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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은 그랑송에서 그의 재물[1]을, 무르텐(모랏)에서 그의 용기[2]를, 낭시에서 그의 피를 잃었다. (Karl der Kühne verlor bei Grandson das Gut, bei Murten den Mut, bei Nancy das Blut.)
―스위스 속담
―스위스 속담
프랑스어: Guerres de Bourgogne 독일어: Burgunderkriege |
2. 배경
부르고뉴는 프랑스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북쪽은 샹파뉴, 동쪽은 프랑슈콩테, 남쪽은 중앙 산지, 서쪽은 세르, 루아레와 접한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 부르군트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프랑크 왕국에게 병합되었고, 843년 프랑크 왕국이 베르됭 조약으로 3개로 쪼개질 때 로타리우스 1세가 이끄는 중프랑크 왕국에 속했다가,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되었다. 이후 프랑스 왕국으로 흡수되었다가 카페 왕조 제3대 왕 앙리 1세가 동생 로베르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앉히면서 부르고뉴 공국이 탄생했다.부르고뉴 공국은 300여 년간 프랑스 왕실의 든든한 우군으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15살의 어린 나이에 승마 사고로 요절하면서 카페-부르고뉴 가문의 대가 끊겼다. 이에 발루아 왕조의 장 2세가 작위를 상속받은 후 막내 아들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앉혔다. 이리하여 탄생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결혼 동맹을 적극 활용하여 세력을 급격히 키웠다.
장 2세의 막내 아들 필리프, 즉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하고 1384년 아내의 부친이자 플랑드르 백작인 루이 2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사위의 자격으로 프랑스의 플랑드르, 아르투아, 느베르, 르텔을 모두 상속받았다. 이로서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동부와 북부에 걸쳐 거대한 영지를 확보했다.
1404년 필리프 2세가 사망한 후 장 1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상속받았으나, 백년 전쟁 도중 정신병 환자였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대신할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아르마냑파와 격렬하게 대립하다가 도팽 샤를과 다리 위에서 협상하던 중 샤를 도팽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뒤를 이은 선량공 필리프는 프랑스 발루아 왕실과 인연을 끊고, 잉글랜드 왕국의 랭커스터 왕조와 동맹을 맺었으며, 잔 다르크를 잡아다 잉글랜드군에 넘겨 화형에 처하게 했다. 그러나 전세가 기울자 아라스 조약을 체결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는 대신 프랑스 왕국에 대한 봉건 의무를 면제받고, 볼로뉴, 베르망두아 등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선량공 필리프는 영지를 북쪽으로 계속 확대하여 1429년 나뮈르를 사들이고, 1424년 부터 1433년까지 에노 백작령을 줄기차게 공격한 끝에 에노, 홀란트, 프리슬란트, 제일란트를 점령했다. 여기에 1430년 사촌인 샹폴의 필리프가 사망하자 그로부터 브라반트와 림부르크, 안트베르펜도 상속받았고, 1443년에 룩셈부르크도 구매했다. 선량공 필리프는 1435년부터 스스로를 '서부 대공작'이라고 칭하며 위세를 떨쳤다.
1467년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사망한 뒤, 용담공 샤를이 부친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그는 장차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국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부르봉 공작 장 2세, 아르마냑 백작 장 5세 등 많은 귀족이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슬쩍 끼여들었다가 루이 11세로부터 솜 강 연안의 영토를 받아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를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한편, 북부의 저지대 일대와 부르고뉴를 연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용담공 샤를은 행정기관과 법원을 개편하여 중앙집권 정책을 추진해 세수입을 대폭 늘린 후, 이를 발판삼아 군사력을 대대적으로 키웠다. 그는 부르고뉴 중기병, 플랑드르 중보병, 이탈리아 경무장 보병 및 석궁병, 독일 아커비저(arquebusier: 화승총병), 잉글랜드 장궁병 및 하마기사로 구성된 혼성군을 갖췄는데, 그 수는 30,000명에 달했다. 여기에 1470년대 초부터 대포로 무장한 포병대를 양성하여 적을 화력으로 압도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부르고뉴국의 군사력은 매우 강해져서, 1466년 리에주 전투와 1467년 브뤼템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잇달아 승리했다. 이후 샤를은 루이 11세와 휴전 협정을 맺은 뒤 동부 전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용담공 샤를 시기 부르고뉴국의 영역
1469년 5월, 용담공 샤를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사촌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티롤 백작 지기스문트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상부 알자스와 페레트 주를 비롯한 영토와 몇몇 자유도시의 영유권을 양도받았다. 1473년에는 헬러 공작 아놀드 폰 에그몬트의 유산을 확보했다. 이제 부르고뉴 영지를 연결하는 데 필요한 영역은 알자스-로렌 지방만 남았다.
1473년 가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를 트리어에 초빙하여 "부르군트, 로타링기아, 또는 프리지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이에 동의 의사를 표현했고, 샤를은 이에 대한 답례로 3일간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대관식을 이듬해 2월로 연기하겠다고 하더니 11월 25일 이른 아침 작별 인사도 없이 본국으로 도망쳤다. 샤를이 자기를 붙잡아 신성 로마 제국 황위마저 내놓으라고 요구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국왕이 되려던 샤를의 계획은 틀어졌지만, 그가 조만간 국왕이 되는 건 기정사실로 보였다.
이렇듯 용담공 샤를이 군사력을 급속도로 키우고 영역을 확장하면서 부르고뉴 왕국을 세울 야망에 불타고 있을 무렵, 알자스 지방의 스위스 연방도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상대로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독립 전쟁을 벌인 끝에 독립을 쟁취하고, 여세를 몰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는 라인 강변의 도시들을 하나씩 공략했다. 스위스군은 1468년 7월 29일 발트슈타트 시를 포위한 뒤 며칠 간 포위공격한 끝에, 8월 27일 티롤 백작 지기스문트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발트슈타트 시를 계속 소유하는 걸 인정하는 대신, 스위스 연방에게 100,000길더를 배상금으로 지불하는 것이었다.
지기스문트는 배상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용담공 샤를에게 50,000길드 상당의 돈을 빌리면서, 그 대가로 상부 알자스와 페레트 주를 비롯한 영역과 발트슈타트 등 몇몇 자유도시의 영유권을 양도했다. 또한 샤를은 지기스문트가 외적의 공격을 받을 시 구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샤를은 스위스 연방을 상대하는 데 관심이 없었지만, 이 협약을 잘 활용하면 플랑드르를 비롯한 저지대 일대와 부르고뉴 본토를 연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알자스 지방에 페터 폰 헤겐바흐를 지방행정관으로 파견하여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하게 하였고, 자신은 로렌 공국을 상대로 공세를 지속한 끝에 낭시를 공략하고 로렌 공작 르네 2세를 복종시켰다.
스위스 연방은 샤를의 이러한 정책에 큰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라인 강 상류 유역의 여러 자유시와 상호 교류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샤를이 자유시들을 통제하자, 스위스 연방, 특히 자유시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바젤 시는 샤를이 무역을 아예 끊어버릴까 두려워했다. 여기에 부르고뉴를 어떻게든 견제하려 하던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부추기자, 그들은 슈트라스부르크, 콜마르, 셀레슈타트 등 라인 강변 자유시들과 독독한 관계를 맺으면서 부르고뉴국과 대립했다.
1474년, 용담공 샤를은 쾰른 선제후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축출된 대주교 루프레히트와 협상한 끝에 그를 보호해주고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신, 매년 공납금을 지불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알자스 지방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쾰른 대주교령으로 진격한 샤를은 그해 7월 노이스 시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전개했다. 지기스문트와 스위스 연방은 이러한 샤를의 행보에 위협을 느끼고, 1474년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오랜 전쟁을 종식했다. 이후 지기스문트는 샤를에게 알자스의 영지를 재구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샤를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지기스문트와 스위스 연방, 그리고 라인강 상류 유역의 여러 자유시는 반 부르고뉴 동맹을 체결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1474년 11월 알자스로 출진한 스위스군은 에리쿠르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을 격파했다. 알자스 자유시들은 이에 호응하여 헤겐바흐를 붙잡아 처형하고, 스위스군에게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으며, 지기스문트가 파견한 오스트리아군이 스위스군과 합세하였다. 이후 연합군은 프랑슈콩테의 쥐라를 함락시켰다. 한편 노이스 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샤를은 스위스군이 알자스에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접했지만 여전히 그들과 싸울 의사가 없었다.그는 사절을 보내 협상을 제안했지만, 스위스 연방은 샤를이 강제로 점거한 알자스 자유시들을 모두 해방시키지 않는다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샤를은 이런 상황에서도 노이스 시 공방전을 지속했지만 해가 넘기도록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475년 6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급파한 군대가 인근에 도착하자 결국 철수했다.
이후 스위스 연방은 용담공 샤를과 동맹을 맺은 사보이아 공국과 대적했다. 1475년 베른 시가 사보이아 공국의 보 지방을 공략하였고, 1475년 11월 13일 시옹의 라 플라타 전투에서 스위스 연방군이 사보이아 공국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상황이 이처럼 다급해지자, 용담공 샤를은 1476년 2월 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대대적인 반격을 감행했다. 그의 군대는 사보이아 공국의 영역이었으나 스위스 연방에게 탈취당한 그랑송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그랑송 수비대는 샤를이 가져온 수많은 대포의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샤를은 412명의 그랑송 수비대를 붙잡은 뒤, 그랑송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스위스군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처형했다. 그는 이를 통해 스위스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스위스군은 샤를의 잔혹한 행위에 격분하여 오히려 전의를 끌어올렸다. 이후 벌어진 그랑송 전투에서 패배한 샤를은 로잔에서 군대를 재편성했다. 1476년 5월 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재차 베른을 침공한 그는 베른 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모랏 요새를 상대로 6월 내내 포화를 퍼부은 끝에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수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도시 내부로 침투하지 못했다.
샤를은 스위스군이 베른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고, 이를 막기 위해 6월 21일 사린 강으로 진출하여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스군이 오지 않자, 그는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스위스군은 인근 숲에 매복하고 있었고, 6월 22일 새벽 주둔지로 돌아가고 있던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모랏 전투에서 샤를은 완패하여 전 병력의 약 1/3을 상실했다. 위세가 꺾인 샤를은 부르고뉴로 퇴각했고, 로렌 공작 르네 2세는 이 틈을 타 샤를에게 반기를 들어 10월 6일 낭시를 되찾았다.
용담공 샤를은 낭시를 탈환하기 위해 1476년 말 8,000명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낭시를 포위한 뒤 르네 2세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기 전에 서둘러 함락시키려 했다. 그러나 낭시 수비대가 끝까지 항전하면서 조기에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르네 2세가 이끄는 로렌군 12,000명과 스위스군 10,000명이 1477년 1월 5일 낭시 인근에 도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낭시 전투에서, 부르고뉴군은 7,00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파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용담공 샤를은 수십 명의 기사와 함께 퇴로를 뚫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다 스위스의 할버드병이 휘두른 도끼에 머리를 가격당하여 낙마한 뒤 그에게 상당한 원한을 품고 있었던 스위스 병사들에 의해 사지가 절단당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3] 이리하여 부르고뉴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결과
부르고뉴 전쟁은 한때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왕국이 될 뻔했던 부르고뉴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용담공 샤를은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 외에는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죽었고, 루이 11세는 "신하가 후사 없이 죽었으니 영지를 회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부르고뉴를 침공했다. 설상가상으로, 저지대 일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마리가 겐트에 유폐되었다.이에 마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외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대공에게 심복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고, 막시밀리안은 즉시 사비를 털어 1,200명의 기사를 동원하여 겐트로 가서 마리를 구출한 뒤 그녀와 결혼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의 침공을 막아주고, 피카르디와 프랑슈콩테를 제외한 부르고뉴 지방을 프랑스에게 넘기고 저지대 일대와 프랑슈콩테 일대를 아내에게 넘기는 것으로 정리했다.
1482년 3월 27일 마리가 낙마 사고로 사망한 뒤, 막시밀리안의 아들 필리프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막시밀리안은 섭정으로서 부르고뉴를 통치했다. 이후 펠리페 1세의 아들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는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포기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부르고뉴 탈환 시도를 포기하는" 캉브레 조약을 체결하면서, 부르고뉴는 완전히 프랑스 왕국으로 넘어갔다.
한편 스위스군은 대단한 위세를 떨치던 용담공 샤를을 무너뜨리면서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유럽의 여러 열강은 중기병들을 상대로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자기 위치를 끝까지 지키며, 포격 세례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전진하는 스위스 보병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리하여 스위스 용병은 유럽 대륙 전역에서 선망받는 용병대가 되었다. 루이 11세는 1479년 할버드와 파이크로 무장한 스위스 용병 6,000명을 프랑스군에 추가했고, 1497년에는 프랑스 왕의 근위병으로서 스위스 엘리트 생도 100명을 고용하는 제도가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들도 앞다퉈 스위스 용병대를 고용하였고, 독일 각지의 귀족과 영주들은 스위스 용병을 본떠 란츠크네히트를 조직했다.
스위스 연방은 부르고뉴 전쟁의 승리 이후 확장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베네치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대외 확장 정책을 포기하고 영세 중립국을 선언했으며, 이후로는 용병업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