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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09 20:46:18

성 리틀 휴


파일:Hugh_of_Lincoln_body.jpg
1791년 스위스 출신 화가 사무엘 히에로미무스 그림이 그린 석관 속 성 리틀 휴의 유해.
1. 개요2. 링컨의 소년 휴 살인 사건3. 헨리 3세의 개입4. 사건의 여파

1. 개요

유대인들에 의해 인신공양당했다고 알려진 소년. 공식적으로는 성인으로 시성되지 않았지만, 링컨의 교회 당국에서 성인으로 간주되었고, 반유대주의잉글랜드 왕국에서 기승을 부려 종국에는 유대인들이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2. 링컨의 소년 휴 살인 사건

링컨의 소년 휴는 1246년생이다. 기록상에는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언급되지만,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255년 7월 27일, 휴는 또래 남자아이들과 함께 링컨 시를 돌아다니며 놀았다. 그러나 아이는 이후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 베아트리스가 며칠간 동네를 쭉 돌아다니며 아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좀처럼 찾지 못했다. 이때 그녀는 아들이 또래 유대인 남자아이들과 놀다가 유대인 집에 들어가는 걸 봤다는 이웃 주민의 증언을 듣고, 그 집을 수색하기로 했다.

8월 27일, 베아트리스는 마을 주민들과 함꼐 코핀(Copin)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집으로 들이닥쳤고, 그 집 근처 우물에서 휴의 시신을 찾아냈다. 코핀은 즉각 주민들에게 붙잡힌 뒤 링컨의 주교이자 도시 집행관인 렉싱턴의 존에게 넘겼다. 코핀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자백하는 대가로 사형을 면제받는다는 제안도 받았다. 결국 그는 견디지 못하고 '자백'했는데, 당대 연대기 작가 매튜 패리스는 그가 한 자백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올해(1255년) 사도 베드로바울로의 축일(7월27일) 무렵, 링컨의 유대인들이 휴를 납치했습니다. 그들은 그를 길에서 꽤 떨어진 방에 가두고, 우유 및 어린아이가 먹을 음식을 먹였습니다. 그 후 그들은 유대인들이 사는 잉글랜드의 거의 모든 도시로 사람을 보내어 각 도시에서 그들의 종파의 일부를 링컨에서 열리는 제사에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소년을 숨겼기 때문입니다. 소환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링컨으로 왔고, 모인 후 즉시 링컨의 유대인을 빌라도 대신 재판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빌라도는 모든 사람의 동의 하에 그 소년에게 여러 가지 고문을 가했습니다.그들은 피가 흐르고 그가 완전히 격노할 때까지 그를 때렸고, 가시로 머리를 씌우고, 조롱하고, 침을 뱉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나무칼로 찔리고, 쓸개를 마시게 되었으며, 온갖 접근과 신성모독에 시달렸습니다. 또한 그를 둘러싼 고문자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거듭해서 불렀습니다. 그들은 그를 에워싸고 이를 갈며 온갖 고문을 가한 후, 십자가에 못 박고 창으로 심장을 찔렀습니다.

하지만 휴가 정말로 살해된 게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일부 사료에서는 소년이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져 죽었을 뿐이라고 기술했으며, 코핀이 끔찍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주장하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랙싱턴의 존은 코핀의 증언을 근거로 삼아, 여러 유대인이 코핀의 집에 모여서 소년 휴를 잔인하게 죽인 게 분명하다고 결론내렸다. 당시 링컨에는 많은 저명한 유대인들이 모여서 베레키아 드 니콜의 딸 벨라셋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들은 어린이 휴를 인신공양한 혐의로 대거 체포되었는데, 그 숫자가 90명에 달했다.

3. 헨리 3세의 개입

사건이 발생한 지 한달 후,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는 유대인들이 링컨의 어린이 휴를 납치한 뒤 인신공양했다는 고발을 받자 곧바로 링컨으로 행차했다. 그는 렉싱턴의 존이 '사악한 존재'에게 자백하는 대가로 살 길을 열어준 것을 강력하게 비난한 뒤, 코핀을 말 꼬리에 묶은 채 교수대까지 질질 끌려가게 한 후 교수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리고 체포된 유대인 90명을 런던 탑으로 보내 재판을 기다리게 했다.

당시 휴가 죽기 6개월 전, 헨리 3세는 유대인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리를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에게 넘겼다. 하지만 그는 범죄에 연루된 모든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할 권리를 유지했다. 따라서 90명의 유대인이 유죄 선고를 받을 경우, 그는 그들의 재산을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었다. 유대인 90인은 집단 의식을 통해 휴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이중 18명은 기독교도 배심원의 자비에 자신을 맡기기를 거부하며 재판에 참석하기를 기피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세워진 교수대에 끌려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들의 재산은 왕의 것으로 돌아갔다.

톨레도의 기사 가르시아스 마르티니는 베레키아 드 니콜의 석방을 위해 중재해 왕의 승인을 받았다. 1256년 1월, 도미니코회 수도자의 개입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한 유대인 존이 사면되었다. 남은 71명의 죄수에 대한 재판이 2월 3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렸고, 배심원 48명은 이들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도미니코회 또는 프란치스코회가 콘월의 리처드와 함께 중재했고, 죄수들은 5월에 석방되었다.

사실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140년대에 노리치 출신의 12세 소년 윌리엄이 유대인들에게 붙들려서 숲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베네딕토회 수도자 몬머스의 토머스는 1150년 <노리치의 성 윌리엄의 삶과 기적>(Vita et Passione Sancti Willelmi Martyris Norwicensis)을 출간해 소년 윌리엄이 사후에 여러 기적을 일으켰다며 성인으로 떠받들었다. 현대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이며 소년 윌리엄이 성인으로 숭배되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보지만, 당시에는 많은 민중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이후 몇몇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소년을 납치한 뒤 잔혹하게 고문한 후 십자가형에 처하거나 칼로 여러 차례 찔러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돌았고, 해당 지역 교회들은 이들을 성인으로 떠받들고 순례자들을 받아들였다. 잉글랜드 당국은 이런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사건의 파장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헨리 3세가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9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런던으로 끌고 와서 공개 재판을 거쳐 18명을 처형하기까지 하면서, 소년 휴가 유대인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는 잉글랜드 전역에 빠르게 파졌다.

헨리 3세와 그의 신하인 렉싱턴의 존이 왜 이 이야기를 믿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캐나다의 중세 역사가 게빈 I. 랭뮤어(Gavin I. Langmuir, 1924 ~ 2005)는 렉싱턴의 존이 순교자 휴의 숭배 의식을 전국에 널리 퍼뜨려서 순례자들이 링컨 성당에 몰려들게 해 이득을 챙기려는 의도로 사건을 부풀렸을 거라고 추정한다. 또한 랭뮤어는 헨리 3세가 잘 속고 판단력이 부족하며, 가톨릭 신앙심이 독실했기에, 애초부터 유대교에 대한 반감이 강했을 거라고 본다. 따라서 랭뮤어는 렉싱턴의 존이 "약하고 속기 쉬운 헨리 3세를 선동하여 의식적인 살인 환상에 왕권의 축복을 내리게 했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호주 출신의 영국 민속학자이자 역사가 조셉 제이콥스는 저서 <링컨의 세인트 리틀 휴, 역사, 고고학, 그리고 전설 연구>에서 헨리 3세가 유대인들을 대량 체포하고 처형하기로 결정한 주요 요인으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그가 받은 재정적 이익을 거론했다.

4. 사건의 여파

링컨의 소년 휴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이 종결된 후, 소년 휴가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따르면, 코핀이 휴를 땅에 묻으려고 했을 때, 땅이 시체를 토해내자 우물에 던졌다고 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눈먼 여성이 휴의 유해가 발견된 우물에서 나온 물에 눈을 씻고 시력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에 링컨 대성당 사제들은 휴의 유해를 순교자의 시체인 것처럼 정중하게 다뤄서 링컨 교회에 명예롭게 묻었고, 휴를 기리기 위한 재단을 세웠다. 이후 휴는 정식으로 성인으로 추대될 가장 어린 후보 중 한 명이 되었으며, 그가 납치되어 살해된 날짜로 여겨진 7월 27일은 비공식적으로 그의 축일로 지정되었다.

1290년, 에드워드 1세는 모든 유대인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한다고 선포했다.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이주해야 했는데, 일부는 해적에게 납치었고, 많은 이들은 10월 폭풍으로 인해 재산을 잃거나 사망했다. 왕실은 그들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한 뒤, 궁정 신하와 가족에게 대거 나눠줬다. 이 칙령은 의회로부터 11만 파운드에 달하는 세금을 받기 위한 거래의 일환으로 반포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추방령을 내렸다고 주장했으며, 성 리틀 휴의 무덤을 대대적으로 개조해 잉글랜드인들의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교황청은 소년 휴를 정식으로 시성하지 않았고, 공식적인 가톨릭 순교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의 전통적인 잉글랜드 축일 역시 기념되지 않았다. 하지만 링컨 대성당은 잉글랜드 왕실의 후원 아래 성 리틀 휴 숭배 의식을 널리 퍼뜨렸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을 맞아들이면서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성 리틀 휴의 석관에는 에드워드 1세의 왕비 카스티야의 레오노르를 기념하는 장식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유대인 채권을 대량으로 사고팔아 빚진 사람들의 땅과 재산을 징발해 잉글랜드 민중의 미움을 샀는데, 에드워드 1세는 왕비의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레오노르 왕비의 장식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리틀 휴 숭배 의식은 14세기 중반까지 흥행했지만, 이후로는 쇠퇴했고, 헨리 8세가 종교 개혁을 단행한 뒤 링컨 대성당이 파괴되면서 막을 내렸다. 1790년 링컨 대성당이 복원될 때 3피트 3인치(1m) 길이의 석관이 발견되었고, 그 안에 소년의 해골이 들어 있었다. 당국은 이 석관을 성당 인근에 안장했다. 한편, 성 리틀 휴 사건을 언급하는 발라드가 'Sir Hugh'라는 제목으로 잉글랜드, 스콭르랜드, 프랑스에 유포되어 19세기까지 이어졌으며, 미국에서도 개조된 버전으로 전해졌다.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 중 '수녀원장의 이야기'에서 성 리틀 휴가 언급되었으며, 크리스토퍼 말로는 희곡 <몰타의 유대인>에서 수도자 자코모가 유대인에게 "뭐, 아이를 십자가에 못 박았나?"라고 말하면서 성 리틀 휴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성 리틀 휴 신화는 19세기에도 유럽의 반유대주의 논쟁가들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면서 계속해서 반향을 일으켰다. 20세기에 링컨의 옛 유대인 집단 거주지역의 우물이 '휴의 시신이 발견된 우물'로 광고되었지만, 이 우물은 해당 부지의 관광 명소를 늘리기 위해 1928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링컨셔 예비 학교인 우드홀 스파의 세인트 휴 학교는 1925년에 성 리틀 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학교 배지에는 벽을 넘어가는 공이 그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성 의식이 확산되면서, 성 리틀 휴 사건 역시 반유대주의가 일으킨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1955년, 성공회는 링컨 대성당에 있는 리틀 휴의 옛 제단 자리에 아래의 글이 적힌 기념패를 세웠다.
"성 리틀 휴" 제단의 유적.
유대인 공동체가 기독교 소년들을 "의식적으로 살해"했다는 날조된 이야기는 중세 유럽 전역은 물론 그보다 훨씬 이후에도 흔히 있었다. 이러한 허구는 수많은 무고한 유대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링컨 사건에는 나름의 전설이 있었고, 희생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1255년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기독교 세계에 아무런 영예도 가져다주지 못하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우리의 과거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의 현재 모습을 고쳐 주시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