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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23:02:31

휴 드 크레싱엄

성명 휴 드 크레싱엄
Hugh de Cressingham
생몰년도 미상 ~ 1297년 9월 1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사망지 스코틀랜드 왕국 스털링 성 인근
아버지 윌리엄 드 크레싱엄
자녀 앨리스
직위 스코틀랜드 재무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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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재무부 관리.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스코틀랜드의 재무관을 맡았다가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윌리엄 드 크레싱엄이라는 지주의 사생아로, 일찍이 성직자가 된 뒤 재무 관리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서 여러 교회 성직을 맡아서 교구 재정 관리를 수행했고, 이내 잉글랜드 왕실 재무부 관리가 되었고, 핸던과 핀칠리에 작은 토지를 구매했다. 1296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존 발리올을 무너뜨리고 스코틀랜드를 장악한 뒤, 제6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을 스코틀랜드 총독으로 삼고, 크레싱엄을 스코틀랜드 재무관으로 세웠으며, 윌리엄 옴스비를 스코틀랜드 대법원장으로 세웠다. 하지만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요크셔에 있는 자기 영지에 머물렀다. 그 대신, 크레싱엄이 스코틀랜드 행정부의 실제 관리를 맡았다.

그는 곧 스코틀랜드인들에게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 점령과 압제를 상징하는 인물로 낙인찍혀, 그들의 증오를 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된 양모를 양을 키운 이들에게 어떠한 보상도 주지 말고 가장 가까운 항구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이 양모를 수출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은 잉글랜드 왕실이 온전히 거머쥐었고,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여기에 행정부 운영에 필요한 세금을 악착같이 거둬들이고, 저항하는 자들을 강제로 가두고 고문했다.

1297년 여름,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잉글랜드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크레싱엄은 노섬벌랜드 주의 볼튼에 있었다. 그는 런던에 서신을 보내 스코틀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통치가 완전히 붕괴된 것 앝으며, 스코틀랜드 북부의 상황이 어떤지 아무도 모르니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왕실은 봉기를 진압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특별세 2,000파운드를 거둬들였다. 이후 크레싱엄은 존 드 워렌과 함께 잉글랜드 기사, 웨일스 궁수, 대규모 보병대를 소집했다. 그 결과 7월에 기병 300명과 보병 10,000명이 베릭에 집결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내부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탈영병이 끊임없이 발생했고, 9월 무렵에는 보병의 수가 5,000~6,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는 기병 300명과 보병 8,000명을 추가로 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휴 드 크레싱엄은 현재 확보한 병력 만으로도 반란을 진압하기 충분하다고 여겼고, 군자금을 절감하기 위해 거절했다.

이렇게 병력을 소집한 뒤, 휴 드 크레싱엄은 9월 초에 존 드 워렌과 함께 스털링 성으로 진군했다. 그는 성직자 신분이었지만 사령관 중 한 명으로서 갑옷을 입었다. 스털링 성 인근을 흐르는 포스 강 북쪽 기슭에는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이 주둔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대집사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4대 렌녹스 백작 맬컴과 합류한 뒤, 9월 10일 지원군을 데려오고 스코틀랜드군에게 항복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겨 보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이 항복을 거부하자, 존 드 워렌은 무력으로 적군을섬멸하기로 했다.

잉글랜드 편에서 복무하던 스코틀랜드 기사 리처드 런디는 군대의 일부와 함께 서쪽의 넒은 여울을 통해 강을 건너 스코틀랜드군을 뒤에서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휴 드 크레싱엄은 아침에 지연이 있었으므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존 드 워렌은 스코틀랜드 반란군은 오합지졸일 뿐이니 정면 돌격으로도 손쉽게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전군에 다리를 건너라는 명령을 내렸다. 크레싱엄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초대 트윙 남작 마마듀크 트윙과 함께 기병 150명과 보병 1,800명을 이끌고 스털링 다리를 먼저 건너갔다. 이때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가 선제 공격을 명령했고, 스코틀랜드 보병들은 언덕을 내려와 초원을 건너 댐을 향해 달려갔다.

그 후 일부 스코틀랜드 장병들이 쉴트론[1]을 결성한 뒤 다리로 진군해 길목을 막아버렸고, 이미 포스 강 북쪽 기슭으로 건너간 잉글랜드군은 더 이상 지원군을 받지 못한 데다 전투 대형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적의 맹공에 시달렸다. 그 결과 학살이 일어났고, 휴 크레싱엄을 비롯한 상당수 지휘관들이 피살당하고 기병 100명과 보병 1,500명 가량도 사살되었다. 마마듀크 트윙을 비롯한 소수의 장병 만이 적의 포위를 뚫고 강을 건너 후퇴할 수 있었다. 수탈을 자행해 스코틀랜드인들의 증오를 받았던 휴 크레싱엄의 유해는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가죽이 벗겨지는 등 온갖 모욕을 당했다. <라네코스트 연대기>에 따르면, 윌리엄 월레스는 그의 가죽 조각으로 칼띠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기사 로버트 드 아스팔과 결혼해 자식을 낳은 딸 앨리스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1] Shiltron: 최전방에 창병이 있는 조밀한 원형 대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