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8-05 10:02:04

페데리코(나폴리)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fb503, #fcdd09 20%, #fcdd09 80%, #cfb503); color: #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앙주 왕조
카를로 1세 카를로 2세 로베르토 조반나 1세 카를로 3세
루이지 1세
앙주 왕조 발루아앙주 왕조 트라스타마라 왕조
라디슬라오 조반나 2세 레나토 알폰소 1세 페르디난도 1세
발루아앙주 왕조
루이지 2세대립
트라스타마라 왕조 발루아오를레앙 왕조 트라스타마라 왕조
알폰소 2세 페르디난도 2세 페데리코 루이지 2세 페르디난도 3세
트라스타마라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
조반나 3세 필리포 2세 필리포 3세 카를로 5세
압스부르고 왕조
카를로 4세 필리포 1세
보르본 왕조 압스부르고 왕조 보르본 왕조 보르본양시칠리아 왕조 보나파르트 왕조
필리포 4세 카를로 6세 카를로 7세 페르디난도 4세 주세페
뮈라 왕조 보르본양시칠리아 왕조
조아키노 나폴레오네 페르디난도 4세 }}}}}}}}}
Federico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생몰년도 1452년 4월 19일 ~ 1504년 11월 9일
출생지 나폴리 왕국 나폴리
사망지 프랑스 왕국 플레시 레 투르 성
재위
기간
나폴리 왕국 국왕 1496년 - 1501년
아버지 페르디난도 1세
어머니 클레르몽의 이자벨
형제자매 알폰소 2세, 엘레오노라, 조반니 다라고나, 베아트리체, 프란체스코
배우자 안 드 사보이아, 이사벨라 델 발레
자녀 카를로타, 페르디난도, 줄리아, 알폰소, 이사벨라, 체사르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나폴리 왕국 15대 국왕.

2. 생애

1452년 4월 19일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에서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와 코페르티노 백작 바르톨로뮤 '트리스탄' 드 클레르몽의 장녀인 이자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알폰소 2세, 엘레오노라, 조반니 다라고나, 베아트리체, 프란체스코가 있었다. 1464년부터 1473년 까지 풀리아 지방에서 나폴리 국왕의 부관 역할을 수행하면서 세금 징수를 감독하고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무역 협정을 감독했다. 또한 아버지가 여러 영주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외교활동을 벌일 때 참여했다. 1472년 3월 아베르사에서 세니갈리아의 영주이자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잔 델라 로베레를 영접했고, 1473년 8월 30일에는 파엔차의 군주 카를로 말프레디를 접견했다. 한때 부르고뉴국의 대공인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혼담이 오갔으나 무위에 그쳤다.

147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앙주를 차지하면서 나폴리 왕위에 대한 앙주 공국의 권리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조카딸 안 드 사보이아와 페르디난도의 아들 페데리코의 결혼을 제안했지만, 프랑스의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우려한 페르디난도 1세는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르디난도 1세는 페데리코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딸 쿠니쿤데와 결혼시킴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이 북이탈리아 공략을 도와주기를 희망했지만,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이탈리아 정세에 뛰어들기를 꺼린 프리드리히 3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밀라노와의 전쟁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자, 밀라노를 압박하고자 프랑스의 손을 잡기로 하고 1478년 루이 11세의 제안에 따라 페데리코와 안 드 사보이아를 결혼시켰다.

1483년 나폴리 왕국-교황령-페라라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페르디난도 1세는 페데리코에게 50척의 갤리선을 줘서 안코나 해안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는 거센 반격을 해 이들을 격파했다. 이후 베네치아 함대가 갈리폴리, 나르데, 모노폴리 등 오트란토 일대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공략했다. 페르디난도는 베네치아를 무력으로 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484년 8월 27일 베네치아에 평화를 요청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나폴리 왕국이 빼앗아간 베네치아의 영토와 베네치아인들이 빼앗아간 오트란토 일대의 영토를 맞교환하며, 페라라는 일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되돌려받는 대신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1485년 나폴리 귀족들이 페르디난도 1세와 장남 알폰소의 귀족 억압 전쟁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디난도 1세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과 협상하기 위해 차남 페데리코를 사절로 보냈다. 페데리코는 반란군의 본거지인 살레르노에 들어가 협상을 시작했다. 이때 귀족들이 잔혹하기 짝이 없는 알폰소를 몰아내고 왕위 후계자가 되라고 꼬드겼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모든 자연법과 아버지의 뜻, 그리고 동생으로서의 도리를 볼 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귀족들은 페데리코를 반란에 끌어들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감옥에 가둔 뒤 교황의 깃발을 성루에 내걸었다. 이후 감옥에 갇혀 있다가 귀족들이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권고에 따라 페르디난도 1세와 화해하면서 풀려났다.

1494년 1월 25일 페르디난도 1세가 사망한 뒤 형 알폰소 2세가 새 국왕에 올랐다. 1495년 초 프랑스군이 나폴리로 쳐들어오자, 페데리코는 피렌체와 연합하여 맞섰으나 속절없이 패했다. 이에 공포에 질린 알폰소 2세는 아들 페르디난도 2세에게 양위한 뒤 시칠리아로 달아났다. 페르디난도 2세는 어떻게든 프랑스군에 대항하려 했으나 귀족들이 대거 프랑스군에 귀순해버리면서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스키야 섬으로 피신했다. 1495년 2월 22일 나폴리에 입성한 프랑스 국왕 샤를 8세는 '카를로 4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오른 뒤 페데리코를 불러 조카를 설득해 나폴리 왕국의 계승권을 포기하게 한다면 프랑스에 있는 많은 영지와 보물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페데리코는 "그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왕으로서 살고 죽기를 서원했다"라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1495년 5월 샤를 8세가 프랑스로 철수한 뒤 페르디난도 2세가 7월 7일 나폴리에 입성하자, 즉시 다른 귀족들과 함께 페르디난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96년 9월 7일 말라리아에 걸려 임종을 눈앞에 뒀던 페르디난도 2세는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 삼촌 페데리코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른 페데리코는 샤를 8세가 또다시 나폴리로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하여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2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1498년 재침공을 준비하던 샤를 8세가 사고사로 사망한 뒤 프랑스의 새 국왕에 오른 루이 12세는 나폴리 왕국을 공략하려 했던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로 마음먹고,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은 뒤 1499년 밀라노를 전격 침공해 1500년 노바라 전투에서 밀라노 군주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생포하고 밀라노 공략에 성공했다. 그 후 루이 12세는 1500년 11월 11일 페르난도 2세와 '그라나다 비밀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를 포함한 북쪽의 아브루치, 캄파냐를 영유하고,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은 남쪽의 칼라브리아, 풀리아를 점유하기로 했다.

1501년 프랑스 왕국군이 나폴리 왕국의 변경지대에 접근하자, 그라나다 비밀 협약이 맺어진 것을 까맣게 몰랐던 페데리코는 페르난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페르난도 2세가 즉시 함대를 이끌고 오자, 페데리코는 칼라브리아 요새들을 개방했다. 그러나 그라나다 협약 내용이 곧 공개되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나폴리 왕국을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협공하자, 친족의 배신에 깊은 충격을 받은 페데리코는 프랑스군에 귀순한 뒤 왕위를 루이 12세에게 넘겼다. 루이 12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그를 메인 백작에 선임하고 종신 연금을 지급해줬다. 그 후 가족과 함께 나폴리를 떠난 페데리코는 플레시 레 투르 성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504년 11월 9일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이 나폴리 왕국을 양분하는 형태로 종결되는 듯했지만, 1503년 페르난도 2세가 곤살로 데 코르도바 장군을 앞세워 프랑스군을 요격해 체라놀라 전투,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나폴리 왕국 전역에서 몰아내면서 프랑스 세력이 나폴리에서 일소되었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자 페르난도 2세의 아내였던 이사벨 1세가 사망하고 그녀를 이은 딸 후아나를 섭정하여 사실상 스페인 전역의 단독 통치자가 된 페르난도 2세는 나폴리 왕관을 스페인 왕관에 병합하고 남부 이탈리아 전역을 부왕령으로 삼았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