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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5-12 20:20:08

헨리 퍼시(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성명 헨리 퍼시
Henry Percy
출생 1393년 2월 3일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알닉 성
사망 1455년 5월 22일 (향년 62세)
잉글랜드 왕국 세인트 올번스
아버지 헨리 '훗스퍼' 퍼시
어머니 엘리자베스 모티머
형제 엘리자베스
배우자 엘레노어 네빌
자녀 존, 헨리, 토머스, 캐서린, 조지, 랄프, 리처드, 윌리엄, 조앤, 앤
직위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 장미 전쟁 시기 랭커스터 왕조의 편에 섰다가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393년 2월 3일 잉글랜드 왕국 노섬벌랜드 알닉 성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경 방위를 도맡은 사령관 헨리 '훗스퍼' 퍼시이고, 어머니는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의 딸이다. 누이로 엘리자베스 퍼시[1]가 있었다. 조부 헨리 퍼시는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이었다.

조부와 아버지 헨리는 1399년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헨리 4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많은 보상을 받았지만, 나중에 헨리 4세와 여러 사유로 갈등을 벌였다. 급기야 1403년 아버지 헨리 '훗스퍼' 퍼시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해 7월 21일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헨리 4세에게 패사했다. 조부 헨리 퍼시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반란에 가담하려 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짧은 투옥을 겪은 뒤 사면되었고, 1404년 6월 손자를 인질로 보내 돈케스터에서 억류되도록 했다.

1405년 5월, 조부 헨리 퍼시가 웨일스 대공을 칭한 오와인 글린두르, 오와인과 손잡아 헨리 4세를 타도하려 한 에드먼드 모티머와 삼자 동맹을 맺고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조부 헨리 퍼시는 손자를 데리고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 후 어린 헨리는 올버니 공작 로버트 스튜어트의 보호를 받았다. 1408년 2월 19일, 조부 헨리 퍼시가 잉글랜드로 몰래 귀국했다가 브램햄 무어에서 발각되어 목숨을 잃은 뒤, 어린 헨리 퍼시가 노섬벌랜드 백작령의 상속인이 되었다.

1413년 헨리 4세가 사망하고 헨리 5세가 즉위하가 잉글랜드로 올아와서 자신이 영지와 작위를 돌려받게 해달라고 청원했고, 왕의 숙모인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부인 조앤 보퍼트도 그를 지지했다. 이에 헨리 5세는 그를 제2대 노섬벌랜드 백작으로 선임했고, 조앤 보퍼트는 자기 딸 엘레노어 네빌과 결혼시켰다. 헨리 퍼시는 1414년 5월 11일 노섬벌랜드 백작령으로 복귀했고. 1416년 3월 16일에 공식적으로 노섬벌랜드 백작으로서 의회에 출석했다. 그 후 헨리는 수년간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에 종종 참여했다. 1416년 대륙 원정에 왕과 동행했고, 이듬해에는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다.

헨리 퍼시의 주요 임무는 스코틀랜드 국경의 방비였다. 1416년 12월 16일 동부 변경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417년 8월 스코틀랜드 군이 북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올버니 공작이 베릭 성을 포위하는 동안, 더글러스 백작은 록스버러 성을 공격했다. 헨리 퍼시는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와서 베릭의 포위를 풀고 올버니 공작과 더글러스 백작을 국경 너머로 몰아냈다. 또한 1421년 2월 24일 헨리 5세의 왕비 발루아의 카트린대관식에 집사로 참여했다. 1422년 헨리 5세가 사망한 뒤 헨리 6세의 미성년 통치 기간동안 왕을 대신하여 통치하도록 선임된 위원회 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위원회에서 잉글랜드 추기경 헨리 보펴트의 파벌에 속했으며, 1429년 베릭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평화 협상에 헨리 보퍼트를 따라갔다.

헨리 퍼시는 동부 변경 관리인으로서 평화 협상과 북부 잉글랜드 방비에 쭉 전념하다가 1434년 왕실의 지원이 미비해 군비를 조달하는 데 곤경을 겪고 빚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늘어났다는 이유로 사임했지만, 1435년 다시 복귀해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와 함께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을 방비했다. 1435년 9월 10일 스코틀랜드인에게 빼앗긴 던바 성을 탈환하러 진군하던 중 베릭셔 콕번스패스 인근에서 벌어진 피페르디안 전투에서 제2대 앵거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의 기습 공격으로 패배해 기사 40명을 포함한 병사 1,500명을 상실했다. 하지만 이후 전력을 수습한 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1세가 록스버러를 포위 공격하는 걸 격퇴했다. 그는 1440년에 다시 서부 변경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440년대 후반, 노섬벌랜드 백작인 그를 모시는 요크셔 소작인들은 요크 대주교의 이웃 소작인들과 거의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급기야 노섬벌랜드 백작과 요크 대주교 간의 무력 충돌이 종종 벌어지자, 헨리 6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1448년 잉글랜드 북부로 가서 양자를 중재했다. 1448년 그의 친척인 로버트 포이닝스가 노섬벌랜드 백작의 가신들에게 서식스 영지에서 쫓겨났다. 1년 후, 그는 아들 헨리 퍼시와 함께 로버트 포이닝스가 봉토로 받은 켄트의 뉴잉턴 버트램 영지를 습격했다. 로버트는 이때 심각한 약탈 행위가 벌어졌으며, 자신은 3년간 법적 구제책을 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헨리 퍼시는 초기엔 노섬벌랜드와 다른 잉글랜드 북부의 대귀족인 네빌 가문과 우호적이었다. 그는 엘레노어 네빌과의 결혼을 통해 보퍼트-네빌 가문과 연결되었고, 1426년에는 여동생 엘리자베스를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1450년대 초부터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과의 갈등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갈등을 촉발한 것은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 토머스와 재3대 크롬웰 남작 랄프 드 크롬웰의 조카이자 상속녀인 모드 스탠호프와 솔즈베리 백작의 아들 토머스 네빌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결혼으로 전통적으로 퍼시 가문의 소유였던 레슬 성이 네빌 가문에게 넘어가자, 퍼시 가문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당시 60세가 다 되어가던 노섬벌랜드 백작 본인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인 에그레몬트 남작 토머스 퍼시가 1453년 8월 24일 700명 가량의 병력으로 요크 근처 헤워스에서 노커스 네빌과 모드 스탠호프의 결혼식을 습격했다. 다행히 신랑과 신부, 그리고 하객들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이 일을 기점으로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의 갈등이 심화했다, 10월 8일, 노섬벌랜드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잉글랜드 궁정에 소환되어 화해를 종용받았지만 무시했다. 그 대신, 양자는 각각 몇 마일 떨어진 요크셔의 거점 탑클리프와 샌드허튼에 모였다. 양측 모두 해산하라는 왕의 명령을 무시했고 전투는 불가피해 보였지만, 결국 휴전이 성립되었고 양군은 철수했다. 하지만 1454년 10월 토머스 퍼시와 그의 동생 리처드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네빌 가문에게 패배해 일시적으로 생포되었다가 몸값을 받고 풀려나는 등, 양자간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이후 잉글랜드 왕국 내에서 제3대 요크 공작 리처드에드먼드 보퍼트 간의 갈등이 고조되자, 경쟁 대상인 네빌 가문이 요크 공작 편을 들었기 때문에 에드먼드 보퍼트 편을 들었다. 1455년 5월 왕과 서머셋 공작과 함께 왕을 모시면서 레스터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했다. 그러던 중 5월 22일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요크 공작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세인트 올번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1] 1395 ~ 1436, 제7대 클리퍼드 남작 존 드 클리퍼드와 초혼, 제2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재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