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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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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초대 국왕 | |||
신성 로마 제국 카롤루스 왕조 제3대 황제 로타리우스 1세 Lotarius I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HLOTHARIVS IMPERATOR AUGUSTUS (로타리우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1] | ||
이름 | Lotarius(로타리우스, 라틴어) Ludher(루드헤르, 고대 갈로-로망스어)[A] Ludheren(루드헤렌, 고대 고지 독일어)[A] Lothar(로타어, 독일어) Lothaire(로테르, 프랑스어) Lotario(로타리오, 이탈리아어) Lotharius(로타리위스, 네덜란드어) | ||
출생 | 795년 | ||
프랑크 왕국 아키텐 | |||
사망 | 855년 9월 29일 (향년 59~60세) | ||
중프랑크 왕국 프룀 수도원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명목상) | ||
840년 6월 20일 ~ 855년 9월 29일 (15년) | |||
이탈리아 국왕 | |||
822년 ~ 855년 (33년) | |||
중프랑크 왕국의 국왕 | |||
843년 ~ 855년 9월 29일 (12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조부 | 카롤루스 대제 | |
부왕 | 루도비쿠스 1세 | ||
모후 | 에르망가르트 폰 헤스펭가우 | ||
형제 | 피핀, 아델라이드, 로트루드, 힐데가르트, 루트비히 2세, 기젤라, 샤를 2세, 아르눌프(사생아), 알파이스(사생아) | ||
배우자 | 투르의 에르멩가르다 | ||
자녀 | 루도비코 2세, 힐트루드, 에르멩가르다, 베르타, 기셀라, 로타르 2세, 프로방스의 샤를, 로트루데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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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제4대 국왕이자 카롤루스 제국(카롤링거 제국)의 제3대 황제였으며, 중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이었다. 주로 '로테르'로 불린다.2. 생애
2.1. 초기 생애
795년경 아키텐에서 카롤루스 대제의 부왕을 맡고 있었던 루도비쿠스 1세와 헤스펭가우(에스베 또는 에스바이) 백작 잉글램의 딸인 에르망가르트 폰 헤스펭가우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는 피핀, 로트루드, 힐데가르트, 루트비히 2세가 있었다. 그의 초기 생애는 전해지는 바 없지만, 아마도 조부인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에서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814년 1월 28일 카롤루스 대제가 붕어한 후 단독 황제가 된 루도비쿠스 1세는 로타리우스를 바이에른에 보내 그곳을 다스리게 하고, 일부 프랑크 관료들의 보필을 받도록 했다.2.2. <제국 상속령>(817년)
817년, 루도비쿠스 1세는 아헨 제국의회에서 제국의 승계를 규정하기 위한 <제국 상속령>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로타리우스는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가 되고 황제 직위를 물려받으며, 차남 피핀은 아키텐, 툴루즈, 셉티마니아에 대한 통치권을 물려받고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3남이었던 루트비히 2세는 바이에른, 카린티아, 보헤미아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역시 왕을 칭할 수 있었다. 이 <제국 상속령>은 819년 네이메헌에서 루도비쿠스 1세에 의해 비준되었다.822년 루도비쿠스 1세의 명령을 받든 로타리우스는 이탈리아로 파견되어 그곳의 지배권을 굳히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823년 4월 5일 로마에서 교황 파스칼 1세에 의해 이탈리아 국왕의 제관을 썼다. 그러던 823년, 아버지의 재혼 상대인 바이에른의 유디트 황후가 샤를 2세를 낳았다. 824년 교황 파스칼 1세가 선종한 후 로타리우스는 새 교황 에우제니오 2세와 로마에서 만나 그해 11월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관한 헌장을 공포했다. 이후에도 이탈리아에서 정부 활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다양한 조례를 발표했다.
2.3. 분쟁의 시작과 제1차 내전(830년)
829년, 루도비쿠스 1세는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어린 샤를 2세에게 공작의 칭호를 부여하고 알레마니아 또는 슈바벤의 일부, 알자스, 라이티아, 부르고뉴 일부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로타리우스가 자신의 영역을 뺏어다가 이복동생에게 주는 것에 반발하자, 루도비쿠스 1세는 그가 황제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830년, 루도비쿠스 1세는 날로 거세지는 국내의 불만을 외부에 돌리기로 결정한 후, 프랑크 제국에 여전히 복종하지 않는 브르타뉴인들을 징벌하겠다며 군대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대브르타뉴 원정 준비가 한창이던 830년 4월 궁정에서 반란이 일어나 루도비쿠스 1세는 감옥에 갇혔고, 유디트 황후는 셉티마니아 공작 베른하르트와 간통한 혐의로 푸아티에 인근의 수녀원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로타리우스 1세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제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로타리우스 1세의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이 서로 권력 쟁탈전을 일삼기만 해 민심을 잃었고, 830년 10월 네이메헨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도비쿠스 1세의 복귀가 결의되었다. 이리하여 제위에 복귀한 루도비쿠스 1세는 주모자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추방했고, 유디트 황후를 아헨으로 복귀시켰으며, 로타리우스 1세를 이탈리아로 돌아가게 했다. 피핀과 루트비히 2세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832년 아버지 루도비쿠스 1세에게 충성을 재차 서약했다.
2.4. 제2차 내전(833년)
이후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 루트비히 2세 삼형제는 이복동생인 샤를 2세가 루도비쿠스 1세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자신들의 영지를 갉아먹는 것에 강한 적의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결국 833년 형제들은 동맹을 맺고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833년 6월 말, 루도비쿠스 1세가 이끄는 진압군과 세 아들의 반란군이 콜마르 인근의 로펠트에서 대면했다. 이때 사전에 회유된 진압군이 반란군에 모조리 투항해버리면서, 루도비쿠스 1세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후 루도비쿠스 1세는 수아송 인근의 생메다르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황제복을 벗은 후 참회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돌아왔던 유디트 황후는 또다시 이탈리아의 토르토냐로 추방되었고, 샤를 2세는 푸룸 수도원에 감금되어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2.5. 제3차 내전(834년)과 제국의 재분할(839년)
그렇게 아버지와 계모, 이복동생을 실각시킨 뒤, 로타리우스 1세는 단독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고, 다른 두 형제를 부왕으로 삼아 제국의 영토를 나눠줬다. 그러나 얼마 후 로타리우스 1세와 피핀, 루트비히 2세 삼형제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두 형제는 맏형 로타리우스 1세가 간섭을 심하게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로타리우스 1세 역시 그들이 자신의 통제에 잘 따르지 않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결국 834년 초 피핀과 루트비히 2세 형제가 로타리우스 1세를 상대로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프랑크 제국 전체가 큰 혼란에 빠지면서 감시가 소홀해지자, 루도비쿠스 1세는 생메다르 수도원을 탈출하여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생드니 수도원에서 무기와 왕관을 확보하고, 교황 그레고리오 4세로부터 황제로 인정받았다.그후 노르드계 바이킹이 제국 각지를 침략해 심각한 살상과 파괴를 자행하자, 로타리우스 1세는 아버지와 화해하기로 했다. 837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 공동 황제로 인정받았고, 롬바르디아에서의 모든 권리가 복권되었다. 838년 6월 루트비히 2세가 네이메헌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부왕 루도비쿠스 1세와 다투었다. 838년 9월 루도비쿠스 1세는 루트비히 2세의 몫을 샤를 2세에게 넘긴다는 선언을 했고, 루트비히 2세는 이에 반발했다. 838년 12월 아키텐의 피핀 1세가 갑작스럽게 승하한 후, 839년 5월 3일 로타리우스 1세가 프랑크 제국의 동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과 이탈리아의 통치자로 내정되었다. 그리고 프랑크 제국의 동부 지역은 루트비히 2세가 관장하기로 결정되었으며, 이복동생인 샤를 2세는 프리슬란트 및 마스 강과 센 강 사이의 지역을 물려받기로 했다.
2.6. 제4차 내전(839년~840년)
839년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한데 대해, 루도비쿠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루트비히 2세는 군사를 이끌고 대머리왕 샤를 2세의 알레만니아 영지에 침입했다. 루도비쿠스 1세는 신속하게 반응했고, 루트비히 2세는 판노니아로 퇴각했다.839년 봄, 루트비히 2세는 루도비쿠스 1세가 샤를 2세를 아키텐 왕으로 임명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루아르에서 거병하여 피핀 2세를 지원했다. 이때 로타리우스 1세가 부왕 루도비쿠스 1세의 편에 서서 이들과 싸웠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전해에 죽은 피핀 1세의 아들인 피핀 2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결국 루도비쿠스 1세는 샤를 2세에게 아키텐을 주려는 결정을 취소하게 되었다.
839년 프리슬란트와 덴마크에 있었던 바이킹이 제국 동부를 침략하여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이를 막지 못했고, 바이킹은 수시로 동북부의 프로이센 지방을 약탈했다. 839년 말 루트비히 2세는 5월 30일에 있었던 보름스 제국의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군대를 이끌고 부왕에게 마지막으로 반기를 들었다가 또다시 보름스에서 격퇴당했다. 루도비쿠스 1세는 그해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선언을 했다. 840년 초 루트비히 2세는 알레만니아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루도비쿠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군이 파견되자 싸움없이 신속하게 후퇴했다. 그러나 840년 3월 루도비쿠스 1세는 다시 루트비히 2세를 치려고 특별 군대를 조직했다가, 3월 말 프랑크푸르트에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돌려보냈다.
2.7. 제5차 내전(841년~843년)과 베르됭 조약
840년 6월 20일, 루도비쿠스 1세는 샤를 2세가 자신의 영역 일부를 가지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루트비히 2세와 한판 붙기 위해 잉겔하임의 라인 강 부근 한 섬에 이동했다가 도중에 붕어했다. 그는 죽기 직전에 황제의 휘장과 깃발을 로타리우스 1세에게 넘겼다. 로타리우스 1세는 이를 근거로 삼아 프랑크 제국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자신들을 가신으로 부리려는 맏형의 계획에 반발했고, 결국 841년 초 로타리우스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로타리우스 1세는 자신의 조카이자 아키텐의 통치자였던 피핀 2세와 합세한 뒤 841년 6월 25일 오세르 인근의 퐁트누아에서 루트비히 2세-샤를 2세 연합군과 격돌했으나 완패했다.로타리우스 1세는 아헨으로 퇴각한 뒤 두 동생들 중 한 사람과 협상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해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는 방식으로 반란에 대응했다. 그러나 842년 2월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상호 방위를 약속하고, 둘 다 로타리우스 1세와는 동맹 협정을 맺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공동으로 쳐들어오면서, 상황은 더욱 암울해졌다. 로타리우스 1세는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코블렌츠에서 진압군 병사들이 압도적인 수로 밀어붙이는 반란군과의 교전을 거부하고 뿔뿔이 흩어지자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아헨을 버린 후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다가 론 강에 이르렀을 때 두 동생의 추격대에게 따라잡히자, 로타리우스 1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국을 세 부분으로 나누자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따라 842년 6월 마콩 인근의 사오네 강변에서 휴전이 성립되었고, 각 형제 당 40명씩 협상단을 꾸려서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843년 8월, 1년 2개월 동안 이어진 협상 끝에 역사적인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었다. 막내 동생인 샤를 2세는 대서양에서 뫼즈 강까지 프랑크 제국의 서반부 일대를 통치하게 되었고, 루트비히 2세는 라인 강 동쪽의 제국 동부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맏형이었던 로타리우스 1세는 뫼즈 강과 라인 강 사이의 지역 및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북부 일대를 맡았다. 또한 삼형제는 각자의 아들에게 왕국의 상속을 보장하는 계약을 맺었다.
2.8. 사라센과의 전쟁
이리하여 형제간의 내전은 종식되었지만, 혼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846년, 이탈리아 남부를 습격한 사라센인들이 로마를 위협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아들 루도비코 2세를 로마로 파견해 격퇴하도록 했지만 오히려 사라센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847년 베네벤토 일대를 유린하고 로마로 쳐들어가려는 사라센에 대항할 원정군을 재조직하고, 848년 다시 루도비코 2세를 시켜 사라센군을 물리치도록 했다. 이에 루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로 내려가 로마의 방비를 강화하고, 사라센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850년, 교황 레오 4세는 로타리우스 1세의 요청에 따라 루도비코 2세에게 기름을 부어 신성 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로 세웠다.2.9. 죽음과 중프랑크 왕국의 분할
그후 로타리우스 1세는 바이킹의 연이은 침략을 막아보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해 골머리를 앓던 중 855년에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회복할 기미가 없어 보이자 9월 23일 프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었다. 로타리우스 1세는 죽기 전에 장남 루도비코 2세에게 이탈리아의 왕좌와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었고, 차남 로타르 2세를 로타링기아[4]의 왕으로 삼아 프리실란트 등 북해 연안 및 라인 강과 뫼즈 강, 그리고 쥐라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맡겼다. 마지막으로 3남 샤를에게 프로방스, 리옹, 부르고뉴, 트란스쥐라나를 맡긴 후 프로방스의 왕으로 세웠다. 그후 로타리우스 1세는 수도원에 들어간 지 6일 만인 9월 28일에서 29일 사이의 밤에 붕어했고, 시신은 프룀 수도원에 안장되었다.3. 사후
로타리우스 1세의 붕어 후, 그가 다스리던 영역은 유언대로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프로방스의 샤를이 863년에 후사없이 승하하자 그의 두 형이 왕국을 나누어, 부르군트의 북부 일부 지역은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에게, 남부의 넓은 지역과 프로방스는 이탈리아 왕국의 루도비코 2세에게 양도되었다.
이후 로타르 2세는 정부인 발트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왕비와의 무리한 혼인 무효를 시도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는 두 숙부들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와 대머리왕 샤를 2세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이도 저도 못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를 낳지 못한 채 869년 승하했다. 그리고 그의 영지는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가 메르센 조약에 의거해 나누었다.
로타리우스 1세의 장남이었던 이탈리아 왕국의 루도비코 2세는 이탈리아와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았지만 875년에 후사없이 붕어하면서 그의 왕계는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 쟁탈전의 본거지가 되어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로타리우스 1세가 지배하던 땅을 '로타링기아'라고 했는데 여기서 유래한 지방이 알자스-로렌의 로렌(로트링겐)이다.
4. 가족 관계
- 투르의 에르멩가르다(? ~ 851): 투르 백작 위그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