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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04:14:28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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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ACD><colcolor=#000000> 보헤미아 왕국 베드르지흐의 왕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파일:Elizabeth,_Queen_of_Bohemia_by_Gerrit_van_Honthorst.jpg
이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출생 1596년 8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 파이프 던퍼믈린 궁전
사망 1662년 2월 13일 (향년 65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장례식 1662년 2월 17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1613년 결혼 / 1632년 사망)
자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카를 1세 루트비히, 엘리자베트, 루프레히트, 모리츠, 루이제 홀란디네, 루트비히, 에두아르트, 헨리에테 마리, 요한 필리프 프리드리히, 샤를로테, 조피, 구스타프 아돌프
아버지 제임스 1세
어머니 덴마크의 아나
형제 오빠 헨리, 여동생 마거릿, 남동생 찰스 1세, 둘째 남동생 로버트, 둘째 여동생 메리, 막내 여동생 소피아
서명 파일: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결혼2.3. 보헤미아의 왕비, 그리고 망명2.4. 말년
3. 가족
3.1. 조상3.2. 자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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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의 국왕 제임스 1세의 장녀이자 찰스 1세의 누나. 그녀의 외손자 중 한 명이 하노버 왕조의 시조가 되는 조지 1세이다.

팔츠 선제후국선제후이며 보헤미아 왕국국왕프리드리히 5세의 아내이다. 이와 관련해서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2.1. 유년기

1596년에 던퍼믈린 궁전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아나의 장녀로 태어났다.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이름을 따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1603년에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하여 아버지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전체를 지배하는 군주가 되자, 6살의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로 향했다. 잉글랜드에서 아버지의 명에 따라 해링턴 남작 내외 아래에서 양육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신학, 역사, 음악, 무용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12살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했고 말솜씨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독서를 좋아해 문학적 소양이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제임스 1세는 여러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귀족들이 보기에 가장 군주로 적합한 인물상이었다. 1605년에 가이 포크스를 실행범으로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 귀족들이 개신교인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이 있었다. 그들의 계획은 먼저 상원의회 지하에 대량의 흑색화약을 매설하여 왕을 폭사시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엘리자베스를 납치해 여왕으로 옹립한 뒤 가톨릭교도 군주로 키우려 했다. 암살 시도는 밀고로 인해 실패로 끝났고 관련 인물들은 체포되었다.

2.2. 결혼

엘리자베스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많은 혼담이 오고갔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브리튼섬 전역을 지배하는 제임스 1세는 자신의 장녀를 일국의 군주에게 시집보내고 싶어했다. 제임스 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를 눈여겨보고 있었으나 신교도 군주의 딸이 가톨릭 군주에게 시집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었다. 다음으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적합한 남편감으로 물망에 올랐다. 프리드리히 5세는 개신교(칼뱅파) 신자였으며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집안 출신이었다. 1613년 2월, 엘리자베스와 프리드리히 5세는 잉글랜드 런던 화이트홀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엘리자베스는 남편과 하이델베르크에서 살았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금슬이 매우 좋았으며 사이에서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2.3. 보헤미아의 왕비, 그리고 망명

1617년에 합스부르크 가문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역시 선거군주제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의 1순위 후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페르디난트 2세는 골수 가톨릭교도로 개신교도를 잔인하게 탄압하는 인물로 유명했다. 결국 보헤미아인 귀족들은 1619년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에서 개신교 교회건설을 방해하던 친 가톨릭 성향 관료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린 후, 페르디난트의 폐위를 선언하고, 개신교 신자 중 유력 인물인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고심 끝에 보헤미아로 향했다. 1619년 11월에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는 프라하성의 성 비타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문제는 황제선거 하루 전에 알려진 페르디난트의 보헤미아 왕위 폐위 소식을 듣고 다른 선제후들이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여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 국왕 자격으로 선거권을 행사했고, 프리드리히 5세의 대표도 대세에 밀려 페르디난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하고 말았다. 페르디난트 2세는 빠르게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형세는 프리드리히 5세에게 좋지 않게 흘러갔다. 페르디난트 2세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의 명장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에스파냐의 지원이 있었다. 반면 프리드리히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제후들과 보헤미아인의 민심을 얻지 못했다. 루터파가 다수인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영주들은 프리드리히 5세가 칼뱅파인데다가 자신들과 의논도 하지않고 보헤미아 왕위를 덥석 받아들인 것에 불쾌감을 표하며 지지를 거부했다. 그리고 보헤미아의 귀족들에게 있어 왕비 엘리자베스는 껄끄러운 존재였는데, 엘리자베스는 여권이 강했던 잉글랜드의 공주였기에 정치에 참여하려 했던 반면, 보헤미아 사람들에게 있어 여성의 정치 참여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가톨릭이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기위해 신교도들을 지원하던 프랑스 역시 이번에는 프리드리히 5세를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상황이 암울하자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를 뒤에서 '겨울왕', '겨울왕비'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의미였다. 이들은 그해 겨울은 무사히 넘겼으나 결국 다음해 겨울이 오기전인 1620년 11월 8일, 빌라호라(Bílá hora)[1]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은 제국군에게 패배하였다.

팔츠 선제후국은 이미 스페인 도로(Camino Español)를 건너온 스페인군에게 점령당했고, 제국추방령을 당한 프리드리히 5세와 엘리자베스는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프리드리히 5세의 외가인 네덜란드 헤이그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은 안전했지만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부부는 망명생활을 할지언정 결코 페르디난트 2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1629년,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의 전승행사에 참여하려고 여행하다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맏아들 하인리히 프리드리히가 익사했고, 프리드리히 본인은 구조되었으나 이후로 건강을 크게 해치고 말았으며, 결국 1632년 10월에 병석에서 사망했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식음을 전폐하며 매우 슬퍼했다. 그녀의 남은 아들들은 네덜란드와 어머니의 나라인 잉글랜드 왕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그녀의 동생 찰스 1세잉글랜드 내전을 겪었고, 그들은 처음엔 외삼촌 찰스의 편에서 싸웠지만, 찰스 1세의 삽질이 계속되자 결국 편이 갈려 싸우게 되었다. 결국 1648년에 의회파를 지지했던 차남 카를 루트비히가 팔츠 선제후 자리를 되찾았지만, 엘리자베스는 헤이그에 머물렀다. 한편 마지막까지 찰스를 지지했던 그녀의 셋째아들 루프레히트는 오늘날 루퍼트 왕자의 눈물로 유명하다.

2.4. 말년

남편 사후 엘리자베스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아이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있던 10명의 자식들 중 4명의 장례식을 봐야했다.

1660년 엘리자베스의 조카 찰스 2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1661년에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이듬해 런던에서 폐렴으로 인한 폐출혈로 사망하였다.

3. 가족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colbgcolor=#fff3e4,#331c00> 제임스 1세
(James I)
<colbgcolor=#ffffe4,#323300>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Matthew Stewart, 4th Earl of Lennox)
마거릿 더글러스[2]
(Margaret Douglas)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Mary, Queen of Scots)
제임스 5세
(James V)
기즈의 마리
(Marie of Guise)
덴마크의 아나
(Anne of Denmark)
프레데리크 2세
(Frederick II)
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Dorothea of Saxe-Lauenburg)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
(Sophie of Mecklenburg-Güstrow)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 공작 울리히 3세
(Ulrich III, Duke of Mecklenburg-Güstrow)
덴마크의 엘리사베트[3]
(Elizabeth of Denmark)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팔츠의 공세자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Heinrich Friedrich, Hereditary Prince of the Palatinate)
1614년 1월 1일 1629년 1월 7일
2남 카를 1세 루트비히
(Karl I. Ludwig, Elector Palatine)
1617년 12월 22일 1680년 8월 28일 헤센카셀의 샤를로트
슬히 1남 1녀[4]
마리 루이제 폰 데겐펠트
슬하 8남 5녀
엘리자베트 홀란더 폰 베르나우
슬하 1남
1녀 허포드의 수녀원장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Elisabeth, Abbess of Herford Abbey)
1618년 12월 26일 1680년 2월 11일
3남 컴벌랜드 공작 루프레히트 공자
(Prince Rupert of the Rhine, Duke of Cumberland)
1619년 12월 17일 1682년 11월 29일
4남 모리스 공자
(Prince Maurice of the Palatinate)
1621년 1월 16일 1652년 9월 1일
2녀 루이제 홀란디네 공녀
(Princess Louise Hollandine of the Palatinate)
1622년 4월 8일 1709년 2월 11일
5남 루트비히 공자
(Prince Ludwig of the Palatinate)
1624년 8월 21일 1624년 12월 24일
6남 에두아르트 공자
(Prince Edward of the Palatinate)
1625년 10월 5일 1663년 3월 10일 안나 곤차가
슬하 3녀
3녀 헨리에테 마리 공녀
(Princess Henriette Marie of the Palatinate)
1626년 7월 17일 1651년 9월 18일 라코치 지그몬드[5]
7남 요한 필리프 프리드리히 공자
(Prince Johann Philipp Friedrich of the Palatinate)
1627년 9월 16일 1650년 12월 16일
4녀 샤를로테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the Palatinate)
1628년 12월 19일 1631년 1월 14일
5녀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피
(Sophie, Electress of Hanover)
1630년 10월 14일 1714년 6월 8일 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슬하 6남 1녀[6]
8남 구스타프 아돌프 공자
(Prince Gustavus Adolphus of the Palatinate)
1632년 1월 14일 1641년 1월 9일

4. 여담

엘리자베스의 5녀인 팔츠의 조피하노버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했다. 조피의 아들인 게오르그 루트비히는 영국 국왕으로 추대되어 조지 1세가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아들 팔츠 선제후 카를 루트비히는 수많은 자식을 두었다. 카를 루트비히는 그중 딸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에게 시집보냈다.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외손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프란츠 1세이며, 그는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상속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또 그들의 자손이 여러 유럽 왕실과 혼사를 맺으면서,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혈통은 유럽 왕실 전역으로 이어졌다.

[1] '하얀 산'이라는 뜻이어서, 국내에선 '백산 전투'라고 번역되기도 한다.[2] 헨리 7세의 장녀 마거릿 튜더가 두번째 남편인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3] 프레데리크 1세의 딸.[4] 카를 2세, 오를레앙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5] 트란실바니아 공 라코치 죄르지 2세의 동생이다.[6] 조지 1세, 프로이센의 왕비 조피 샤를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