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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58:26

토머스 바르돌프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토머스 바르돌프
Thomas Bardolf
출생 1369년 12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바르돌프
사망 1408년 2월 19일 (향년 38세)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브래햄 무어
국적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잉글랜드 왕국
부모 아버지 윌리엄 바르돌프, 어머니 아그네스 포이닝스
형제자매 윌리엄, 세실리, 엘리자베스
배우자 아니시아 크롬웰
자녀 앤, 조앤
직위 바르돌프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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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귀족, 군인.

헨리 4세에 대항하는 반란에 참여했다가 실패 후 스코틀랜드로 망명한 후 몰래 귀국했다가 피살되었다.

2. 생애

1369년 12월 22일 바르돌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4대 바르돌프 남작 윌리엄 바르돌프이고, 어머니는 초대 포이닝스 남작 마이클 포이닝스의 딸 아그네스였다. 형제로 윌리엄, 세실리[1], 엘리자베스[2]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노퍽, 링컨셔, 서퍽, 서리 등 이스트 앵글리아 전역의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1386년 1월 29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성년이 될 때까지 제2대 크롬웰 남작 랄프 크롬웰의 후견을 받았다.

1390년 성년으로 인정받아 영지 관리를 시작했고, 1391년 9월 7일에 처음으로 의회에 소환되었다. 1394~1395년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고, 1397년 가스코뉴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으며, 1399년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를 타도하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도왔고, 1400년 헨리 4세에게 "임금이나 보상 없이" 프랑스나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을 제안했으며, 헨리 4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헨리 4세는 그를 의회에 초대하고 자금을 지원했으며, 명예 직을 주는 등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갖춘 그를 계속 자기 편으로 묶어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왕실 보조금 지급이 점점 미뤄지는 것에 불만을 품었고, 헨리 4세가 이스트 앵글리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가 꼬드기자, 그는 결국 헨리 4세에게 반기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1405년 5월, 헨리 4세가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에 맞서기 위해 그를 우스터로 소환했을 때 무시했다. 이에 헨리 4세는 5월 12일에 그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헨리 퍼시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제4대 노퍽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합세하려 했지만, 그 전에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이 5월 29일 쉽턴 무어 전투에서 토머스 모브레이의 군대를 격멸해 버리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이후 랄프 네빌이 이끄는 왕실군이 북쪽으로 이동하자, 그는 헨리 퍼시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 헨리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편에 섰던 몇몇 영주들의 머리를 참수한 뒤 요크 성벽에 전시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의회에서 노섬벌랜드 백작과 그의 모든 작위와 영지 몰수가 확정되었다.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 측에 망명자들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스코틀랜드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두 사람을 잘 대접했다. 그러나 1406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3세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던 파이프 백작 머독 스튜어트와 두 사람을 교환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자, 두 사람은 웨일스로 도망쳐 오와인 글린두르에게 의탁했다.

1406년 헨리 퍼시와 함께 프랑스로 가서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헨리 4세를 타도하고 에드먼드 모티머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할 수 있도록 군대와 자금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 시기에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 파 간의 투쟁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그를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1407년 말 잉글랜드로 몰래 돌아온 두 사람은 요크셔의 보안관인 토머스 로크비에게 의지했다. 스코틀랜드 연대기 작가 바워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오랜 투쟁에 지쳐 사면을 받을 수 있도록 보안관의 도움을 받길 희망했다고 한다.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토머스 월싱햄에 따르면, 보안관을 음모에 끌어들이려 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동일하다. 1408년 2월, 그와 헨리 퍼시는 퍼시 가문이 이전에 소유했던 요크셔의 태드캐스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2월 19일 또는 20일, 그들은 태드캐스터 인근의 브래햄 무어에서 요크셔 보안관 토머스 로크비의 지령을 받은 장병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두 사람의 머리는 베어져 런던 브리지에 공개 전시되었고, 몸통은 4등분 되었다. 이후 그의 유해는 수습되어 미망인에게 넘겨졌다.

3. 가족



[1] 기사 브라이언 스태플턴의 부인[2] 제5대 스케일스 남작 로버트 스케일스와 초혼, 우스터 백작 토머스 퍼시의 아들인 헨리 퍼시와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