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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01:14:42

로타르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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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lothar II (클로타르 2세, 고대 프랑크어)
Ludher II (루드헤르 2세, 고대 고지 독일어)
Lotharius II (로타리우스 2세, 라틴어)
Lotharius II (로타리위스 2세. 네덜란드어)
Lotario II (로타리오 2세, 이탈리아어)
Lothar II (로타어 2세, 독일어)
Lothaire II (로테르 2세, 프랑스어)
생몰년도 830년/835년 ~ 869년 (38세/33세)
재위기간 855년 ~ 869년
종교 기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3. 사후4. 영향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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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타르 2세는 카롤루스 왕조 출신의 로타링기아(로트링겐, 로렌) 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리우스 1세(로타르 1세)의 차남이었다. 로타르 2세를 이탈리아의 군주로 보는 경우, 훗날의 이탈리아 왕 로타리오 2세[1]를 로타리오 3세로 보기도 한다. 또한 서프랑크 왕국의 제11대 왕 로테르를 로테르 3세로 부르기도 한다.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아들을 낳아준 정부인 발트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이전에 토이트베르가와 했던 정략결혼을 취소하려 함으로써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이를 거부한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심하게 싸웠다.

2. 생애

로타르 2세는 이탈리아의 왕 로타리우스 1세와 투르 백작 위그의 딸이었던 투르의 에르멩가르다(이르멘가르트)의 아들로 830년경 또는 835년경에 알사스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이탈리아인 루도비코 2세(루트비히 2세)와 프로방스의 샤를, 서출 동생으로 일찍 요절한 카를로만과 베른하르트가 있었다. 외조부인 투르 백작 위그는 메로베우스 왕조(메로빙거 왕조)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851년 5월 20일 모후인 투르의 에르멩가르다가 에르스틴에서 승하했다. 소년 시절, 로타르 2세는 부왕 로타리우스 1세의 명령으로 아를의 백작이자 토리노의 백작이었던 대 보소(Boso the Elder)의 딸 토이트베르가와 정략결혼했다. 그러나 로타르 2세에게는 이미 알사스 백작 프룰라도(Fulrado)의 딸이었던 발트라다라는 내연녀가 있었다.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샤를 2세동프랑크 왕국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조카인 로타르 2세의 영지를 탐내고 있었기 때문에, 로타르 2세에게는 혹시 전쟁이 벌어질 경우 남쪽을 지켜줄 동맹이 필요했다. 부왕 로타리우스 1세는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대머리왕 샤를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쳐들어올 것을 염려하여 이탈리아가 아닌, 왕국 남부 지방의 강력한 귀족의 딸과 로타르 2세의 결혼을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로타르 2세는 왕국 남쪽에 많은 땅과 대수도원들을 소유하고 있었던 영주의 누이인 토이트베르가와 결혼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방 귀족인 발트라다에게 커다란 애정을 품고 있었다. 로타르 2세는 황자 시절에 알사스 출신의 정부였던 엥겔베르게(Engelberge)로부터 트룬가르트(Trungard)라는 딸을 얻었고, 역시 알사스 출신의 정부였던 발트라다로부터 딸 베르타, 기셀라, 에르멩가르다(이르멘가르트) 및 아들 위그(우고)를 얻었다.

발트라다는 이미 아들 위그를 로타르 2세에게 안겨주었지만 로타르 2세와 토이트베르가 사이에서는 끝내 자녀가 없었고, 로타르 2세는 내심 토이트베르가와의 이혼을 계획했다. 토이트베르가의 친정인 보소 가문 역시 그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 것도 이혼할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되었다. 855년 로타리우스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프리슬란트에 침공한 바이킹을 격퇴할 때, 로타르 2세도 함께 출정했다.

855년 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프륌 조약을 체결하고 로타링기아알사스, 벨기에 일대를 물려받았다. 로타르 2세는 북해에서 알프스산맥에 이르는 라인 강 서쪽 지역을 물려받았는데, 이 지역은 '로타링기아 왕국'(Regnum Lotharingium)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병환 때문에 로타리우스 1세가 수도원으로 은퇴할 당시 로타르 2세는 미성년자에다가 간질 환자였던 동생 샤를(프로방스의 샤를)에게 상속 포기를 강요하기도 했다.[2] 이후 로타리우스 1세의 붕어 소식이 전해지자 바로 서프랑크의 샤를 2세가 군사를 이끌고 로타르 2세의 몫인 로타링기아를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개입으로 샤를 2세의 로타링기아 접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샤를 2세는 로타링기아를 포기하지 않았고, 나중에 로타르 2세가 승하한 뒤 다시 로타링기아를 넘보았다. 855년 11월 로타르 2세는 로타링기아의 왕으로 즉위했고, 856년 숙부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집전하에 기름부음 의식(세례)을 받았다.

로타르 2세는 부왕 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토이트베르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로타르 2세는 자신의 아들을 낳아 준 정부인 발트라다와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 857년경 토이트베르가와 이혼하려고 했으나, 귀족들은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힘있는 집안이었던 보소 가문의 눈치를 봤고, 잘못이 없는 이혼 및 파혼은 신뢰 문제가 걸린 일이었으며, 교회법상 부도덕한 일이라 로타르 2세를 도와주길 주저했다. 로타르 2세의 정부들 중 장남 위그(우고)를 안겨준 발트라다는 마치 왕비처럼 행세하다가 일부 귀족 및 성직자들의 눈밖에 나고 말았다. 이때문에 로타르 2세의 귀족 및 사제들에 대한 설득은 난항에 봉착하고 말았다. 왕은 이혼에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고자 지역의 가톨릭 주교들을 꾸준하게 설득하고 아낌없는 투자를 했다. 로타르 2세는 토이트베르가와의 이혼을 계획하는 동시에 토이트베르가의 친정 오빠였던 우베르토와도 갈등했다. 로타르 2세는 결혼 자체를 취소하려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는 교황 니콜라오 1세와 심하게 싸웠다. 이 일로 인해 로타르 2세는 가톨릭 교계의 인망을 잃게 되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끝내 왕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마침내 로타르 2세는 계략을 꾸미기에 이르렀다. 그는 왕비 토이트베르가를 상대로 그녀가 자신의 친정 오빠인 생 모리스 다곤(Saint-Maurice d'Agaune) 성당의 우베르토와 근친상간했다고 비난하며 재판을 진행했는데, 그녀가 불에 달군 쇠로 받는 형문과 끓는 물에 손을 집어넣는 신판(神判)을 모두 이겨내자, 주교단은 모두 무죄를 선언했다. 로타르 2세는 이 판결을 무시한 채 왕비를 감금했고, 결국 죄를 자백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의 자백을 들은 주교들은 로타르 2세의 재혼을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신학자들 중 한 명인 힝크마르 대주교가 로타르 2세의 재혼을 허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학문적으로 탄탄한 보고서를 내놓자 재혼을 반대하는 쪽이 더욱 강경해졌다. 이때문에 곤경에 빠진 로타르 2세는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샤를 2세와 동프랑크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게 왕비와 이혼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858년 로타르 2세는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왕비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재혼 반대파였던 힝크마르는 로타르 2세의 야심만만한 숙부인 대머리왕 샤를 2세의 지도신부였다. 힝크마르는 자신의 후원자인 샤를 2세 가문의 이익이 걸려 있을 때는 대단히 탄력적인 결혼 원칙을 적용했다. 샤를 2세의 딸이 근친상간을 금지한 중세 가톨릭 교회의 명령에 반하여 의붓아들과 결혼했을 때 힝크마르는 반대하지 않았고, 샤를 2세가 아들에게 적법한 아내를 버린 후, 새 아내를 얻으라고 강요했을 때도 그저 가볍게 항의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샤를 2세의 이혼 강요에도 불구하고, 말더듬이왕 루이 2세는 끝내 아내를 버리지 않았고 관계를 계속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힝크마르는 로타르 2세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는 결혼을 결코 깰 수 없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간질로 고생하던 프로방스의 샤를은 자신이 죽게 될 경우, 영토를 형인 로타르 2세에게 남긴다고 했는데, 맏형이었던 이탈리아인 루도비코 2세(루트비히 2세)가 이에 반발하여 삼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858년 여름 로타르 2세는 대머리왕 샤를 2세의 서프랑크 군대와 연합하여 로타링기아의 북부에 출몰한 바이킹을 격퇴했다.

로타르 2세는 이혼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동맹자들에게 호의적인 쾰른과 트리어의 대주교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이때 쾰른의 대주교는 로타르 2세가 토이트베르가와 이혼한 뒤 자신의 조카가 그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860년 2월 로타르 2세는 아헨(엑스 라 샤펠)의 종교회의에서 왕비 토이트베르가가 순결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발트라다와 결혼하기 위해 토이트베르가와 별거했다. 곧 아헨의 한 수도원에 감금되었던 토이트베르가는 같은 해에 탈출하여 친정 오빠인 힉베르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로타르 2세는 집요하게 토이트베르가와의 이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맏형인 황제 루도비코 2세의 지원을 구했는데, 그는 형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하고 지역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다. 또한 숙부인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지원도 일부 얻어냈다. 로타르 2세는 쾰른 대주교 군타하르와 트리어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사주하여 862년 로타르 2세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종교회의가 아헨에서 열렸다. 로타르 2세는 토이트베르가가 간통을 저질러 자신을 배신했다고 감정적으로 설명했으며, 재혼이 허락되지 않으면 성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 죄를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고백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 자리에 모인 고위 성직자들은 그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며 로타르 2세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발트라다와의 재혼을 허락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는 로타르 2세의 숙부인 샤를 2세의 파리 궁정으로 피신했고, 샤를 2세는 랭스 대성당 내의 수녀원에다가 토이트베르가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후 샤를 2세는 토이트베르가를 아브네 수도원(abbey of avenay)으로 옮겼다. 한편 토이트베르가의 친정 오빠들은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했고, 아헨 종교회의의 소식을 들은 로마 교황 니콜라오 1세는 격노하여 로타르 2세의 이혼 허락 결정을 번복하고, 쾰른 대주교 군타하르와 트리어 대주교 토이트가우트를 해임하는 전례없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로타르 2세의 형인 황제 루도비코 2세가 로마 시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862년 말 대머리왕 샤를 2세의 반대에 부딛친 유디트[3]와 플랑드르의 보두앵 1세가 로타링기아로 피신했고, 로타르 2세는 이들을 받아주었다.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재혼에 대해서 성직자들 사이에 계속 이의제기가 된 끝에 863년 메츠의 종교회의에서 다시 로타르 2세의 결혼에 대한 적법성이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서 이혼 결정에 대한 교황 대리의 추인을 받았다.

863년 1월 동생인 프로방스의 샤를이 후계자없이 승하하자 맏형 루도비코 2세와 함께 샤를의 프로방스 왕국을 분할했다. 이때 루도비코 2세는 프로방스 지역을, 로타르 2세는 빈과 리옹 부근의 지역을 차지했다.

865년 로타르 2세의 숙부들인 샤를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파문으로 위협을 하면서 로타르 2세에게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필요하다면 그를 권좌에서 쫓아내서라도 교황의 결정을 실행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자 하는 수 없이 로타르 2세는 토이트베르가를 다시 받아들였다. 그러나 토이트베르가가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하자 로타르 2세는 1년 뒤 그녀에게 윽박질러 이혼을 신청하게 만들었다. 866년 6월 15일에는 교황청에서 로타르 2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특사가 로타링기아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로타르 2세는 이를 거절했고 같은 해 파문당했다. 867년 교황 니콜라오 1세의 뒤를 이어 좀 더 융통성이 있는 하드리아노 2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자 로타르 2세는 왕비에게 직접 새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토이트베르가는 이혼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에 교황 하드리아노 2세는 발트라다에게 가해진 파문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2세는 토이트베르가가 로타르 2세와 이혼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은 충분한 이혼 사유가 될 수 없기에 로타르 2세도 재혼할 수 없다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한편 로타르 2세의 정부였던 발트라다는 로타르 2세가 이혼 승낙을 받으러 이탈리아로 가던 중이던 869년 4월 9일 병으로 죽어 르미르몽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로타르 2세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에서 교황 하드리아노 2세를 면담했으며, 이혼 승낙을 받고 돌아오던 길에 말라리아로 인한 열병에 걸려 그해 8월 8일 피아첸차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남겨진 발트라다의 아들 위그(우고)는 즉시 샤를 2세 대머리왕과 루트비히 2세 독일인에 의해 불법적인 사생아로 선포되었다. 로타르 2세의 영토는 맏형인 황제 루도비코 2세에게 돌아갔어야 했지만, 루도비코 2세가 바리의 에미리트(Emirate of Bari)와 교전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로타르 2세의 영토를 접수하지 못했고, 서프랑크의 샤를 2세가 선수를 쳐 차지해버렸다. 이후 독일인 루트비히 2세가 반발하여 교전한 뒤, 로타르 2세의 영토는 870년에 체결된 메르센 조약으로 인해 샤를 2세와 루트비히 2세 독일인에게 분할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로타르 2세의 시신은 피아첸차 근처의 성 안토니오 성당 바실리카(Basilica of Sant'Antonino)에 안치되었다. 로타르 2세의 왕비 토이트베르가는 수녀가 되어 메츠의 생 글로신드 수녀원에 들어가 수녀원장이 되었고, 875년 11월 25일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3. 사후

로타르 2세의 서자 위그는 877년 8월 백부인 루도비코 2세가 붕어한 뒤 로타리우스 1세의 직계 후손임을 내세워 이탈리아의 왕위를 요구했지만 실패했다. 878년 초 교황 요한 7세는 위그의 파문을 선언했다. 그후 위그는 879년 서프랑크의 루이 2세가 승하하자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으나 동프랑크의 루트비히 3세가 보낸 군사들이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 형제를 보호했으므로 실패했다.

883년 위그의 누이인 기셀라가 프리슬란트의 후작 고드프리와 결혼하자, 이를 이용하여 위그는 부왕 로타르 2세의 영지를 탈환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비만왕 카를 3세와의 전투 중이었던 885년 6월, 위그는 바벤부르크에서 프랑켄의 하인리히에게 체포되었고, 매제였던 프리슬란트 후작 고드프리는 바로 살해되었다. 포로가 된 위그는 눈이 실명당하고, 혀가 잘린 뒤 생갈 수도원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포에른 수도원으로 옮겨진 후 죽었다. 이로써 로타르 2세의 직계 남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로타르 2세의 딸 베르타는 아를의 보소 가문에게 시집갔는데 그녀의 아들이 훗날 이탈리아 왕국을 통치한 보조네 왕조의 제2대 왕이 된 우고(위그)였다. 이 우고(위그)의 아들이 보조네 왕조의 제3대 왕이었던 이탈리아의 로타리오 2세[4]로, 로타르 2세를 이탈리아의 군주로 간주하면 그의 외증손이었던 로타리오 2세를 로타리오 3세로 부르기도 한다.

4. 영향

로타르 2세의 이혼 실패 사건은 다른 군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합법적인 왕비가 후계자를 낳지 못했을 때 왕이 재혼하고 싶다 해도 교회의 협조를 얻지 못한다면 결국 파멸을 몰고 올 족쇄에 묶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귀족과 왕들은 필요하다면 계속 교회에 저항했지만, 이혼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때도 일단은 이혼 불가 원칙을 받아들인 후, 대신 좀 더 그럴 듯한 핑계를 제공해줄 수 있는 생활 방식을 선택해 교회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는 경우가 점점 더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로타르 2세의 패배는 세속의 군주가 교황보다 아래라는 메시지도 되었다. 그러나 군주들과 귀족들은 반발은 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고,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간의 정치적 대결로 표면화되었다.

5. 기타

로타르 2세는 알사스, 토리노, 발루아의 백작이었던 보소 가문과는 이중으로 인척관계였다. 이혼한 본처 토이트베르가의 친정이었으며, 정부인 발트라다에게서 얻은 서녀 베르타는 토이트베르가의 오빠였던 힉베르트의 아들 아를의 테오발트에게 시집갔다. 이들의 아들은 훗날 이탈리아의 왕으로 재위한 우고(위그)였고, 손자는 로타리오 2세였다.

로타르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군주였던 무위왕 루이 5세에게도 조상이 되었다. 루이 5세는 로타르 2세의 배다른 숙부였던 대머리왕 샤를 2세에게는 남계쪽으로 5대손이었다. 하지만 로타르 2세의 서녀 베르타의 아들이 이탈리아의 왕 우고(위그)였고, 우고의 손녀이자 로타리오 2세의 딸이었던 이탈리아의 엠마(엠므)가 서프랑크의 제11대 왕 로테르에게 시집을 가 루이 5세를 낳았다. 그래서 서프랑크의 무위왕 루이 5세는 모계쪽으로 로타르 2세의 외5대손이 되었다.

한편 발트라다가 낳은 로타르 2세의 세 딸 역시 부왕의 죽음 이후, 대머리왕 샤를 2세와 독일인 루트비히 2세에 의해 사생아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1] 보조네 왕가. 우고(위그)의 아들[2] 하지만 858년 초, 로타르 2세는 프로방스의 샤를과 화해했다.[3] 샤를 2세의 딸이자 앵글로색슨족 왕의 과부였다.[4] 우고(위그)의 아들로, 보조네 왕가 출신의 이탈리아 국왕이었던 로타리오 2세는 밀라노에 체류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독립 왕국화된 부르고뉴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947년 6월 17일경 부르고뉴 왕 루돌프 2세의 15세된 딸 아델라이드(또는 아델하이트)와 결혼했으나 로타리오 2세는 계속 명목상의 통치자였고, 이탈리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사람은 베렝가리오였다. 948년경 아델라이드가 로타리오 2세의 딸 엠마를 낳았고, 엠마는 서프랑크 왕국의 제11대 왕 로테르와 결혼했다. 로타리오 2세는 950년 11월 22일에 토리노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베렝가리오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베렝가리오 2세는 로타리오 2세의 왕비로 과부가 된 아델라이드를 자신의 아들인 아달베르토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으나, 아델라이드는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후 아델라이드는 962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오토 1세와 재혼하여 오토 2세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