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3-03 18:59:19

존 세인트 존(바싱 기사)

성명 존 세인트 존
John St John
생몰년도 미상 ~ 1302년 9월 6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햄프셔 바싱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로크메이븐
아버지 로버트 세인트 존
어머니 아그네스 칸틸루페
아내 엘리스 피츠피어스
자녀 존, 에드워드, 아그네스
직위 바싱의 기사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 참여했다.

2. 생애

기사 로버트 세인트존과 베드퍼드셔의 제2대 이튼 브레이 남작 윌리엄 드 칸틸루페의 딸 아그네스 칸틸루페의 아들이다. 1267년 아버지가 삼아한 뒤 버크셔, 켄트주, 서식스워릭셔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다. 그는 제2차 남작 전쟁 시기에 헨리 3세를 시종일관 지지했고, 그 대가로 1269년 내전 동안에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1272년 국왕이 사망한 후, 그는 당시 십자군 원정을 벌이느라 시리아에 있던 후계자 에드워드 왕자에게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의회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1276년 웨일스 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에드워드 2세에게 충성 맹세하지 않는 걸 기회로 삼아 그에게 반역 혐의를 적용해 유죄를 선고한 의회에 참석한 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1277년과 1282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다. 1283년, 그는 슈루즈버리 의회에 참석해 에드워드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된 다피드 압 그리퍼드를 반역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슈루즈버리 의회에 참여했다. 1286년과 1289년 사이에 에드워드 2세가 아키텐 공국을 간 동안, 존은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3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협상애 참여했고, 1288년 아들 존을 알리폰소 3세에게 인절로 보내 살레르노의 샤를 왕자의 석방을 보장했다.

1289년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1290년 5월 의회에 참석했으며, 1290년에서 1292년 사이에 추가적인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하나는 타라스콩 으로 가서 나폴리와 아라곤 왕국 사이의 에드워드의 중재를 계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로마에 있는 교황 니콜라오 4세에게 파견되어 십자군 문제를 다루고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에 대한 에드워드 1세의 중재에 대해 보고했다. 1292년 12월 에드워드 1세의 지명으로 스코틀랜드 국왕이 된 존 발리올이 등극했을 때, 그는 유아인 파이프 백작 던차드 4세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293년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관계가 악화하자, 존은 아키텐 공국의 왕실 부관으로서 파견되어 요새를 긴급히 강화하고 식량을 공급했으며, 수비대를 조직했다. 이후 파리에서 협상을 진행하던 에드워드 1세의 동생 랭커스터의 에드먼드는 랑스가 특정 요새를 점령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 소식은 프랑스 사절이 도착했을 때 존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존은 사절을 만나기를 거부해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랭커스터의 에드먼드로부터 확고한 지시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자기가 모은 모든 군수품을 팔아버리고 지정된 지역을 넘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94년,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면전이 발발했다. 영국 원정대가 아키텐의 거점을 탈환하기 위해 출동하자, 존은 이에 대응하고자 아키텐 공국의 세네샬로 선임되었다. 프랑스 함대는 지롱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카오, 부르, 블라이를 점령했지만, 보르도는 성벽이 너무 견호해서 공략이 어렵자 포기하고, 가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리옹을 접수하고, 테오발드는 그곳에 휴식을 취했다가 바욘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1296년 1월 1일 바욘을ㅇ접수하고 프랑스 수비대를 몰아냈으며, 프랑스를 지지하는 시의회 의원들을 체포해 잉글랜드에 포로로 보냈다.

1295년과 1296년, 샤를 드 발루아와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 다르투아의 지휘를 받은 프랑스군이 반격을 감행해 남서쪽 일부 지역을 제외한 아키텐 공국 대부분을 접수했다. 1297년 1월 5일, 존은 잉글랜드의 새로운 사령관인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와 함께 수송대를 이끌고 포위된 벨가르드 마을에 접근했지만, 프랑스군의 매복을 받고 기사10명과 함께 생포되어 파리로 끌려갔다. 그의 몸값은 5,000 파운드로 정해졌는데, 이는 그가 본인 재산 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는 아들 존을 시켜 아키텐에서 돈을 모으도록 했고,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수도자들은 그를 돕고자 자금을 보냈다. 그러나 나머지는 프레스코발디와 부온시뇨리와 같은 이탈리아 은행에서 빌려야 했고, 그는 은행가들에게 자기 영지 4개를 담보로 제공했다.

1299년에 풀려난 그는 플란데런 백국 침공을 계획하기 위해 로체스터에서 열린 의회에 즉시 소집되었지만, 이후에는 해외로 가지 않고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1300년 1월, 그는 애넌데일, 컴벌랜드, 랭커셔, 웨스트모어랜드, 그리고 록스버러셔 까지의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에서 국왕의 부관으로 선임되었다. 1300년, 그는 아들 존과 함께 케어라버럭 공방전을 치르는 에드워드 왕자를 돌보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그는 갤러웨이의 김시인, 덤프리스셔 보안관, 로크마벤 성주를 잇달아 역임해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1301년 1월 링컨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했고, 2월에는 교황청에게 스코틀랜드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고 청원하는 영주들의 집단 서신에 서명했다. 그 해 3월에는 캔터베리에서 잉글랜드-프랑스 평화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휴전을 협상하는 잉글랜드 사절 중 한 명이었다. 1302년 2월 16일 애넌데일과 갤러웨이의 사령관으로서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의 항복을 접수했다. 그 해 7월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에드워드 2세와 접견한 후, 스코틀랜드 국경으로 돌아간 뒤 1302년 9월 6일 로크메이븐에서 사망했따. 사후 햄프셔의 올드 바싱에 있는 세인트 메리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