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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18:55:02

로저 모티머(제4대 마치 백작)

<colbgcolor=#FFC9C7><colcolor=#000000> 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
Roger Mortimer, 4rd Earl of March
이름 로저 모티머
(Roger Mortimer)
출생 1374년 4월 11일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몬머스셔 우스크
사망 1398년 7월 20일
아일랜드 켈스(향년 24세)
배우자 엘리노어 홀랜드[1]
자녀 앤, 에드먼드, 로저, 엘리노어
아버지 에드먼드 모티머
어머니 필리파 플랜태저넷[2]
형제 엘리자베스, 필리파, 에드먼드
직위 제6대 위그모어 남작, 제4대 마치 백작, 제7대 얼스터 백작, 아일랜드 청지기.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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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다가 전사했다.

2. 생애

1374년 4월 11일 잉글랜드 왕국 웨일스 몬머스셔의 우스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제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이고, 어머니는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인 필리파이다. 형제로 엘리자베스[3], 필리파[4], 에드먼드가 있었다. 그는 모계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증손자였다.

1381년 12월 27일 아일랜드 보안관을 맡고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당시 7살이었던 로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당시 그는 자녀가 없었던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가장 가까운 상속자였으므로, 그의 후견인 선임 문제는 1382~1384년에 심각한 정치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처음에는 유언 집행자의 손에 넘어간 재산을 제외한 로저의 재산이 여러 소영주에게 나눠졌다. 그러나 이는 대귀족들 사이에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대귀족들은 유산의 본래 주인인 로저는 물론 자신들의 이익도 고려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리처드 2세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1383년 12월 16일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있는 모티머 가문의 영지는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 제12대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 라비의 네빌 남작 존 네빌의 통제하에 놓였으며, 아룬델 백작이 로저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384년, 리처드 2세는 어머니 켄트의 조앤의 주장에 따라 그녀의 두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인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를 로저의 새로운 후견인으로 삼았다. 토머스 홀랜드는 로저에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1388년에 로저를 자신의 딸 엘리노어 홀랜드와 결혼시켰다.

1382년 1월 4일, 로저는 어린 나이임에도 아버지가 이전에 맡았던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되었고, 제2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의 사생아인 기사 토머스 모티머가 그를 대신해 아일랜드를 통제했다. 그러나 1년 후 아일랜드의 상황은 심각하게 악화했고, 결국 리처드 2세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아일랜드 총독으로 선임되어 그곳의 통제를 맡았다. 일부 기록은 로저가 1385년 10월 리처드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로 선언되었다고 기술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연대기를 비롯한 다른 기록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없어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가 리처드 2세의 가장 가까운 계승자였기에 귀족들의 주목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리처드 2세의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삼촌인 토머스 모티머와 월터 브루그가 그 대신 재산을 관리했는데, 이들이 사업을 매우 능숙하게 수행해서 순이익이 26,000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1390년 4월 23일, 로저는 리처드 2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리처드 2세는 그에게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모티머 가문 영지 통제권을 돌려주려 했지만, 아룬델 백작과 워릭 백작은 그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1393년 3월, 로저는 아일랜드 영지에 대해서만 왕에게 경의를 표했고, 1394년 2월에 이르러서야 잉글랜드와 웨일즈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했다. 1392년 7월, 다시 아일랜드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아일랜드로 즉시 가지 않다가 1394년 아일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영영 독립하기 직전이라는 급보를 접한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원정할 때에야 비로소 아일랜드로 향했다. 리처드 2세는 1384년 9월 말에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사촌인 노리치의 에드워드, 이복형 존 홀랜드, 노팅엄 백작 토머스 모브레이, 그리고 로저와 함께 아일랜드로 진군했다.

1394년 10월 2일, 잉글랜드군은 워터퍼드에 상륙한 뒤 더블린으로 진군하면서 몇 차례 사소한 교전을 빼면 사실상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리처드 2세는 더블린에 도착한 뒤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지도자들은 리처드 2세를 알현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자신의 땅에 대한 권리를 확인받았다. 4명의 아일랜드 왕들도 모두 도착했으며, 리처드 2세는 이들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그들은 리처드 2세가 잉글랜드식 예절을 배우고 전통적인 킬트 대신 잉글랜드식 바지를 입으라고 명령한 것을 내심 껄끄러워하면서도 일단 용인했다. 1935년 5월 1일, 리처드 2세는 로저 모티머를 아일랜드 청지기로 세우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로저는 아일랜드 청지기로 쭉 지내면서 잉글랜드 정치 상황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던 1397년 9월, 리처드 2세의 측근인 제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타구가 그를 상대로 덴비 영주권의 반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로저와 그의 고문들은 최근 글로스터 백작이 된 토머스 르 디스펜서와 협의해 소송을 무마하는 데 성공했다. 그해 9월 4일, 리처드 2세는 로저의 삼촌인 토머스 모티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로저에게 내렸다. 당시 토머스 모티머는 1387년 리처드 2세에 맞섰던 청원파를 지지했기에 리처드 2세의 숙청 대상에 들어갔고, 스코틀랜드로 망명했다가 다시 아일랜드로 건너가 조카에게 의탁했다. 로저는 왕의 명령을 받았지만 수행하길 꺼려 의심을 샀다.

1397년 10월 15일, 로저는 1398년 1월에 슈루즈버리에서 열릴 예정인 의회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지시에 따라 아일랜드를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모티머 가문의 연대기 작가 우스크의 아담에 따르면, 그가 상륙했을 때 가문의 색상이 반영된 옷을 입은 지지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의회에서 법령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했고, 리처드 2세에게 삼촌을 용서해달라고 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아일랜드로 돌아갔지만, 리처드 2세는 이미 그를 대신해 새로운 아일랜드 청지기를 세우기로 했다. 1398년 7월 27일 로저의 임기가 만료되었고, 서리 공작 토머스 홀랜드가 새로운 아일랜드 청지기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로저는 토머스 홀랜드가 새 아일랜드 청지기로 선임되었을 무렵에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그는 1397년 7월 20일 켈스 전투에서 아일랜드 반란군과 맞서 싸웠으나 참패를 피하지 못하고 피살당했다. 그의 유해는 여러 개로 절단되었고, 나중에 수습된 뒤 위그모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아일랜드 반란군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리처드 2세는 제2차 아일랜드 원정을 떠났지만, 아일랜드에서 군사 활동을 하던 중 지난날 추방당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그 틈을 타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폐위되었다. 로저 사후 아직 7살이 되지 않은 장남 에드먼드 모티머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1]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의 딸.[2]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딸[3] 1371 ~ 1417, 헨리 '핫스퍼' 퍼시와 초혼, 초대 카모이스 남작 토머스 카모이스와 재혼.[4] 1375 ~ 1401, 제3대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와 초혼,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과 재혼, 제5대 베싱의 성 요한 경 토머스 포이닝스와 삼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