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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공 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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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1a0><colcolor=#ffffff> 부르고뉴의 공작
샤를 1세
Charles Ier de Bourgogne
파일:charles the bold duke of burgundy.jpg
출생 1433년 11월 10일
부르고뉴 공국 디종
사망 1477년 1월 5일 (향년 43세)
로렌 공국 낭시
재위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1467년 6월 15일 ~ 1477년 1월 5일
배우자 발루아의 카트린 (1440년 결혼 / 1446년 사망)
부르봉의 이자벨 (1454년 결혼 / 1465년 사망)
요크의 마거릿 (1468년 결혼)
자녀 마리 드 부르고뉴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
어머니 포르투갈의 이자벨
형제 앙투안, 조제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몽레리 전투2.3. 부르고뉴국의 지배자2.4. 부르고뉴 전쟁
3. 사후의 이야기4. 가족
4.1. 아내4.2. 자녀

[clearfix]

1. 개요

부르고뉴국의 공작. 부르고뉴 본토와 저지대 국가 사이를 연결하고 중프랑크 왕국을 부활시키고 국왕이 되려는 야망을 이루려 했지만, 부르고뉴 전쟁에서 패망했다.

2. 생애

2.1. 초년기

1433년 11월 10일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인 디종의 부르고뉴 공작 궁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이고, 어머니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랭커스터의 필리파의 딸인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였다. 형제 앙투안과 조제는 유년기에 사망했기에, 그는 일찍부터 선량공 필리프의 유일한 적출자로서 선량공 필리프의 영지 전체를 상속받을 후계자로 예정되었다. 생후 3주인 11월 30일에 아버지로부터 황금 양모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으며, 1살 때부터 가정교사인 마담 드 빌레르 라 페이의 집에서 살았다.

이후 샤롤레 백작에 선임된 샤를은 백년전쟁에 활약했던 전직 군인 장 4세 도시로부터 전쟁 기술을 교육받았고, 부르고뉴 출신 학자 앙투안 하네론으로부터 권력을 관리하는 방법을 숙지했으며, 영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등 여러 외국어를 익혔다. 그는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의 아내이자 쟈신의 이모인 마리 드 부르고뉴의 자녀들인 장 1세 드 클레베, 카트린과 함께 자랐다.

1452년 겐트 주민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 작전에 참여해 루펠몽트 전투와 가베레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반란 진압에 큰 공을 세웠으며, 브뤼셀에서 열린 기사 토너먼트에 참여해 좋은 모습을 보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몇 년 후인 1456년 9월 프랑스 도팽 루이가 아버지 샤를 7세를 피해 부르고뉴로 망명해 브뤼셀 남쪽의 주나프 성에서 은신했다. 샤를이 훗날 숙적이 될 왕자와 교류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2.2. 몽레리 전투

1461년 샤를 7세가 사망하고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된 루이 1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대귀족들의 힘을 약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1465년, 부르봉 공작 장 2세 드 부르봉, 베리 공작 샤를 드 발루아[1],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알랑송 공작 장 2세 달랑송, 로렌 공작 장 2세 등과 함께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연맹의 수장을 맡아 루이 11세에 반기를 들었다. 1465년 7월 16일, 샤를은 기병 5,000명을 포함한 1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몽레리 전투에서 15,000명의 왕실군과 격돌했다. 첫번째 교전에서 부르고뉴 성봉대 지휘관인 생폴 백작 루이 드 뤽상부르가 피에르 드 브레제가 이끄는 왕실군 선봉대를 격파한 뒤 그에게 전령을 보내 승리를 알렸다. 이후 생폴 백작의 기병들은 전리품을 확보하거나 몸값을 받을 수 있는 포로를 잡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말에서 내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때 피에르 드 브레제가 병사들을 수습한 뒤 반격에 착수했고, 생폴 백작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압도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피에르 드 브레제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부르고뉴 본대로 쳐들어갔다. 당시 샤를은 생폴 백작이 승리를 거뒀다는 소식을 전하자 안심하고 천천히 진군하고 있었다. 피에르 드 브레제는 방심하고 있던 적 본대를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고, 부르고뉴군은 여러 분대로 분열되어 일부는 후퇴하고 다른 일부는 전장을 완전히 이탈했다. 그러나 피에르 드 브레제는 적을 추격하던 중 전사했고, 지휘관이 사라진 프랑스 기병대는 부르고뉴 수송대를 약탈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그 사이, 생폴 백작이 군대를 수습한 뒤 반격을 가해 이들을 몰아냈다. 이후 본대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루이 11세의 프랑스군과 부르고뉴군이 본격적으로 맞붙었는데, 좌익 부대를 이끌고 있던 루이 11세의 삼촌인 메인 백작 샤를 3세가 용담공 샤를이 몸소 이끄는 부르고뉴 우익 부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전체 병력의 1/3과 함께 도주했다.

용담공 샤를이 메인 백작의 군대를 추격하는 사이, 루이 11세는 공작이 떠나고 없는 부르고뉴군과 혈투를 치른 끝에 격파했다.[2] 하지만 루이 11세는 후퇴하는 적을 쫓지 않고 군대를 재편성한 뒤 몽레리 고지로 철수한 뒤 메인 백작이 도망친 남쪽으로 기병대를 보내 메인 백작에게 자신과 합류하라고 알리게 했다. 그동안 용담공 샤를은 부관들의 연이은 간언에 굴복해 메인 백작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전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곧 자신의 다른 부대가 흩어졌으며, 왕실군이 몽레리 언덕에 자리잡은 걸 알게 되자, 부대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중 프랑스 기병대가 그를 도중에 습격하면서 기병전이 벌어졌는데, 샤를은 격투 도중에 칼에 맞아 목을 다쳤지만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7월 16일 밤 선량공 필리프의 사생아이자 주요 부르고뉴 장성인 앙투안 드 부르고뉴, 루이 드 뤽상부르가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면서 전투 현장에 부르고뉴군의 숫자가 훨씬 많아지자, 루이 11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능선을 따라 불을 피우게 한 뒤 코르베유를 경유해 파리로 철수했다. 다음날 몽레리 고지로 진격한 부르고뉴군은 왕실군이 어젯밤에 철수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용담공 샤를은 자신이 전장을 장악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했다. 플란데런 출신의 연대기 작가 필리프 드 코미네스에 따르면, 샤를은 몽레리 전투 후 자신의 탁월한 전술적 능력 덕분에 몽레리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확신해, 이후 어떤 조언도 듣기를 거부하고 자기 뜻만 밀어붙였다고 한다.

사흘 후 브르타뉴군, 로렌군과 합세한 샤를은 한달 후 파리를 포위했다. 그러나 몇 주 후 공익 연맹 측이 식량 부족에 시달린 데다 타 지역의 왕실군이 접근해오는 것에 압박감을 느낀 끝에, 그들은 루이 11세에게 평화 협상을 맺자고 요청했다. 루이 11세 역시 협상을 받아들였고, 양자는 1465년 10월 5일 콩플랑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부르고뉴 공국은 아미앵, 아베빌, 기네스, 생캉탱, 불로뉴 백국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1466년 8월 25일, 샤를은 부르고뉴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디낭을 습격해 파괴했다. 디낭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부르고뉴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꾀했던 도시들은 일제히 복종했다.

2.3. 부르고뉴국의 지배자

1467년 6월 15일, 선량공 필리프가 사망했다. 샤를은 부르고뉴 공국, 브라반트 공국, 로티에 공국, 림부르크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플란데런 백국, 아르투아 공국, 팔라티노 공국, 에노, 홀란트, 나무르, 질란트, 플리슬란트 등의 작위와 소유물을 물려받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 후작 작위도 물려받았다. 그는 이 광대한 영역을 더욱 확장해, 저지대 국가와 부르고뉴 본토를 완전히 연결하고, 오래전에 무너진 중프랑크 왕국을 부활시켜 국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행정기관과 법원을 개편하여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해 세수입을 대폭 늘린 후, 이를 발판삼아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키웠다. 그는 부르고뉴 중기병, 플랑드르 중보병, 이탈리아 경무장 보병 및 석궁병, 독일 아커비저(arquebusier: 화승총병), 잉글랜드 장궁병 및 하마기사로 구성된 혼성군을 갖췄는데, 그 수는 30,000명에 달했다. 여기에 1470년대 초부터 대포로 무장한 포병대를 양성하여 적을 화력으로 압도하고자 노력했다.

1468년, 샤를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여동생 마거릿과 결혼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가 노르망디를 침공하도록 부추기고, 프랑스군이 노르망디를 방어하러 진격했을 때를 틈타 파리를 공격해 루이 11세를 압박해 부르고뉴국의 완전 독립을 받아들이게 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지원을 받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반란을 일으켜 1469년 7월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는 바람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루이 11세는 샤를의 강력한 권세를 두려워해 그와 평화 협정을 논의하고자 샤를의 거주지였던 페롱을 찾아가 평화 협정을 논의했다. 샤를은 평화 협정을 맺는 대가로 솜 지역과 프랑스 영토에 대한 주권을 확인받기를 원했다.

루이 11세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협상이 거의 타결되는 듯 했으나, 샤를은 리에주가 프랑스 사절들의 부추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는 루이 11세를 페롱에 감금한 뒤 협박을 가한 끝에 1468년 10월 14일에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평화 협약을 맺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후 루이 11세를 대동한 채 리에주 토벌에 나서 1468년 10월 30일 밤에 600명의 용병대와 함께 리에주를 기습 공략한 뒤 철저히 약탈했다. 이 소식을 접한 라인강 연안 도시들은 자신들과 경제적으로 밀접한 교류를 하던 리에주를 동정했고, 샤를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 1468년 12월, 브뤼셀에서 페롱 조약이 최종적으로 발효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부르고뉴 공작은 1435년 아라스 조약과 1465년 콩플랑 조약의 유효성을 확인받는다.
2. 부르고뉴 공작은 아미앵 대표를 임명할 권리가 있다.
3.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는 삼부회 관할권에서 분리된다.
4. 마코네 지역에 대한 삼부회의 항소권은 포기된다.
5. 샹파뉴와 브리는 프랑스 내 샤를의 영지로 주어진다.
6. 미래에 프랑스 왕이 아라스, 콩플랑, 페롱 조약을 위반하고 그 적용을 막거나 약속을 포기한다면, 프랑스 왕국의 모든 영토에 있는 그의 모든 신하는 왕관으로부터 해방되며,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 왕의 후계자로 인정받는다.

샤를은 페롱 조약을 통해 강대한 권세를 확보했지만, 프랑스 왕을 모욕하고 포로로 가두기까지 한 일로 인해 루이 11세를 비롯한 프랑스 왕실의 반감을 샀다. 루이 11세는 기회만 되면 페롱 조약을 깨뜨리고 부르고뉴 공작과 맞서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1469년 5월, 샤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사촌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티롤 백작 지기스문트에게 50,000 플로린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상부 알자스와 페레트 주를 비롯한 영토와 몇몇 자유도시의 영유권을 양도받았다. 이제 그의 영토는 알자스 상류, 브리스가우, 바덴 변경백국까지 미쳤다. 또한 샤를은 지기스문트가 외적의 공격을 받을 시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샤를은 스위스 연방을 상대하는 데 관심이 없었지만, 이 협약을 잘 활용하면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 일대와 부르고뉴 본토를 연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알자스 지방에 페터 폰 헤겐바흐를 지방행정관으로 파견하여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하게 하였고, 자신은 로렌 공국을 상대로 공세를 지속한 끝에 낭시를 공략하고 로렌 공작 르네 2세를 복종시켰다.

1470년 12월 3일, 루이 11세는 앙부아즈에서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영주, 고위 성직자, 군사 지도자로 구성된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 해안을 습격하라고 부추겼으며, 프랑스 본토를 침략할 태세를 보이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에 삼부회는 페롱 조약을 무효로 처리하기로 결의했다. 이 소식을 접한 샤를은 프랑스 왕이 페롱 조약의 적용을 포기하면, 부르고뉴 공작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협약 내용에 따라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1471년 1월, 그의 군대는 피카르디와 마코네에서 공세를 개시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프랑스군이 반격을 가해 피카르디를 침공하고 아미앵을 공략했다. 샤를은 루이 11세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동맹을 맺었고,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의 복위를 지원했다.

1471년 11월, 샤를은 페롱 조약에 포함된 '불이행 조약'에 따라 자신은 프랑스 왕의 종주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헀다. 그는 자신을 신의 권리에 의한 주권자라고 선언하고, 모든 영지를 통일되고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전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샤파이어, 루비, 진주로 장식된 금 왕관을 특별히 제작하도록 했다. 1472년 6월, 루이 11세의 공세에 직면한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구원 요청에 부응해 피카르디를 전격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네슬레 시를 공략한 뒤 그곳의 수비대장 프티 피카르를 교수형에 처했으며, 궁수들의 손을 자르거나 눈을 뽑거나 물에 빠뜨려 죽였고,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고, 도시 전체를 방화했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네슬레 시내 성모승천 교회가 처참하게 파괴되고 수많은 시체와 피로 뒤덮힌 걸 보고 십자가를 그으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전망이다! 나는 좋은 정육점을 가지고 있구나."

네슬레 시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이와 몽디디에 시민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그 후 샤를은 1472년 6월 27일에 보베로 진군한 뒤 항복을 권했지만 거절당하자 7월 22일까지 공성전을 벌였지만 보베 수비대와 주민들의 처절한 저항에 가로막혀 큰 피해만 입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루이 11세가 급파한 구원군이 당도하자 보베 공략을 포기하고 피카르디로 철수했다. 이후 1472년 11월 3일, 샤를롸 루이 11세는 새로운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1473년 9월 30일, 샤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를 트리어에 초빙하여 "부르군트, 로타링기아, 또는 프리지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또한 새로 건국될 '로타링기아 왕국'이 로렌 공국, 사보이 공국, 클레베 공국의 주권자가 되는 걸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이에 동의 의사를 표현했고, 샤를은 이에 대한 답례로 3일간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대관식을 이듬해 2월로 연기하겠다고 하더니 11월 25일 이른 아침 작별 인사도 없이 본국으로 도망쳤다. 샤를이 자기를 붙잡아 신성 로마 제국 황위마저 내놓으라고 요구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인정을 받아 국왕이 되려던 샤를의 계획은 틀어졌다.

한편, 스위스 연방은 샤를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위협을 느겼다. 그들은 라인 강 상류 유역의 여러 자유시와 상호 교류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샤를이 자유시들을 통제하자, 스위스 연방, 특히 자유시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바젤 시는 샤를이 무역을 아예 끊어버릴까 두려워했다. 여기에 부르고뉴를 어떻게든 견제하려 하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부추기자, 그들은 슈트라스부르크, 콜마르, 셀레슈타트 등 라인 강변 자유시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부르고뉴국과 대립했다.

1474년, 샤를은 쾰른 선제후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축출된 대주교 루프레히트와 협상한 끝에 그를 보호해주고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신, 매년 공납금을 지불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알자스 지방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쾰른 대주교령으로 진격한 샤를은 그해 7월 노이스 시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전개했다. 지기스문트와 스위스 연방은 이러한 샤를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1474년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오랜 전쟁을 종식했다. 이후 지기스문트는 샤를에게 알자스의 영지를 재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지기스문트와 스위스 연방, 그리고 라인강 상류 유역의 여러 자유시는 반 부르고뉴 동맹을 체결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 전쟁의 막이 올랐다.

2.4. 부르고뉴 전쟁

1474년 11월, 알자스로 출진한 스위스군은 에리쿠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을 격파했다. 당시 샤를이 파견한 행정관 페터 폰 헤겐바흐가 권력 남용, 강탈, 지역 주민에 대한 학대, 알자스 지역 관습 무시를 일삼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알자스 자유시들이 이에 호응하여 헤겐바흐를 붙잡아 처형하고, 스위스군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지기스문트가 파견한 오스트리아군이 스위스군과 합세하였다. 이후 연합군은 프랑슈콩테의 쥐라를 함락시켰다.

한편, 샤를은 노이스 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중 스위스군이 알자스에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스위스 연맹과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안했지만, 스위스 연방은 샤를이 강제로 점거한 알자스 자유시들을 모두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샤를은 이런 상황에서도 노이스 시 공방전을 지속했지만 해가 넘기도록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475년 6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급파한 군대가 인근에 도착하자 결국 철수했다. 이후 스위스 연방은 샤를과 동맹을 맺은 사보이아 공국과 대적했다. 1475년 베른 시가 사보이아 공국의 보 주를 공략했고, 1475년 11월 13일 시옹의 라 플라타 전투에서 스위스 연방군이 사보이아 공국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상황이 이처럼 다급해지자, 샤를은 1476년 2월 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사보이아 공국의 영역이었으나 스위스 연방에게 탈취당한 그랑송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그랑송 수비대는 샤를이 가져온 수많은 대포의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샤를은 412명의 그랑송 수비대를 붙잡은 뒤, 그랑송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스위스군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처형했다. 그는 이를 통해 스위스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스위스군은 샤를의 잔혹한 행위에 격분하여 오히려 전의를 끌어올렸다.

이후 1476년 3월 2일에 벌어진 그랑송 전투는 3시간 동안 팽팽하게 이어졌다. 그러던 중, 샤를은 둔덕에 진을 친 스위스군을 평원으로 유인하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한창 전투를 치르고 있던 부르고뉴군은 물러나라는 명령을 받자 퇴각하라는 소리로 오해하고 전의를 잃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스위스군이 후방에 도착해 부르고뉴군을 공격했고, 부르고뉴군은 패닉에 빠져 사방으로 도주했다. 스위스군은 부르고뉴군이 버리고 떠난 숙영지에서 무수한 전리품을 발견하고, 붉은 벨벳 깃발과 보석이 풍부한 무기를 확보했으며, 대포 400문을 탈취했다.

파일:모랏 전투 패배 후 용담공 샤를의 도주.jpg
외젠 뷔르낭 작, <모랏 전투 패전 후 용담공 샤를의 도주>, 1894년.

샤를은 로잔에서 군대를 재편성한 뒤 1476년 5월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베른을 침공해 베른 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모랏 요새를 상대로 6월 내내 포화를 퍼부은 끝에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수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도시 내부로 침투하지 못했다. 샤를은 스위스군이 베른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이를 막기 위해 6월 21일 사린 강으로 진출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스군이 오지 않자, 그는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스위스군은 인근 숲에 매복하고 있었고, 6월 22일 새벽 주둔지로 돌아가고 있던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모랏 전투에서, 샤를은 완패하여 전 병력의 약 1/3을 상실했다. 샤를은 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가 제네바 호수 기슭에 있는 모르슈 마을로 피신한 뒤, 그곳의 미사에 참여한 후 제네바로 이동했다. 그 후 샤를은 부르고뉴로 쓸쓸히 귀환했고, 로렌 공작 르네 2세는 이 틈을 타 샤를에게 반기를 들어 1476년 10월 6일 낭시를 탈환했다.

1476년 12월, 샤를은 8,000명 가량의 병력을 재건한 뒤 낭시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그는 낭시를 포위한 뒤 르네 2세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기 전에 서둘러 함락시키려 했다. 그러나 낭시 수비대가 끝까지 항전하면서 조기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게다가 그해 겨울이 무척 혹독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악화되었고 탈영병이 갈수록 늘어났다. 장군들은 샤를에게 포위를 풀고 퐁타무송 또는 메츠로 철수한 뒤 봄에 공세를 재개하자고 제안했지만, 샤를은 적의 구원병이 오기 전에 끝을 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사이, 르네 2세가 이끄는 로렌군 12,000명과 스위스군 10,000명이 여러 분견대로 쪼개진 채 낭시로 접근했고, 1477년 1월 4일 낭시 인근의 생니콜라에 집결했다.

당시 샤를에게는 4천 가량의 병력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적이 근방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하자 급히 철수했다간 적의 추격으로 와해할 것이라 여기고, 자빌 인근 고지에 진영을 세우고 농성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1월 5일, 현장에 도착한 로렌-스위스 연합군은 자빌 고지에 진을 치고 있는 부르고뉴군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르네 2세는 정찰병들의 보고를 종합한 결과 부르고뉴군이 소뤼프 숲을 통과하여 우회하는 길을 제대로 방어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 길을 통해 적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했다. 뒤이은 연합군의 2차 공세에 맞서 항전하던 부르고뉴군은 로렌 분견대가 갑자기 소뤼프 숲에서 뛰쳐나와 측면을 공격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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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페이엔 페랭 작, <낭시 전투 후 발견된 용담공 샤를>, 1865년.

샤를은 부시에르오담 다리로 후퇴해 메츠로 퇴각하려 했지만, 그 다리를 지키고 있던 부르고뉴 용병대장 니콜라 드 몽포르가 샤를을 배신하고 다리를 건너려던 부르고뉴 장병들을 저지했고, 뒤이어 추격해온 스위스 용병대가 무참히 학살했다. 샤를은 수십 명의 기사와 함께 퇴로를 뚫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다 스위스의 할버드병이 휘두른 도끼에 머리를 가격당하여 낙마한 뒤 스위스 병사들에 의해 사지가 절단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낭시 전투 이틀 후, 샤를의 시신은 낭시의 에탕생장 습지 연못 가장자리에서 알몸인 채 발견되었다. 두개골엔 미늘창에 관통당한 흔적이 있었으며, 늑대가 뺨을 갉아먹어서 이빨이 쪼개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러 팔다리가 잘려 있었는데, 내항성 발톱 및 긴 손톱을 통해 시체가 겨우 식별되었다.

3. 사후의 이야기

샤를의 유해는 낭시로 옮겨져 5일 동안 전시된 뒤 낭시의 성 조르주 성당에 안장되었다. 샤를의 미망인인 요크의 마거릿은 시신 반환을 요청했지만, 로렌 공작 르네 2세는 거절했다. 샤를은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 외에는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기에, 루이 11세는 "신하가 후사 없이 죽었으니 영지를 회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부르고뉴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저지대 일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마리가 겐트에 유폐되었다.

이에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외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심복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막시밀리안은 즉시 사비를 털어 1,200명의 기사를 동원하여 겐트로 가서 마리를 구출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침공을 막아주고, 피카르디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을 프랑스에게 넘기고 저지대 일대와 프랑슈콩테 일대를 아내에게 넘기는 것으로 정리했다.

그 후 합스부르크 왕조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 왕국부르고뉴국에 속했던 영지의 소유권을 놓고 오래도록 전쟁을 벌였다. 1550년 9월 24일, 카를 5세는 부르고뉴 공국에 대한 종주권이 자신이 속한 합스부르크 왕조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낭시의 성 조르주 성당에 있던 외증조부 샤를의 유해를 브뤼헤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서 1482년에 사망한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와 나란히 안장했다. 1678년, 루이 14세가 네이메헌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조로부터 피카르디와 프랑슈콩테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면서, 프랑스 왕국은 200여 년만에 부르고뉴 전역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4. 가족

4.1. 아내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부르봉의 이자벨(Isabella of Bourbon)
1녀 부르고뉴 여공작 마리
(Marie, Duchess of Burgundy)
1457년 2월 13일 1482년 3월 27일 막시밀리안 1세
슬하 1남 1녀[3]

[1] 샤를 7세의 막내 아들[2] 이때 루이 11세가 타고 다니던 말이 총에 맞는 바람에 왕이 쓰러지면서 왕실군이 한때 동요했지만, 루이 11세는 새 말을 타고 군대 대열을 돌며 독려해 혼란을 잠재웠다.[3] 펠리페 1세, 사보이아 공작부인 마르게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