소는 취소되었다.

그렇게 오를레앙 공방전이 반년 째 질질 끌려가던 그 때, 잔 다르크가 1429년 4월 29일 구원군을 이끌고 오를레앙에 입성한 뒤 프랑스군을 독려한 끝에 5월 7일 투렐 요새를 공략하고 잉글랜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견디지 못한 잉글랜드군은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잔 다르크의 독려 아래 기세를 이어가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등 일련의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했다. 급기야 1429년 7월 17일 일요일, 도팽 샤를은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에 민심은 샤를 7세 쪽으로 기울어졌고, 잉글랜드군의 입지는 갈수록 약화되었다.

샤를 7세를 옹립한 아르마냑파가 잔다르크의 활약에 힘입어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은 파리 시민들의 불안을 갈수록 가중시켰다. 그들은 아르마냑파가 파리를 공략한다면 그동안 잉글랜드와 부르고뉴파에 협력한 자신들에게 철저한 보복을 할 거라고 우려했다. 민심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존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자신과 부르고뉴 공작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릴 아담 영주 장 드 빌리에를 파리 수비대 사령관으로 세우고 배신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장교들을 모조리 교체했으며, 질 영주 시몽 모르히에를 파리 상인 지도자로 선정했다. 또한 매일 성모 마리아에게 특별 미사를 봉헌했으며, 도시가 함락될 경우를 대비해 교회 보물을 은신처에 숨겼다. 이후 베드퍼드 공작은 군대를 새로 모집해 돌아올 것을 약속하며 도시를 떠나 노르망디로 향했다.

존이 파리를 지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샤를 7세 정부는 앞으로 어찌 할 지 논의했다. 잔 다르크, 장 2세 달랑송, 질 드 레 등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리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적이 거듭된 패배로 상실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말고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대관식 때 샤를 7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르노 드 샤르트르 주교,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등은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이상 부르고뉴파와 협상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때까지 전쟁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파리의 방비가 매우 막강하니 섣불리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볼 것이므로 부르고뉴파를 회유하는 데 중점을 두기를 희망했다.

두 정파의 대립이 가중되고 있을 때,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인 다비 드 브리모가 이끄는 부르고뉴 대표단이 찾아와 15일간의 휴전을 제안하면서, 파리를 샤를 7세에게 넘길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샤를 7세는 파리 진군을 미루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의 도시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복속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잔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뜻에 따르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 지역을 돌며 영주와 주민들에게 샤를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해 열띤 호응을 얻어냈다. 그러나 샤를 7세의 측근들이 잔의 인기가 갈수록 치솟는 것에 깊은 경계심을 품으면서, 잔과 왕실간의 갈등이 표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르마냑파가 이렇듯 가만히 있는 사이, 존은 칼레에 상륙한 3,500명의 맨앳암즈와 장궁병들을 이끌고 7월 25일 파리에 입성했다. 여기에 선량공 필리프가 지휘하는 피카르디 병사 700명도 가세했다. 8월 2일, 존은 잉글랜드가 지배하는 프랑스 지역의 모든 귀족들에게 한 달 안에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프랑스인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파리를 떠나 8월 4일 멜룬에 이르렀다. 프랑스군은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군을 쳐부수고자 낭기스로 이동했다. 존은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파리로 돌아갔고,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를 저버리고 자신들에게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측근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루아르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최근에 복종을 표명했던 브레이가 잉글랜드군의 급습으로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불쾌감을 느낀 샤를은 파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진군 과정에서 수뇌부간의 의견 충돌이 거세지면서 행군이 멈추거나 지연되기 일쑤였다. 존은 그런 적의 행보를 지켜보다가 파리를 떠나 상리스로 이동한 뒤 샤를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샤를을 "이전에는 자신을 도팽이라 칭하고 이제는 왕이라고 칭하며 정당한 왕에게서 왕좌를 빼앗으려는 자", "남장을 한 방탕한 여인이자 하느님을 거역하는 이단자와 동맹을 맺은 자", "용맹공 장의 살인자"라고 지칭하면서, 전장에 나와서 분쟁을 완전히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상리스 마을과 노트르담 드 라 빅투아르 수도원 인근에 전투 대형을 세우고, 방어벽과 수송 마차들을 전방과 측면에 잔뜩 세워두고 후방에 강을 둔 채 프랑스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8월 11일, 존의 서신을 받고 분노한 샤를은 적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 이르가 이끄는 프랑스 기병대가 먼저 출격했고, 프랑스 본대가 뒤따라갔다. 8월 13일 티에우 마을 인근에서 양측 기병대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8월 15일 상리스 인근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적군이 강력한 방어 진형을 갖춘 걸 보고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일부러 물러서는 모습을 보여서 잉글랜드군이 진영을 떠나서 자신들을 쫓아오도록 유도하려 했으나, 잘 훈련받은 잉글랜드군은 여기에 속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군이 크레피로 물러나자, 존도 파리로 돌아갔다. 이후 노르망디의 상황이 매우 불온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곳곳에서 잉글랜드의 억압에 반발한 주민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보베와 오마르 당국은 샤를 7세의 사절과 협상했으며, 루앙 시민들은 도시를 프랑스에 넘겨주려 했다.

이에 존은 노르망디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다수 잉글랜드군을 노르망디로 이동시켰고, 장 드 빌리에와 시몽 모르히에가 이끄는 파리 민병대 4,200명만이 파리 수비를 맡았다. 이후 잔 다르크의 독려를 받은 프랑스군이 파리로 쳐들어오면서 1차 파리 공방전이 벌어졌지만, 파리 수비대와 시민들의 결사적인 항전과 샤를 7세의 미비한 지원 때문에 결국 공략에 실패하고 9월 13일에 철수했다. 이후 존은 최전선이 된 파리에 정부를 계속 두는 건 위험하다고 여기고, 파리 시와 샤르트르, 믈룅, 상스 등 주요 도시들의 행정권을 부르고뉴 공작에게 위임하고 루앙으로 정부를 이전했다. 이로써 부르고뉴 공작은 북부 프랑스의 대도시들의 수입을 거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거의 끝나가는 듯 보였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동맹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후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간의 소규모 접전이 오가던 1430년 5월, 샤를 7세에게 충성을 서약한 콩피에뉴를 구하기 위해 소규모 수행원을 이끌고 달려갔던 잔 다르크가 콩피에뉴 공방전 도중 부르고뉴군에 체포되었다. 부르고뉴 측은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주면 잔 다르크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샤를 7세가 끝까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잉글랜드로 이송했다. 존은 그녀를 루앙에서 열린 재판에 회부하도록 했고,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2.3.3. 말년

1430년 4월, 헨리 6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칼레에 상륙했다. 이 때문에 존의 프랑스 섭정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존은 즉시 헨리 6세와 합류한 뒤 랭스를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아르마냑파가 랭스를 매우 굳건하게 장악하고 있던 터라 탈환할 가망이 없자, 그 대신 파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1431년 12월 16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존의 주관하에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수운 봉쇄로 인한 파리 시의 물자 부족,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관식을 주관한 잉글랜드인들에게 파리 감수성이 부족한 탓에 행사는 엉망으로 치러졌다. 대관식이 프랑스 전통이 아닌 잉글랜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루머까지 퍼지면서, 프랑스 민중의 의중은 샤를 7세로 급격하게 쏠렸다.

1432년, 존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 주변 지역인 일드프랑스에 대한 통제력이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회하기로 했다. 그는 마른 강센강의 교차점에 세워진 라니쉬른마른 요새에 자리잡은 프랑스군이 파리로 들어오는 수송선들을 지속적으로 습격해 파리 시민들이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부르고뉴군 사령관 장 드 빌리에, 장 2세 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6,000 가량의 군대를 일으켜, 1432년 5월 중순에 라니쉬르마른을 포위했다. 당시 라니쉬르마른 요새에서는 생제르맹 영주 장 푸코와 기사 앙브루아즈 드 로레가 600~800명 가량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다.

존은 마을 주민들을 겁주기 위해 공성 첫날에 마을을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일부 성문과 성벽 일부가 파괴되었다. 그는 포격을 잠시 중단한 뒤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이에 존은 장병들에게 성벽을 공략하라고 명했지만,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존은 요새를 가만히 포위해 수비대와 주민들은 굶주려 죽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수비대는 샤를 7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 7세는 장 드 브로세, 장 드 뒤누아, 라울 6세 드 고쿠르,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질 드 레, 라 이르 등에게 800~1,000명의 병력을 줘서 도시를 구원하게 했다. 이들은 오를레앙에서 멜룬 방향으로 진군한 뒤 센 강을 건너 브리를 지나 라니쉬르마른으로 향했다. 도중에 샤를 7세를 지지하는 민병대가 끊임없이 가담하면서, 8월 초에 이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5,000명으로 불어났다.

존은 프랑스 지원군부터 격파하기로 마음먹고, 프랑스군 사령부에 사절을 보내 야전을 벌이고 싶으니 원하는 전투 날짜와 시각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프랑스 진영은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유리하게 싸울 것이다"라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이후 프랑스군은 도시 남쪽으로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다가 전장 인근에 작은 숲을 따라 진영을 세웠다. 프랑스 사령부는 논의 끝에 군대를 2개로 나누기로 했다. 첫번째 부대는 성을 포위한 적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수행하고, 두번째 부대는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로드리고의 지도하에 적의 포위망이 가장 약한 지점을 돌파하며, 라울 6세 드 고쿠르가 요새에 보급품 및 증원군을 전달하기로 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에 대응해 기병대를 최선두에 세워서 아군 포위망으로 접근하는 적을 분쇄하게 했고, 두 번째 부대는 장 드 빌리에의 인솔하에 요새로 들어가려는 적을 저지하게 했다. 또한 세번째 부대는 요새 공격을 계속 수행하게 했다.

8월 10일, 양군이 교전을 개시했다. 양측 선두에 선 기병대간의 교전은 초원에서 벌어졌는데,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한 채 끝났다. 반면 생트라유와 로드리고가 이끄는 2번째 프랑스 부대는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앞을 가로막은 잉글랜드군과 격돌했다. 이때 잉글랜드군은 온종일 뙤양볕에서 전신 갑옷을 입은 채 있었기에 심각한 열사병에 시달리다가 300명 이상이 쓰러져 사망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전투 전에 숲 속에서 푹 쉬웠기 때문에 상태가 좋았다. 결국 잉글랜드군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적이 요새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진입해야 하는 보루에 올라가서 존의 깃발을 세우고 항전했지만, 프랑스군의 강력한 공세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요새화된 숙영지로 도주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요새에 성공적으로 진입해 보급품과 병력을 지원한 뒤 유유히 철수했다.

잉글랜드군은 이후에도 성벽 기슭에 여전히 진을 치고 버텼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며칠 후 폭풍이 강타하면서 마른 강의 수위가 1.50m 높이로 올라가 범람했고, 잉글랜드 숙영지가 물에 잠겼다. 그래도 잉글랜드군이 계속 버티자, 장 드 뒤누아와 라울 6세 드 고쿠르는 분견대를 이끌고 수로를 통해 파리로 거슬러 올라가서 적의 보급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적이 파리로 향하는 걸 목격한 존은 이러다가 파리가 포위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8월 20일에 포위를 풀고 철수했고, 라니쉬르마른 민병대가 이들을 추격해 많은 잉글랜드 병사를 사로잡고 수많은 보급물자를 탈취했다. 존은 파리 인근에서 라울 6세 드 고쿠르의 분견대와 마주쳐서 전투를 벌이려 했지만, 라울 6세는 이를 회피하고 철수했다.

존은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에 900만 프랑에 달하는 군자금을 쏟아부었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큰 피해만 입은 채 대포와 식량을 전부 버리고 귀환해야 했다. 이후 일드프랑스의 시골 지역 다수가 프랑스군에 넘어갔고, 파리로 향하는 식량 운송은 더욱 방해받았다. 파리에서는 굶주림이 일상이 되었고, 전염병 마저 돌았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점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고, 그중 많은 이가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를 적발하는 대로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어떻게든 민심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전세가 갈수록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존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만회하려면 더 많은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국가 재정에 대한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또한 프랑스에서 세금을 대대적으로 인상하면서 잉글랜드 재무부에 연일 더 많은 돈을 달라고 호소했다.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는 프랑스 국민들은 막대한 세금을 악착같이 뜯어가는 것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잉글랜드에서도 차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던 1432년 아내 안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와 맺었던 결혼 동맹이 끊어져버렸다. 이에 존은 테루안의 주교인 룩셈부르크의 루이의 주선 아래 생폴 백작 피에르 1세의 딸인 자클린 드 뤽상부르생폴과 결혼을 추진한 끝에 1433년 4월 20일 테루안에서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유럽에서 부유하고 강력하기로 유명한 룩셈부르크 가문의 지원을 받아 전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정작 그들에게서 별다른 지원을 받아내지 못했다.

자클린과 결혼한 후, 존은 전비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떠났다. 그동안 프랑스에 남은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동맹을 파기하고 샤를 7세와 화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의 영토를 방어하는 데 주력했다. 존은 의회에 출석한 뒤 의원들로부터 잉글랜드에 머물러서 국정을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그는 자신의 봉사가 왕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최고 의원으로서 이전에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에게 지급되었던 것보다 적은 봉급을 받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의회로부터 군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그는 1433년 12월에 이 직책을 맡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전쟁을 수행하기를 강력하게 원한 그는 1434년에 다시 잉글랜드를 떠나 루앙으로 돌아갔다.

1435년, 잉글랜드 당국은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샤를 7세와 평화 협상을 하기로 결의했다. 존은 이에 반대했지만, 헨리 6세도 평화를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이리하여 프랑스와 잉글랜드, 부르고뉴 간의 평화 협상이 1435년 8월 5일부터 아라스에서 개최되었다. 잉글랜드 협상가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와 샤를 7세의 딸을 결혼시키고 영구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 정도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던 샤를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협상은 중단되었고, 샤를 7세는 부르고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아버지 장 1세가 살해된 사건의 배후자로 의심되는 샤를 7세를 개인적으로 혐오했지만, 잉글랜드 측이 노르망디, 일드프랑스 등 점령지에서 빗발치는 반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국왕 헨리 6세는 너무 어리고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은 중병에 걸려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니, 그들과의 동맹을 이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협상에 진지하게 임했다. 그 결과 1435년 9월 21일,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아라스 협약을 체결했다.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바칠 의무를 면제받았다. 또한 샤를 7세는 필리프의 아버지 용맹공 장의 살인자를 처벌하기로 했다. 그리고 부르고뉴는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에게 군대를 지원하기로 했고, 프랑스는 부르고뉴가 오세르와 볼로뉴 지방, 솜과 페론 강변 도시, 퐁티외, 저지대 국가 등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용인하기로 했으며, 부르고뉴 공국은 톤네르 백국을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했다.

그렇게 프랑스와 부르고뉴가 손잡은 아라스 협약이 체결되기 1주일 전인 1435년 9월 14일, 존은 중병에 시달린 끝에 루앙에서 사망했다. 이후 루앙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존은 두 번 결혼했지만 자녀를 단 한 명도 두지 못했다. 그는 죽기 나흘 전에 자신의 사생아였다가 1434년 8월 30일에 헨리 6세에 의해 적출자로 인정받은 베드퍼드의 리처드에게 라 아예뒤퓌츠 성을 물려주고, 나머지 재산은 아내 자클린에게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 자클린은 남편의 시종무관이었던 리처드 우드빌과 재혼해 훗날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는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낳았다. 한편, 또다른 사생아인 메리는 랑고이랑과 몽페랑의 영주인 베르트랑 3세 드 몽페랑의 아들인 피에르 드 몽페랑과 결혼했다.

존은 상당한 행정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전장에서는 용감하고 뛰어난 전술 역량을 갖춘 명장이었으나, 잔 다르크의 등장 이래 쏟아지는 악재를 어떻게든 감당하려 애쓰다가 끝내 건강을 해쳐 46세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뒤를 이어 어린 왕을 대신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할 권력자들은 하나같이 그보다 못한 역량을 갖췄고, 그나마도 최고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그 사이, 샤를 7세가 이끄는 프랑스 왕국은 부르고뉴 공국과 브르타뉴 공국의 협조 아래 꾸준한 공세를 벌였고, 결국 존이 사망한지 18년만인 1453년에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고 백년전쟁에서 승리했다.


[1] 험프리 드 보훈의 차녀.[2] 1392 ~ 1409,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3세의 부인[3] 1394 ~ 1430,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국왕 에리크의 왕비.[4]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5] 초대 노퍽 백작 토머스 브라더턴의 장녀이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손녀.[6] 이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존은 훗날 오를레앙 공략에 실패한 뒤 헨리 6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포위 결정을 내리도록 조언한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