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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0:46:41

마이클 드 라 폴(초대 서퍽 백작)

성명 마이클 드 라 폴
Michael de la Pole
생몰년도 1330년경 ~ 1389년 8월 6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윌리엄 드 라 폴
어머니 캐서린 노리치
형제 에드먼드, 월터, 토머스, 블랜치, 마가렛
아내 캐서린 윙필드
자녀 마이클, 토머스, 윌리엄, 리처드, 존, 앤
직위 서퍽 백작, 잉글랜드 대법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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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리처드 2세의 총신으로서 잉글랜드 대법관까지 맡았지만 무능과 직권 남용을 범했다는 이유로 심한 비난을 받은 끝에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다.

2. 생애

양모 상인이었다가 백년전쟁에 임하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한 공으로 재무장관 남작에 올랐던 윌리엄 드 라 폴과 기사 월터 드 노리치의 딸인 캐서린 노리치의 장남이다. 그의 형제 중 에드먼드는 1387년 칼레 함대 사령관을 재임했다. 마이클은 흑태자 에드워드곤트의 존 휘하의 군대에 들어가 프랑스에서 벌어진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377년 리처드 2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한 뒤 왕의 총애를 받고 왕실의 외교 활동을 전담했고, 리처드 2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딸인 보헤미아의 안나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데 기여했다. 1383년 잉글랜드 대법관로 선임되었고, 1385년 8월 초대 서퍽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법관이 된 뒤 논란이 많은 행보를 보였다. 리처드 2세에게 숙부 곤트의 존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하니 어떻게든 깎아내려야 한다고 끊임없이 촉구해 왕실간의 불화가 심화되게 만들었으며, 리처드 2세가 스코틀랜드 원정에 전력을 기울이지 말고 프랑스와 화해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스코틀랜드, 프랑스와 이렇다할 합의를 맺지 못했고, 수세에 몰린 전세를 바꾸기 위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과중한 특별세를 계속 부과해 민중의 분노를 샀다.

1386년 10월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열렸을 때, 마이클은 여름부터 잉글랜드를 위협하는 프랑스의 침공 가능성에 맞서 방어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전례없이 많은 보조금을 헌납하라는 요구를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하원은 대법관이 해임될 때까지 보조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리처드 2세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웨스트민스터를 떠나 켄트의 엘섬 궁전으로 이동했다. 이에 리처드 2세의 숙부인 우드스톡의 토머스, 일리 주교 토머스 아룬델이 원 대표로 선임된 뒤 엘섬 궁전으로 파견되었다. 두 사람은 왕에게 의회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켰고, 사악한 왕실 고문들이 왕국에 피해를 끼쳤다고 비판했다. 급기야, 토머스는 왕이 폐위될 위험을 무릅쓰고 법과 영주의 현명한 조언을 따르기를 꺼리며, 사악한 조언자들에 의해 자신이 백성으로부터 소외되도록 허용했다고 지적했다. 리처드 2세는 이에 심한 위협을 느꼈고, 결국 의회에 참석한 뒤 마이클을 해임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마이클은 이후에도 왕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에서 지냈지만, 1387년 12월 우드스톡의 토머스 등이 주도한 청원파 반란군이 런던으로 쳐들어와서 레드콧 브리지 전투에서 왕실군을 격파하자, 공포에 질려 프랑스로 달아났다. 이후 청원파는 정권을 장악한 뒤 1388년 2월 3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열린 의회에서 그를 비롯한 왕의 총신들을 사형 또는 추방형에 처했으며, 모든 재산과 직위를 몰수했다. 이후 그는 파리에서 근근히 지내다가 1389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