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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수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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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A0044><colcolor=#FFF> 레온 왕국 보르고냐 왕조 3대 국왕
알폰수 9세
Alfonso IX
파일:알폰수 9세.jpg
출생 1171년 8월 15일
사모라
사망 1230년 9월 24일 (향년 59세)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
재위 레온 왕국갈리시아 왕국의 왕
1188년 1월 22일 ~ 1230년 9월 24일
배우자 포르투갈의 테레자 (1191년 결혼 / 1196년 결혼 무효)
베렝겔라 (1197년 결혼 / 1204년 결혼 무효)
자녀 산차, 페르난도, 둘세, 레오노르, 콘스탄사, 페르난도 3세, 알폰소, 베렝겔라
사생아 우라카 알폰소, 페르난도 알폰소, 페르난도 알폰소, 로드리고, 알돈사, 테레사 알폰소, 산차, 마리아, 마르틴, 우라카
아버지 페르난두 2세
어머니 포르투갈의 우라카
이복 형제 페르난도, 산초,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산초 페르난데스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레온 왕국갈리시아 왕국 보르고냐 왕조 3대 국왕.

2. 생애

1171년 8월 15일 사모라에서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두 2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1세의 딸 우라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제로 페르난도, 산초,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알폰소 페르난데스, 산초 페르난데스가 있었는데, 그 중 산초 페르난데스만 유년기에 죽지 않았다. 그는 일찌감치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1175년 어머니 우라카가 페르난두 2세와 사촌 관계[1]라는 이유로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부터 결혼 무효를 선고받은 후 입지가 불안해졌다.

1187년 5월, 페르난두 2세는 1180년 5월경부터 정부로 삼고 있던 우라카 로페스와 결혼했다. 우라카 로페스는 자신이 낳은 아들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산초 페르난데스를 차기 국왕으로 옹립하고 전 왕비 우라카의 아들 알폰수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남편에게 '포르투갈의 우라카'는 교황에 의해 결혼 무효 처리되었는데 그의 아들 알폰수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합법적인 결혼으로 태어난 산초 페르난데스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당시 늙고 쇠약해져 있던 페르난두 2세는 아내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1188년 1월 장남 알폰수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1188년 1월 22일 베나벤테에서 병사했다. 그 후 우라카 로페스는 남편이 생전에 내린 명령을 근거삼아 알폰수를 쫓아내고 자기 아들을 새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페르난두 2세의 두번째 부인 테레사 페르난데스와 연관이 있던 라라 가문과 트라바 가문은 알폰수 9세를 지지했고, 다른 귀족과 성직자들 역시 오랫동안 왕위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왕자를 하루아침에 추방하고 어린 아이를 세울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알폰수 왕자는 무사히 레온-갈리시아 연합 왕국의 군주로 즉위했고, 우라카 로페스는 보복이 두려워서 아들 산초 페르난데스와 함께 카스티야로 망명했다. 그는 자신을 음해한 우라카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버지가 생전에 우라카에게 영지로 하사한 아길라르와 몬테아구도를 몰수했다. 그 후 1188년 4월에 레온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와 레온, 오비에도, 살라망카, 시우다드 로드리고, 사모라, 아스토르가, 토로, 베나벤테, 레데스마 등 각 도시 대표들을 소집한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다. 그는 이 회의에서 무슬림 세력과 카스티야, 포르투갈, 아라곤 등 이웃 국가들의 압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면 국방을 강화해야 하며, 그러려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둬야 하니 양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세금을 늘리는 것을 동의해준다면 사법 행정을 개선하고 귀족들이 도시민들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귀족들과 잦은 마찰을 벌이던 도시 대표들은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88년 6월, 알폰수 9세는 카리온에서 카스티야 국왕이자 사촌인 알폰소 8세와 만나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려 했다. 알폰소 8세는 사촌을 기사로 선임하는 의식을 거행했고,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손에 키스하고 검과 허리띠를 받았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스와비아 공작 콘라드 역시 이 자리에 참석해 기사 작위를 받았다. 콘라드는 알폰소 8세의 딸인 베렝겔라와 결혼하고자 이곳에 찾아왔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이후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얼마 안가 협약을 깨고 레온 왕국으로 쳐들어가 발렌시아 데 돈 후안과 발데라스를 포함한 여러 영토를 공략했다. 여기에 포르투갈의 산슈 1세 역시 새 국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어수선한 레온 왕국을 공격해 갈리시아의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에게 이중으로 전쟁을 치르게 된 그는 포르투갈 왕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그는 산슈 1세를 만나 평화 협약을 맺고 산슈 1세의 딸 테레사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산차, 페르난도, 둘세를 낳았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두 부부가 사촌 관계이니 결혼이 성립되지 않는다며 교황청에 재소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는 알폰소 8세가 당초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과 함께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 사신을 보내 반 카스티야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왕국의 산슈 1세, 그리고 나바라 왕국의 안초 6세 역시 카스티야 왕국의 팽창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1191년 5월 12일 우에스카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나바라-레온-아라곤-포르투갈 4개국은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한 국가가 공격당하면 다른 국가들이 즉시 원조하기로 했다.

우에스카 협정이 체결된 후, 나바라-아라곤 연합군이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119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가 다른 연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아라곤 왕국은 우에스카 협정에서 이탈했다. 여기에 1194년 나바라 국왕 안초 6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와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협정을 파기했다.

여기에 알폰수 9세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무와히드 왕조의 침공을 우려해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은 것이 역효과를 초래했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는 알폰수 9세가 근친상간을 범하여 교회법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이교도와 손잡기까지 했다며 레온 왕국에 파문과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받는 것과 동일한 은총을 레온 왕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들에게 부여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국왕 산슈 1세는 레온 왕국과 동맹을 끊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투이와 폰테베드라를 공략했다.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 역시 레온 왕국의 남부를 공격하여 베나벤테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고, 뒤이어 북쪽으로 이동해 아스토르가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푸엔테 카스트로를 공격해 며칠 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민들을 도륙한 뒤 레온 성벽에 도달했다. 알폰수 9세는 레온 시를 겨우 빠져나갔지만, 미처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가거나 도륙되었고, 유대인 구역과 회당은 파괴되었다.

1194년, 알폰수 9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카스티야 왕국에 대한 반격에 착수했다. 그의 군대는 카리온까지 진군하면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해 레온 시의 참상을 복수했다. 이에 교황 사절이 양국의 갈등을 중재했고, 알폰수 9세와 알폰소 8세는 1194년 4월 20일 바야돌리드 지방의 토르데후모스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카스티야 국왕은 페르난두 2세 사후 레온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알바, 루나, 포르티야, 발데라스, 볼라뇨스 등지를 돌려주기로 했으며,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 국왕의 장녀 베렝겔라와 결혼하고 앞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196년 알폰수 9세는 포르투갈의 테레사를 포르투갈로 돌려보냈다. 베렝겔라와의 결혼식은 1197년 12월 초 산타 마리아 데 바야돌리드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1195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가 마라케시에서 중병을 앓고 있으며, 그의 동생인 알 안달루스 타이파 아부 야히아가 지중해를 건너 왕을 자칭하며 마라케시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때를 틈타 세비야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야쿱은 아부 야히야의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한 뒤,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카스티야 왕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알폰소 8세는 대규모 전투가 임박하자 레온 왕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빼앗아갔던 영토를 돌려주기로 해놓고 아직 돌려주지 않은 점을 들며 지원을 보내길 거부했다.

결국 알폰소 8세는 단독으로 야쿱 알 만수르와 맞붙었고,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야쿱은 여세를 몰아 말라곤, 베나벤테, 칼라트라바, 카라쿠엘, 토레 데 과달페르사 등 여러 성채를 함락하였다. 이제 툴레도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려버리자, 알폰소 8세는 다시 한 번 레온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알폰수 9세는 톨레도로 가서 알폰소 8세와 만나 이제라도 영토를 돌려준다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폰소 8세는 이번에도 확답을 피했고, 알폰수 9세는 격분한 채 톨레도를 떠났다.

이후 야쿱의 군대는 2년간 엑스트레마두라, 타구스 계곡, 라 만차, 톨레도 주변을 초토화했고, 몬탄체스, 트루히요, 플라센시아, 탈라베라, 에스칼로나 등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야쿱은 곧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이베리아 반도에 흥미를 잃고 1187년 수도 마라케시로 돌아간 뒤 1199년 2월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앗 나시르는 이프리키야의 바누 가니야의 반란 진압에 몰두하느라 알 안달루스에 신경쓰지 못했고,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왕국은 이 때를 틈타 알 안달루스를 갉아먹었다.

1197년 12월 베렝겔라와의 결혼이 거행된 이래, 알폰수 9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사촌간의 결혼은 무효이니 당장 헤어지라는 압박을 받았고, 여러 차례 파문 위협을 받았다. 그는 이교도와의 항쟁을 위해 이웃 국가들끼리 단합하고자 단행한 것이니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교황은 끝내 거부했다. 다만 그들의 자녀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는 인정받았다. 그는 베렝겔라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지만, 교황의 강요에 못 이겨 1204년 베렝겔라를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1212년 바누 가니야 진압에 성공한 앗 나시르는 이베리아 반도로 넘어가 톨레도와 코르도바 사이에 위치한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본부인 살바티에라를 공략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이교도와의 전쟁을 벌일 각오가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알폰수 9세는 확답을 피했지만, 알폰소 8세는 죽음을 각오하고 레콩키스타에 뛰어들겠다고 답했다. 이에 교황은 카스티야 국왕을 도울 십자군을 선포하고, 알비파 십자군을 이끌던 아르노 애므리를 교황 특사로 임명하였다. 알폰소 8세가 "내가 이교도들과 싸우고 있을 때 레온 국왕이 빼앗긴 영토를 되찾겠다며 빈 틈을 노릴까 걱정된다"고 호소하자, 아르노는 레온 등 이베리아 각국에 "카스티야인들이 이교도와 싸우는 동안 카스티야를 공격한다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알폰수 9세는 카스티야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자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신하들이 카스티야군과 함께 싸우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면서도 레온 왕국 국경 너머의 카스티야 점령지를 은밀히 탈환했다. 1212년 7월 12일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상당한 영토를 확보하고 귀환한 알폰소 8세는 자신이 거둔 대성과에 고무되었기에 알폰수 9세의 이같은 행동을 굳이 따져묻지 않았다. 그 대신 알폰수 9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2세를 초대하여 코임브라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기에 페냐피엘과 알만자를 레온 왕국에 돌려주기로 했다.

1214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가 사망하고 10살의 엔리케 1세가 카스티야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1217년 6월 6일, 엔리케 1세는 팔렌시아의 에피스코팔 궁전에서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다가 지붕 위에서 떨어진 타일에 머리를 직격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베렝겔라는 알폰수 9세가 엔리케 1세가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의 혈통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려 들 것을 우려했다. 그녀는 일단 엔리케 1세가 죽었다는 것을 숨기고 알폰수 9세에게 아들 페르난도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들이 올 때까지 임시로 카스티야 여왕을 맡았다.

알폰수 9세가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채 페르난도를 보내자, 베렝겔라는 곧바로 엔리케 1세의 사망을 대내외에 공개한 뒤 아들 페르난도 3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알폰수 9세는 베렝겔라가 자신을 속였다며 격분했고,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엔리케 1세의 전 섭정이었던 알바로 누녜스 데 라라와 손잡고 카스티야를 전격 침공해 우루에냐, 비야가르시아, 카스트로 몬테, 아로요를 점령했다. 그 후 베렝겔라로부터 협상을 요청받자, 그는 베렝겔라와 재혼하고 그녀가 카스티야 여왕이 되는 것을 용인하며, 그와 베렝겔라가 죽고 난 뒤 페르난도가 레온과 카스티야의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카스티야인들이 제안을 거부하자, 알폰수 9세는 무력으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부르고스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조언에 따라 라구나 데 두에로, 토르케마다, 토르도마르를 거쳐 부르고스로 향하면서 각지를 약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민중들이 강한 적의를 드러내며 곳곳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병력이 계속 소모되자, 그는 부르고스를 공략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레온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돌아가는 동안 팔렌시아를 통과하면서 기론과 메네세스 가문의 영지를 초토화했다. 한편 페르난도 3세는 아빌라와 세고비아, 라라, 팔렌시아 일대의 지배권을 회복하고 그곳의 병력을 차출해 1217년 8월 중순 부르고스에 입성해 민중의 환호를 받고 8월 31일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1217년 9월 페르난도 3세가 부르고스를 떠나 팔렌시아로 향했을 때, 알바로 누녜스의 형제 페르난도가 레빌라 발레헤라에서 매복 공격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격퇴되었다. 알바로 누녜스는 에레루엘라 데 카스티야레라에서 또다른 매복 공격을 시도했지만, 수에로 텔레즈 데 메네세스가 이끄는 적군의 역습을 받고 사로잡혀 바야돌리드로 호송되었다. 그는 알라르콘, 카네테, 타리에고, 아마야 및 빌라프랑카 몬테스 데 오카 등 자신이 통제하는 요새들을 모조리 헌납해야 했다.

1217년 11월, 알폰수 9세는 풀려난 후 레온으로 망명한 알바로 누녜스와 함께 페르난도 3세와 만나 휴전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알폰수 9세는 알바로 누녜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1218년 봄 카스티야를 재차 침공해 메디나 데 리오세코 인근의 발데네브로 요새를 공략했다. 페르난도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로베 데이즈 데 하로, 알바로 디아즈 데 카메로스,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빌라마요르를 파견해 레온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알폰수 9세와 라라 가문에게 격퇴되어 카스트레혼 데 라 페냐 요새로 퇴각했다. 알바로 누녜스는 이 요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이끌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고, 요새에 갇혔던 카스티야군은 적이 지휘관의 사망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강경파였던 알바로 누녜스가 사망한 뒤, 알폰수 9세와 페르난도 3세는 베렝겔라의 중재에 따라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양자는 1218년 8월 26일 토로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 3세는 아버지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고, 알폰수 9세는 빼앗았던 영토를 되돌려주고 다시는 카스티야 왕국을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 일로 부자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그 후 알폰수 9세는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쇠락해가는 무와히드 왕조를 공격하기로 했다. 1218년 말, 그는 카세레스를 공략하고자 가스코뉴 십자군과 칼라트라바와 알칸타라 기사단과 함께 출진했다. 그러나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에도 함락되지 않아 철수해야 했다. 이후 두번째 원정에 착수한 그는 브라가와 가마랑스에서 포르투갈인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모두 격파했고, 1219년 6월 13일 포르투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뒤이어 세비야로 쳐들어가 적군을 격파하고 상당량의 전리품을 확보했다. 1221년 알칸타라 기사단이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를 공략하자, 이에 자극을 받아 1222년 카세레스를 재차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1223년, 1225년, 1226년에 잇따라 카세레스를 공격했고, 1229년 마지막 공격에서 카세레스를 마침내 공략했다.

1230년, 알폰수 9세는 메리다를 포위하고 이 도시를 구하려고 달려오던 이븐 후드를 격파했다. 메리다 수비대는 구원군이 격파당하자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했고, 뒤이어 바다호스, 엘바스, 탈라베라 라 레알이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렇게 많은 영토를 확보하고 귀환한 알폰수 9세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방문해 대 야고보에게 경의를 표한 뒤 레온으로 향하던 중 빌라누에바 데 사리아에서 중병에 걸렸고, 1230년 9월 24일에 사망했다. 사후 아버지 페르난두 2세가 묻혀 있던 산티아고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알폰수 9세는 당초 첫 왕비 테레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르난도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페르난도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베렝겔라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페르난도가 왕위 후계자로 거론되었지만, 페르난도가 이미 카스티야의 국왕인 점이 걸림돌이었다. 카스티야 왕국에 반감을 품고 있던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은 알폰수 9세에게 테레사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 산차둘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권유했다. 알폰수 9세 역시 자신의 동의 없이 카스티야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베렝겔라와 감히 자신에게 대항한 페르난도 3세 모자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그들의 설득에 따랐다. 그리하여 알폰수 9세 사후 산차와 둘세가 레온과 갈리시아의 공동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페르난도 3세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토로에 입성해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힘을 합쳐 레온과 갈리시아 귀족들을 제압했고, 페르난도 3세의 어머니 베렝겔라가 산차와 둘세의 어머니인 포르투갈의 테레사와 협상한 끝에 1230년 12월 11일 베나벤테에서 연간 3만 메라베디(maravedí)에 달하는 거액의 연금과 토지를 받는 대가로 왕관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내게 했다. 이리하여 페르난도 3세는 카스티야 국왕에 이어 레온과 갈리시아 국왕으로 등극했고, 레온 왕국은 이때부터 카스티야 왕국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3. 가족 관계



[1] 페르난두 2세와 우라카 부부의 할머니인 레온의 우라카와 포르투갈의 테레사 데 레온은 이복 자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