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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로버트 위셧 Robert Wishart | |
출생 | 1240년경 | |
스코틀랜드 왕국 에버딘셔 로렌스커크 | ||
사망 | 1316년 11월 26일 (향년 75~76세) | |
스코틀랜드 왕국 글래스고 | ||
직위 | 글래스고 주교 |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주교.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지배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헌신한 종교적 지도자다.2. 생애
1240년경 스코틀랜드 에버딘셔 로렌스커크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앵거스와 미언스 등지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앵글로-노르만 씨족이다. 로버트는 1273년부터 1279년까지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였던 윌리엄 위셧의 조카 또는 사생아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일찍이 성직자가 되었고, 1267년 로디언의 주교가 되었다. 1271년 이전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어느 대학을 다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271년 윌리엄 위셧을 새로운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 선출한 교회 캐논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윌리엄 위셧의 영향으로 같은 해에 글래스고 교구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1273년 1월 29일, 그는 던블레인 주교 프로방스의 로베르와 다른 2 명의 스콭르랜드 주교에 의해 에버딘의 주교로 성임되었다.1270년대, 로버트는 글래스고 대성당의 새로운 본당 완공을 위해 활동했으며,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 1275년, 교구에 기부한 금액을 놓고 그와 글래스고 대성당의 교구장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글래스고에서 성직자 공석을 채울 때 여러 친척을 대거 발탁했다. 글래스코 대성당 수석사제로 토머스 위셧을, 존 위셧을 글래스고 수석 사제로, 윌리엄 위셧을 테비오트데일의 정경으로 세웠다. 이중 존 위셧은 로버트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1286년 3월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가 사고사한 후, 당시 3살이었던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노르웨이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6명의 섭정 위원회를 설립해 마르그레트를 대신해 나라를 통치하게 했는데, 로버트는 이 위원회에 참여한 주교 2명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대시종장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8대 파이프 백작 던컨과 함께 제5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의 지지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머지 세 수호자는 존 발리올을 지지했기 때문에, 섭정 의회에서 두 라이벌 집단 간의 갈등이 심화했다.
이후 수년간 여섯 수호자 중 2명이 사망했지만, 로버트와 다른 세 명은 새로운 수호자를 임명하지 않기로 했다. 스코틀랜드 내의 권력 다툼을 해소하기 위해, 그들은 왕위 계승자인 마르그레트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결혼시키고 싶어했다. 1290년, 로버트는 노샘프턴 조약에서 결혼 조건을 협상한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1290년 10월, 마르그레트가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중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리하여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1290년 말이나 1291년 초, 일부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 국왕을 정해달라고 욫어했다. 1291년 5월 10일, 로버트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사절단이 노럼에서 에드워드 1세와 접촉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들에게 자신이 스코트랜드의 주권자로서 스코틀랜드 국왕을 봉신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에드워드 1세는 사절단에게 10일 안에 답변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에드워드 1세가 얼른 답변하라고 압박을 가하자, 로버트는 지도자 없는 국가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왕에게 걸맞지 않다고 일침을 날렸다. 그 후 스코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1세와 협정을 맺기로 했다. 1291년 6월 14일, 로버트와 둔켈드의 크램베스 주교는 마침내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결정하기 위해 잉글랜드 왕을 스코틀랜드의 주권자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로버트 브루스 측 대표로서 베릭에서 잉글랜드 국왕의 주관하에 스코틀랜드 왕위 주장자들 중 한 사람을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의회에 참석했다. 11월 6일, 로버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 지명한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로버트가 그 직후 스콘에서 열린 즉위식에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존 발리올이 통치를 행사할 때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96년 2월 21일 던펌린에서 열린 의회에서, 로버트는 프랑스 왕국과 스코틀랜드가 연합해서 스코틀랜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에드워드 1세의 압제로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걸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 브루스 가문과 갈등을 빚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고, 에드워드 1세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갔다. 1296년 4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완패한 뒤, 존 발리올은 폐위되었다. 로버트는 1296년 7월이나 8월에 에드워드 1세에게 복종한 스코틀랜드 주교 3명 중 한 사람이었다.
1297년 여름, 로버트는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 윌리엄 르 하디와 함께 윌리엄 월레스의 반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군사적 우월성을 고려한 그는 1297년 7월 7일 어바인에서 잉글랜드군에 항복했고, 인질로 자신을 보내겠다고 제안해 승인을 받은 뒤 록스버러 성에 투옥되었다. 윌리엄 월레스는 로버트가 반란을 포기한 것에 크게 분노해 위셧의 집을 약타랗고 불태웠으며, 로버트의 사생아로 알려진 아이들을 납치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윌리엄 월레스는 앙크러멩 있는 주교 궁전을 공략해 로버트를 풀어주려 했지만, 로버트가 록스버러에 갇혀 있어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한다.
로버트는 1300년 9월까지 잉글랜드 포로로 남아있다가 풀려났다. 그 후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수호자들이 이끄는 저항 세력을 계속 지원했다. 아마도 1302년 이전에 잉글랜드군에게 지배당한 글래스고를 떠나 잉글랜드의 지배를 거의 받지 않던 스콭르랜드 북부로 물러났다. 하지만 1304년 2월 존 코민 3세 및 대다수 반군 귀족들이 에드워드 1세에게 투항하자, 그도 항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그를 2~3년간 해외 망명 생활을 한 뒤, 트렌트 강 남쪽의 잉글랜드 땅에 남도록 했다. 그는 1305년 2월과 3월에 로버트 브루스, 존 모브레이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잉글랜드 의회에 잉글랜드 왕의 고문으로 참석했다.
1305년 5월 스코틀랜드로 귀환한 로버트 위셧은 로버트 브루스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과 접촉했다. 1306년 2월 로버트 브루스가 덤프리스 교회에서 바데녹 영주 존 코민 3세를 살해하고 3월에 스코틀랜드 국왕 로버트 1세로서 스콘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자, 로버트는 즉시 로버트 1세를 지지했다. 그는 교회에서 암살을 저질러서 파문당한 로버트 1세에게 사면을 내렸고, 대관식을 위해 존 발리올의 숨겨진 왕실 깃발과 예복을 보냈다. 그가 로버트 1세의 대관식에 참여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스콘이 세인트앤드루스 교구의 영토에 있었고 램버튼 주교가 대관식에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사료에 따르면, 그는 대관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1306년 5월, 로버트 위셧은 잉글랜드군이 점유하고 있던 커킨틸로크 성을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때 그는 대성당의 종탑을 수리하기 위해 잉글랜드에서 보냈던 목재를 사용하여 키르킨틸로크 성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 무기를 제작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파이프로 이동하여 쿠퍼 성을 공격했다. 공격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는 1306년 6월 8일 메스번 전투 직전에 쿠퍼 성 또는 그 근처에서 잉글랜드군에게 생포되었다. 그 후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윌리엄 램버튼, 스콘 수도원장과 함께 사슬에 묶인 채 잉글랜드로 끌려왔다. 그는 뉴캐슬에서 열린 재판에서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성직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사형은 모면했지만, 잉글랜드 남부의 포트체스터 성에 감금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로버트 위셧을 파문당한 로버트 브루스를 사면한 위증죄 및 기타 범죄 혐의로 고발했고,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그를 주교 직위에서 해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은 교황청에서 직접 재판을 벌이고 나서 결정하겠다며 즉시 처벌하길 거부했고, 1308년 8월 비엔 공의회에 참석할 세 명의 스코틀랜드 주교 중 한 사람으로 로버트 위셧을 임명했다. 로버트 위셧은 1308년 11월 25일 푸아티에에서 아르노 주교에 의해 교황 특사에게 인계되었다. 1310년, 로버트 위셧은 교황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소송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새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교황청에 그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스티븐 시그레이브를 글레스고 주교로 임명해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12년 로버트 위셧은 잉글랜드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가벼운 감금 생활을 하면서도 글래스고 주교로 인정받았다.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완승을 거둔 후, 늙고 시력을 잃은 로버트 위셧은 먼저 요크로 보내졌고, 10월 2일에는 칼라일로 보내졌다. 1315년 2월 중순, 그는 스코틀랜드 진영에 사로잡힌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 및 여러 포로들과 교환되었다. 1316년 11월 26일에 사망했고, 글래스고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