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홀랜드 Thomas Holland | |
생몰년도 | 1374년 ~ 1400년 1월 7일 또는 1월 8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노스 노샘프턴셔 포더링헤이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글로스터셔 시런세스터 | |
아버지 | 토머스 홀랜드 | |
어머니 | 앨리스 피츠앨런 | |
형제 | 엘레노어, 존, 리처드, 조앤, 에드먼드, 마가렛, 엘레노어, 엘리자베스, 브리짓 | |
아내 | 조앤 스태퍼드 | |
직위 | 켄트 백작, 서리 공작, 잉글랜드 백작 원수, 아일랜드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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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리처드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헨리 4세를 살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2. 생애
1374년경 잉글랜드 왕국 노스 노샘프턴셔 포더링헤이에서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와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앨리스 피츠앨런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397년 4월 아버지가 사망한 후 켄트 백작이라는 칭호를 포함한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1397년, 리처드 2세는 지난날 자신을 위협하고 자신이 총애하던 신하들을 대거 숙청했던 청원파 일원인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먼저 워릭 백작을 별장으로 유인해 체포한 뒤 아룬델 백작 역시 병사를 보내 체포했다. 이후 리처드는 글로스터 공작 마저 체포하기 위해 대규모 수행원을 규합했다. 이때 그는 숙부인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와 함께 여기에 가담했다. 그들은 밤에 글로스터 공작이 있던 에식스의 플래쉬 성에 들이닥쳐서 글로스터 공작을 체포했다.
1397년 9월 17일, 세 수감자들에 대한 재판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 그는 숙부 존 홀랜드, 러틀랜드 백작 노리치의 에드워드, 서버셋 백작 존 보퍼트 등 7명의 영주와 함께 세 수감자들을 고발했다. 재판 결과, 아룬델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고 형이 즉시 집행되었고, 워릭 백작은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리처드 2세가 영구 추방형으로 변경했으며, 글로스터 공작은 칼레에 연금되던 중 피살되었다. 세 죄수의 모든 영지와 재산은 압류된 뒤 왕의 동료들에게 분배되었다. 토머스는 1397년 9월 29일 서리 공작에 선임되었으며, 워릭 성을 획득했다.
1398년 1월 잉글랜드 백작 원수를 맡고 있던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더비 백작 볼링브로크의 헨리로부터 리처드 2세에게 반란을 꾸미고 있다는 고발을 받았다. 이에 왕은 음모를 조사하기 위해 18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선임했다. 이때 토머스는 토머스 모브레이를 대신해 잉글랜드 백작 원수 임무를 대행하게 했다. 1398년 9월 17일 토머스 모브레이와 볼링브로크의 헨리 간에 결투 재판이 열렸을 때, 그는 경기장에서 발생하는 불상사를 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리처드 2세가 개입하여 지팡이를 던진 뒤 두 사람 모두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둘다 추방했다. 이후 토머스는 잉글랜드 백작 원수로 확정되었고, 모브레이의 압수된 재산 중 일부를 받았다.
1398년 7월 20일, 아일랜드 총독을 맡고 있던 제4대 마치 백작 로저 모티머가 아일랜드인들의 반란에 휘말려 피살되었다. 리처드 2세는 토머스를 아일랜드 총독에 세워서 아일랜드를 평정하게 했다. 1399년 2명의 아일랜드 왕이 등장하는 등 반란 규모가 커지자, 리처드 2세는 자기가 직접 아일랜드로 원정을 떠나서 그곳을 안정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로 떠난 사이, 추방당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잠입해 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 2세는 급보를 접하자 남은 군대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1399년 7월 27일 잉글랜드로 향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는 증원군을 모으는 데 실패했고, 8월에 콘위 성에 이르렀을 때 자기가 가려고 힜던 체스터가 8월 11일에 볼링브로크의 헨리에 의해 넘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리처드 2세의 지지자 다수가 볼링브로크의 헨리에게 넘어갔고, 군대는 흩어졌다. 하지만 토머스는 숙부 존과 함께 리처드 2세를 계속 따랐다.
얼마 후, 리처드 2세는 존을 포함한 소규모 수행원과 함께 볼링브로크의 헨리와 협상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기습을 당해 생포되었고, 플린트 성으로 이송되었다. 볼링브로크의 헨리는 나중에 리처드 2세에게 왕위를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9월 30일에 헨리 4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국왕에 등극했다. 리처드 2세는 폰테프랙트 성에 수감되었고, 존과 토머스는 런던 탑에 갇혔다. 1399년 10월 29일, 토머스는 의회에 출석해 왕의 폭정을 도운 혐의에 대해 답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어렸으며, 왕의 뜻에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11월 6일 서리 공작 작위를 빼앗겼고 리처드 2세에게 받았던 모든 보상이 몰수되는 조건하에 석방되었다.
1400년 1월 초, 숙부 존 홀랜드, 솔즈베리 백작 존 몬타구, 디스펜서 남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 럼리 남작 랄프 럼리 등과 함께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암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월 6일 음모가 발각되었고,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탈출했다가 1월 7일 글로스터셔의 시런세스터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월 7일 또는 8일 밤에 처형되었고, 수급은 런던 브리지에 전시되었다.
토머스는 생전에 제2대 스태퍼드 백작 휴 스태퍼드의 딸 조앤 스태퍼드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조앤 스태퍼드는 남편이 처형될 무렵 보석을 가지고 탈출하려다 리버풀에서 체포되어 런던으로 압송되었다가 나중에 헨리 4세의 명령으로 석방되었다. 켄트 백작위는 토머스의 형제인 에드먼드 홀랜드가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