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토머스 르 디스펜서 Thomas le Despenser | |
생몰년도 | 1373년 9월 22일 ~ 1400년 1월 13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미들랜드 러틀랜드 카운티 에센딘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브리스톨 | |
아버지 |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드 부르게르시 | |
누이 | 마거릿, 엘리자베스, 앤 | |
아내 | 랭글리의 콘스탄스 | |
자녀 | 리처드,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휴, 이사벨라 | |
직위 | 글로스터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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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리처드 2세의 청원파 숙정을 도왔고,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잉글랜드 국왕이 된 헨리 4세를 모살하려는 음모에 참여했지만 발각된 뒤 처형되었다.2. 생애
1373년 9월 22일 잉글랜드 왕국 미들랜드 러틀랜드 카운티 에센딘에서 초대 디스펜서 남작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와 제2대 부르게르시 남작 소 바르톨로뮤 부르게르시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마거릿[1], 엘리자베스[2], 앤[3]이 있었다. 1375년 11월 11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2살의 나이로 디스펜서 남작위를 물려받았고, 케임브리지 백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견을 받았다.1384년 이전에 후견인인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딸 콘스탄스와 결혼했다. 그는 왕실에서 자랐으며, 젊은 왕 리처드 2세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389년 제11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밑에서 잉글래드 함대에 복무했고, 1391년 우드스톡의 토머스와 함께 튜튼 기사단에 가담해서 고대 프로이센에 대항한 십자군에 참여하려 했지만, 튜튼 기사단이 이미 십자군 원정을 마쳤다는 걸 알게 되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394년 성년이 되면서 아버지의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받았다.
1397년 7월 리처드 2세가 청원파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하는 걸 지원했으며, 그해 9월 21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의회가 열렸을 때 재판에 기소된 청원파 인사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데 일조했고,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이때 숙청된 뒤 글로스터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는 그의 증조모인 엘레노어 드 클레어가 마지막 글로스터 백작인 길버트 드 클레어의 장녀이가 공동 상속자인 것을 감안한 조치였다. 또한 그는 엘므리 성, 우스터셔의 6개 영지 및 웨일스의 엘파엘 영지 등 리처드 2세에게 숙청된 귀족들의 영지 상당 부분을 확보햇으며, 종신 글로스터 성의 순경이자 딘 숲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다.
1398년 1월 슈루즈버리에서 열린 의회에서 에드워드 2세의 총신이었다가 국정을 도탄에 빠뜨린 혐의로 프랑스의 이자벨, 로저 모티머 등에 의해 처형된 증조부 휴 르 디스펜서의 복권을 달성했으며, 1399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그해 5월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해 육군 부사령관 자격으로 후방 경비대를 이끌었다. 그는 렌스터의 아일랜드 왕 Art Mór mac Murchadha(무르카다의 아들 아서 모어)와 협상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그가 복종하도록 설득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날 리처드 2세에게 추방당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상륙해 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 2세는 아일랜드 원정을 중단하고 7월 22일 펨브로크에 상륙한 뒤 토머스에게 글래머건 영지에서 군대를 모집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글래머건 귀족과 주민들은 그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콘위 성에 피신한 리처드 2세는 볼링브로크의 헨리의 반란에 가담한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를 만났을 때 토머스 등 측근 7명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토머스는 리처드 2세의 통치가 끝나가고 있음을 깨닫고 곧 왕을 떠났다. 그는 9월 30일 왕의 비난과 면직을 발표한 7명의 위원 중 한 명이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헨리 4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에 즉위하는 걸 인정했다.
1399년 10월 6일에 소집된 의회에서, 토머스는 다른 4명의 남작과 함께 1397년 청원인들을 기소한 일에 대해 답변해야 했다. 그는 칼레로 끌려갔던 우드스톡의 토머스가 피살된 사건에 개입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해 11월 3일, 의회는 글로스터 백작위를 박탈하고 1397년 리처드 2세로부터 부여받았던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후 그는 잠시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 잉글랜드를 떠나 튜튼 기사단이나 구호 기사단에 합류하려 했다. 그러다가 1400년 1월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 헌딩턴 백작 존 홀랜드, 럼리 남작 랄프 럼리 등과 함께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암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1월 6일 음모가 발각되었고, 그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탈출해 시렌세스터로 피신한 뒤 글래모건으로 피신한 후 카디프에서 배를 타고 해외로 탈출하려 했다. 하지만 선장은 일부러 브리스톨로 이동했고, 그는 그곳에서 체포된 뒤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사후 튜크스버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랭글리의 콘스탄스(1375 ~ 1416): 초대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와 카스티야의 이사벨[4]의 딸. 토머스 르 디스펜서가 처형된 뒤 제4대 켄트 백작 에드먼드 홀랜드와 불륜을 맺었고, 그 와의 사이에서 딸 엘리노어 홀랜드를 낳았다.
- 리처드 르 디스펜서(1396 ~ 1414): 제4대 부르게르시 백작.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의 딸인 엘리노어 네빌과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다.
- 엘리자베스 르 디스펜서(? ~ 1398): 요절
- 에드워드 르 디스펜서(? ~ 1400년 이전): 요절.
- 휴 르 디스펜서(? ~ 1401): 요절.
- 이사벨라 르 디스펜서(1400 ~ 1439): 아버지가 처형된 지 몇 달 후 출생했고, 오빠 리처드가 1414년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았다. 초대 우스터 백작 리처드 뷰챔프와 결혼해 딸 엘리자베스 뷰챔프[5]를 낳았다. 이후 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와 재혼해 헨리 뷰챔프[6], 앤 뷰챔프[7]를 낳았다.
[1] ? ~ 1415, 제5대 페러스 남작 로버트 드 페러스의 부인.[2] ? ~ 1408, 제2대 아룬델 남작 존 피츠앨런과 초혼, 제3대 자우체 남작 윌리엄 르 자우체와 재혼.[3] ? ~ 1426, 엘싱, 브리슬리, 그림스턴 영주 휴 헤이스팅스 3세와 초혼, 휴 헤이스팅스 3세가 1386년 곤트의 존의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했다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사한 후 제4대 몰리 남작 토머스 드 몰리와 재혼.[4]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페드로의 차녀[5] 1415 ~ 1448, 베르가베니 여남작.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조앤 보퍼트의 아들인 에드워드 네빌과 결혼해 제4대 베르가베니 남작 조지 네빌을 포함해 여러 자녀를 낳았다. 조지의 후손인 메리 페인은 1604년 디스펜서 남작위를 회복했고, 남작위는 계속 이어져 현재는 팔머스 자작 보스카웬 가문이 가지고 있다.[6] 1425 ~ 1446, 제14대 워릭 백작, 1445년부터 초대 워릭 공작.[7] 1426 ~ 1492, 장미 전쟁의 주역인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