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존 워건 John Wogan | |
생몰년도 | 미상 ~ 1321년 또는 1322년 | |
출생지 | 웨일스 픽턴의 워건 가문 영지 | |
사망지 | 웨일스 펨브로크 백작령 | |
배우자 | 조앤 픽촌, 마거릿 드 발레 | |
자녀 | 윌리엄, 토스, 존, 바스톨로뮤, 월터, 조앤, 엘레노어 | |
직위 | 아일랜드 보안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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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영지의 보안관.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에드워드 1세와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을 지원했으며,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의 아일랜드 원정에 맞섰다.2. 생애
웨일스 픽턴의 워건 가문 출신이지만,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며, 부모와 형제 자매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다. 그는 웨일스의 픽턴 영주로서 초대 펨브로크 백작 기욤 드 발랑스의 봉신이었다. 1275년 펨브로크 백작 궁정에서 관리로 활동했으며, 1280년에는 아일랜드 웩스퍼드의 관리인이 되었다. 그 후 수년 간 펨브로크 백작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를 섬겼다. 1292년 스코틀랜드 국왕 존 발리올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행사에 참석했다.존 워건은 1282년 또는 1285년에 아일랜드 법원이 설립된 이후 정기적으로 재판관으로 재직했다. 이 법원은 아일랜드의 최종 사법 기관 역할을 했는데, 이 법원의 결정은 잉글랜드 국왕의 판결이나 잉글랜드 왕립법원에서만 뒤집힐 수 있었다. 그는 아일랜드 재판관으로서 1264년에 처음으로 설립된 아일랜드 의회를 이끌었고, 1295년부터 1312년까지 의회를 14차례 소집했다. 1293년 요크셔의 보안관을 맡았고, 1295년 10월 18일 아일랜드 보안관이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 영지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잉글랜드 왕국의 아일랜드에서 이익을 효과적으로 증진했다. 아일랜드 의회는 1297년, 1299년, 1310년에 자체적인 규정을 발표했지만, 이는 지역 문제, 특히 잉글랜드 정착민과 아일랜드 주민 간의 관계에만 국한되었다. 동시에 잉글랜드의 법률은 아일랜드 의회의 명시적인 승인과 간단한 적용을 통해 아일랜드에 도입되었다.
1300년 소집된 아일랜드 의회는 에드워드 1세로부터 스코틀랜드 원정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위해 특별세를 걷는 걸 승인했다. 그 후 아일랜드는 수 년간 잉글랜드 왕국의 스코틀랜드 전쟁 수행에 상당한 지원을 이어갔다. 존 워건이 보안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아일랜드 연간 수입의 거의 절반이 스코틀랜드 전쟁에 쓰이기도 했으며, 워건은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에 속한 아일랜드 기사, 경기병, 궁수 부대 3,500명을 지휘했다. 군대에는 아일랜드의 주요 거물인 존 피츠토머스 피츠제럴드와 피터 드 버밍엄이 포함되었다.
워건은 보안관으로서 잉글랜드-아일랜드 귀족들간의 수많은 갈등을 해결해야 했다. 그는 윌리엄 드 베시와 존 피츠토마스 피츠제럴드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아일랜드 내 잉글랜드 통치력과 관할권의 확대를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현지 게일인 소왕 및 귀족들은 순순히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1308년 5월, 위클로 산맥의 게일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의 전초기지인 케빈 성을 불태웠다. 워건은 이들을 토벌하고자 군대를 일으켰지만, 그 해 6월 글렌말루어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후 에드워드 2세의 총신 피어스 개버스턴이 아일랜드 부총독이 되었고, 개버스턴은 곧 반란을 진압하고 위클로 산맥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1308년 가을, 존 워건은 피어스 개버스턴에게 보안관 직위를 내주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09년 피어스 개버스턴이 왕의 부름을 받아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존 워건은 다시 아일랜드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1309년과 1311년 아일랜드 반군에 대한 군사 작전을 벌였지만, 1312년 4월 워건이 파견한 군대가 테오발드 드 베르됭의 형제들이 이끄는 사병대에게 라우스에서 참패했다. 1313년 4월 테오발드 드 베르됭에게 아일랜드 보안관 작위를 넘기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15년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의 형제 에드워드 브루스가 아일랜드를 침공하자, 잉글랜드 정부는 로저 모티머를 아일랜드의 새로운 왕실 부관으로 선임해 에드워드 브루스를 물리치게 했다. 워건은 로저 모티머의 조언자로서 활동했으며, 게일인 귀족들이 에드워드 브루스를 돕는지를 조사하기도 했다. 1318년 에드워드 브루스가 패사한 뒤, 잉글랜드 정부는 그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킬데어에 있는 라스커피 부지를 비롯한 여러 영지를 수여했다.
워건은 픽촌 성주 윌리엄 픽촌의 딸 조앤과 처음으로 결혼했고, 로버트 드발레의 딸인 마거릿과 두번째로 결혼했다. 그의 자녀의 수와 인명은 기록마다 판이하게 다르지만, 아들로 윌리엄, 토스, 존, 바스톨로뮤, 월터가 있었고, 딸로 조앤, 엘레노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중 존은 아일랜드 재판관을 맡았고, 월터는 아버지의 영지를 계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