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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8 21:14:07

제임스 스튜어트(제5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이름 제임스 스튜어트
James Stewart
출생 1260년
스코틀랜드 왕국 웨스트로디언 베스케이트 성
사망 1309년 8월 16일 (향년 48~49세)
스코틀랜드 왕국 웨스트로디언 베스케이트 성
아버지 제4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알렉산더 스튜어트
어머니 잔 맥로리
형제 , 엘리자베스, 앤드류
배우자 세실리 드 던바, 뮤리얼 스트라선, 에지디아 드 버러
자녀 월터, 에지디아, 존(사생아), 앤드류(사생아), 제임스(사생아)
직위 제5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에 맞섰다.

2. 생애

재4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알렉산더 스튜어트와 뷰트의 영주 제임스 맥로리의 딸인 조앤 맥로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 엘리자베스[1], 앤드류[2]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1252년경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순례를 가서 대야고보를 참배했는데, 이것이 그가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흔하지 않은 이름이었던 제임스라는 이름을 받은 이유였을 것이다.

128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스코틀랜드 내 스튜 어트 가문의 광대한 영지와 스코틀랜드 대시종장을 계승했다. 대시종장은 실권이 딱히 없는 명예직이었지만, 이 직함을 보유한 자는 스코틀랜드 정부 내각에서 의원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스튜어트 가문의 영지에는 에이셔의 랜프루셔, 뷰트, 카일 스튜어트, 티비엇강 유역, 로더 및 로디언 내 영지가 포함되었다.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의 고문을 맡언 그는 1286년 국왕이 야간에 무리하게 이동하던 중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사태가 벌어지자 스코틀랜드 의회에 의해 스코틀랜드의 여섯 수호자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고, 알락산더르 3세의 유일한 후계자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제임스는 초기엔 스튜어트 가문과 우호적인 관계인 브루스 가문을 밀어주기로 마음먹고,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1286년 9월 20일, 그는 다른 영주들과 함께 턴베리 성에서 회의를 열고 로버트 브루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라이벌인 발리올 가문의 기세도 만만치 않은 데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중재에 나서자, 결국 그들은 마르그레트가 여왕으로 등극하는 걸 용인하기로 했다. 하지만 마르그레트가 1290년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다가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하면서 왕위 계승이 완전히 불확실해지자, 제임스는 다시 로버트 브루스를 지지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들을 일일이 접견하고 스코틀랜드 국왕을 정하게 된 에드워드 1세의 주재로 열린 법정에서 브루스 측 대표로 활동했다.

1292년,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브루스 대신에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선택했다. 제임스는 이 결정이 불만스러웠지만, 일단 승복하고 에어셔의 보안관을 맡았다. 1293년 존 발리올이 새로운 보안관구를 설립한 후, 그는 아가일 남쪽의 넓은 지역의 보안관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뷰트, 컴브레이스, 킨타이어, 아란 등지가 포함되었다. 1293년 8월 의회에서, 그는 왕위 계승을 주장한 로버트 브루스의 아들인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가 장남인 로버트 브루스에게 캐릭 백작령을 이양하는 걸 지지했다.

1295년, 존 발리올과 스코틀랜드 의회는 에드워드 1세의 지나친 간섭에 맞서기 위해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기로 결의했다. 제임스는 1295년 7월 초에 12명으로 구성된 국무원의 일원을 맡았으며, 1296년 2월 의회에서 프랑스와의 동맹을 승인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1296년 3월 스코틀랜드로 진격했다. 당시 제임스는 중요한 국경 요새인 록스버러 성을 지켰지만, 그 해 4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완패하자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5월 5일 항복했다. 5월 13일, 에드워드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존 발리올과 에드워드 1세의 평화 협상을 주도했다. 그 후 덤버튼과 커킨틸로크 성의 항복을 중재했으며, 초대 얼스터 백작 월터 드 버러의 딸이자 제2대 얼스터 백작 리처드 드 버러의 자매인 에지디아와 결혼함으로써, 에드워드 1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아일랜드 귀족 가문과 인맥을 맺고 아일랜드 내 영지를 지참금으로 받았다.

1297년 윌리엄 월레스로우랜드에서 반란을 준비할 때, 그는 월레스를 은밀히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초대 퍼시 남작 헨리 퍼시와 초대 클리퍼드 남작 로버트 드 클리퍼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애넌데일과 니스데일을 침공했을 때, 그는 막강한 전력을 갖춘 토벌대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윌리엄 르 하디와 함께 어바인에서 항복했다. 이후 표면적으로는 잉글랜드 측 편에 섰으며, 스털링 다리 전투 전에 제5대 레녹스 백작 맬컴과 함께 존 드 워렌이 이끄는 잉글랜드 진영을 찾아가서 스코틀랜드 측 가신들에게 항복을 설득하고 싶다고 청했다. 존 드 워렌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두 사람은 시간을 끌다가 돌아와서 가신들이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그 사이 전투 대형을 결성한 윌리엄 월레스와 앤드류 모레이는 이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대파했다. 제임스는 잉글랜드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레녹스 백작 맬컴과 함께 도망치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타격을 입혔다.

그 후 윌리엄 월레스 편으로 완전히 돌아선 그는 1298년 폴커크 전투에서 에드워드 1세에 대적했지만, 압도적인 적 기병대의 공세에 직면하자 도주했다. 이때 그의 형제인 본킬의 존 스튜어트는 전사했다. 1298년 8월 31일, 에드워드 1세는 스튜어트 가문의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하고, 알렉산더 린제이 경에게 수여했다. 1299년, 제임스는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셀커크 숲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 후 개최된 피블스 회의에서 브루스 가문과 코민 가문 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1302년 가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원조를 호소하기 위해 파리로 파견된 사절단의 대표를 맡았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1303년 5월 잉글랜드와 평화협악을 맺었고,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 후 스코틀랜드로 돌아간 그는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판단하고 1304년 2월 거의 모든 스코틀랜드 귀족과 함께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의 영지를 쉽사리 돌려주지 않았지만, 윌리엄 월레스가 처형된 후 그가 자신 앞으로 나아가 납작 엎드리며 자비를 청하자 마음을 바꿔 1305년 말 영지를 돌려주기로 했다.

1306년 3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가 스콘에서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 즉위하자, 제임스는 즉각 지지를 표명했다.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 1세는 스튜어트 가문의 영지를 재차 몰수해 링컨 백작 헨리 드 라시에게 수여했다. 그 해 6월 메스번 전투에서 참패하고 로버트 1세가 멀리 도주한 뒤, 제임스는 1306년 10월23일에 다시 에드워드 1세에게 항복했고, 영지를 돌려받았다. 그 후 그는 잠자코 지내다가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재정복을 순조롭게 이어가자 1309년 3월 다시 편을 바꿔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 세인트앤드루스에서 개최한 첫번째 스코틀랜드 의회에 참석했다. 1309년 7월 16일에 사망했고, 페이즐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 ~ 1288년 이전, 윌리엄 르 하디의 부인, 제임스 더글러스의 어머니.[2] ? ~ ?,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