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에드먼드 홀랜드 Edmund Holland | |
생몰년도 | 1383년 1월 6일 ~ 1408년 9월 15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켄트 | |
사망지 | 브르타뉴 공국 브레아 | |
아버지 | 토머스 홀랜드 | |
어머니 | 앨리스 피츠앨런 | |
형제 | 토머스, 엘레노어, 존, 리처드, 조앤, 마가렛, 엘레노어, 엘리자베스, 브리짓 | |
아내 | 루치아 비스콘티, 요크의 콘스탄스(정부) | |
자녀 | 엘레노어 홀랜드(사생아) | |
직위 | 켄트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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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해적 활동을 벌이는 브르타뉴인들을 토벌하러 출정했다가 브레아 전투에서 전사했다.2. 생애
1383년 1월 6일 잉글랜드 왕국 켄트에서 제2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와 제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앨런의 딸인 앨리스 피츠앨런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1398년 왕실 재무부로부터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의 조카 자격으로 100마르크의 연금을 받았다. 1399년 리처드 2세의 아일랜드 원정에 참여했다. 그러던 중 리처드 2세에 의해 추방되었던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리처드 2세는 그의 숙부인 존 홀랜드와 형인 토머스 홀랜드와 함께 잉글랜드로 귀환했고, 그는 아일랜드에 남겨졌다.이후 리처드 2세가 강제로 퇴위되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헨리 4세로 즉위했다. 1400년 1월 숙부 존 홀랜드와 형 토머스 홀랜드가 헨리 4세와 자식들을 살해하고 리처드 2세를 복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이후 에드먼드는 리버풀에 상륙했다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는 재판에서 헨리 4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굳게 맹세했고, 헨리 4세는 3년간 심사숙고한 끝에 1403년 7월 1일에 토머스 홀랜드가 가지고 있던 영지와 재산 일부를 에드먼드에게 반환하고 켄트 백작에 선임했다. 다만 일부 영지는 랭커스터 공작으로서 자신의 재산이라고 주장한 왕에 의해 왕실의 것이 되었다. 1404년 1월, 에드먼드는 형 토머스의 미망인인 조앤 스태퍼드와 재산 분할에 관한 합의를 맺었다. 이에 따라, 조앤은 미망인의 몫 중 더 작은 부분을 받기로 했다.
그 후 에드먼드는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를 진압하려는 헨리 4세의 군대에 들어가 충실히 싸웠으며, 1403년 7월 헨리 '핫스퍼' 퍼시의 반란군과 왕실군이 맞붙은 슈루즈버리 전투에서 왕실군의 편에 서서 승리에 기여했다. 같은 해에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1405년 의회에 합류한 뒤 아버지 토머스 홀랜드의 서부 제독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 후 도셋, 햄프셔, 서리 및 서식스의 순회 판사를 맡았으며, 1406년과 1407년에 볼리외 수도원의 분쟁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헨리 4세의 둘째 아들인 랭커스터의 토머스 휘하에서 해상 방어 근무를 수행했는데, 특히 1405년 슬로이스 항구를 습격해 프랑스 함대에 타격을 입혔고, 노르망디 해안 습격전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407년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딸인 루치아 비스콘티와 결혼했다. 그는 이 결혼에서 70,000플로린의 지참금을 받기로 했지만, 아무런 돈도 받지 못했다. 그는 이에 분개해 아내와 불화를 빛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한편 에드먼드는 1405년부터 글로스터 백작 토머스 르 디스펜서의 미망인이며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딸인 요크의 콘스탄스와 불륜을 맺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사생아 엘레노어를 낳았다. 엘레노어는 훗날 5대 오들리 남작 제임스 투세의 부인이 되었다.[1]
1407년 북부 제독에 선임된 그는 1408년 3월 영국 해협을 순찰해 해적들의 침입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헨리 4세의 왕비인 나바라의 조앤이 브르타뉴의 해적들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이에 따라 브르타뉴로 군사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9월 15일 브레아 섬 전투에서 머리에 투구를 쓰지 않고 있다가 석궁병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사후 링콘셔의 본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합법적인 자식을 낳지 못했기에 켄트 백작위는 사라졌고, 재산은 에드먼드의 다섯 자매와 그들의 상속인 사이에 나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