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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비코 2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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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 제2대 국왕 | |||
카롤루스 제국 제4대 황제 루도비코 2세 Ludovico II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Ludovicus Imperator Augustus 루도비쿠스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 Ludovicus Imperator Italiae 이탈리아의 황제 루도비쿠스 Ludovicus Carolingius Imperator Romanorum 로마인들의 황제 루도비쿠스 카롤링기우스[1] | ||
이름 | Ludovico(루도비코, 이탈리아어) Ludovicus(루도비쿠스, 라틴어) Ludwig(루트비히, 독일어) | ||
출생 | 825년 | ||
프랑크 왕국 롬바르디아 | |||
사망 | 875년 8월 12일 (향년 50세) | ||
이탈리아 왕국 롬바르디아 게디 | |||
재위기간 | 카롤루스 제국 황제(명목상) | ||
855년 9월 29일 ~ 875년 8월 12일 (20년) | |||
이탈리아 국왕 | |||
844년 ~ 875년 (31년) | |||
프로방스의 국왕 | |||
863년 ~ 875년 (12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cc20><colcolor=#000> 조부 | 루도비쿠스 1세 | |
부왕 | 로타리우스 1세 | ||
모후 | 투르의 에르멩가르다 | ||
형제 | 힐트루드, 에르멩가르다, 베르타, 기셀라, 로타르 2세, 프로방스의 샤를, 로트루데 | ||
배우자 | 알자스의 엥겔베르가 | ||
자녀 | 기젤라, 에르멩가르다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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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제2대 국왕이자 카롤루스 제국의 명목상 제4대 황제였으며,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이었다.2. 생애
825년경 프랑크 왕국에 속한 롬바르디아에서 로타리우스 1세와 투르 백작 위그의 딸인 투르의 에르멩가르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 자매로 힐트루드, 에르멩가르다, 베르타, 기젤라, 로타르 2세, 로트루데, 프로방스의 샤를이 있었다.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족보학자인 크리스티안 세티파니에 따르면, 842년 동로마 제국 황제 미하일 3세의 누이들 중 한 명과 약혼했으나 이듬해에 결렬되었다고 한다. 《산 베르티노 연대기》에 따르면, 844년 아버지 로타리우스 1세에 의해 이탈리아 왕으로 지명되었으며, 이탈리아로 보내져서 로마 내의 제국 권위를 회복하는 임무를 맡았다.846년 이탈리아 남부를 습격한 사라센인들이 로마로 북상하여 그해 8월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밖에 위치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파괴했다. 루도비코 2세는 이를 막으려고 했으나 격파당해 로마로 탈출했다. 847년 로타리우스 1세로부터 군대를 제공받고 848년 사라센을 상대로 승리했으며, 베네벤토에서 몰아낸 뒤 로마의 방비를 강화했다. 850년 교황 레오 4세는 로타리우스 1세의 요청에 따라 루도비코 2세에게 도유하여 카롤루스 제국의 공동 황제로 세웠다. 851년 부친이 알려지지 않은 알프스의 엥겔베르가와 결혼하여 두 딸 기젤라와 에르멩가르다를 낳았다.
851년 라델치스 1세와 지코눌프간의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봉신국인 베네벤토 공국이 혼란에 빠져 무슬림들이 이탈리아 반도에 대거 진출하는 것을 막지 못하자 이를 보다 못한 루도비코 2세는 두 사람에게 당장 타협하지 않으면 징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라델치스와 지코눌프는 베네벤토 공국을 절반으로 나눠 가지는 선에서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지코눌프가 이끄는 살레르노 공국이 베네벤토 공국으로부터 이탈했다. 이후 루도비코 2세는 풀리아로 이동해 사라센의 소굴이 된 바리를 공략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가 북쪽으로 돌아간 후 사라센들은 반격에 착수해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약탈하는 등 수많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855년 중병에 걸린 부왕 로타리우스 1세는 그해 9월 23일 프룀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장남 루도비코 2세에게 이탈리아 왕좌와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었고, 차남인 로타르 2세를 로타링기아의 왕으로 삼아 프리실란트 등 북해 연안 및 라인 강과 뫼즈 강, 그리고 쥐라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맡겼다. 마지막으로 3남인 샤를에게 프로방스, 리옹, 부르고뉴, 트란스쥐라나를 맡기고 프로방스의 왕으로 세웠다.
859년, 루도비코 2세의 동생 로타르 2세는 본처인 토이트베르가와의 혼인을 무효화하고, 애첩이었던 발트라다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루도비코 2세는 이를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대가로 제네바, 로잔, 시옹을 접수받았다. 862년, 루도비코 2세와 로타르 2세 형제는 아헨에서 공의회를 소집한 뒤 주교들로부터 토이트베르가와 로타르 2세의 혼인 무효를 인정받았다. 로타르 2세는 즉시 토이트베르가와 이별하고 발트라다와 결혼했다.
863년 막내 동생인 프로방스의 샤를이 후계자없이 승하하자, 루도비코 2세는 로타르 2세보다 먼저 프로방스를 점령해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이에 로타르 2세가 불만을 품고 군대를 이끌며 프로방스에 진군하자, 루도비코 2세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트란스쥐라니아 일부를 로타르 2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화해했다.
몇 개월 후, 교황 니콜라오 1세는 로타르 2세와 토이트베르가의 혼인 무효화와 발트라다와의 재혼을 지지한 주교들을 해임하고, 로타르 2세와 발트라다의 혼인을 인정할 수 없다는 통보를 했다. 이에 분노한 로타르 2세와 루도비코 2세 형제는 군대를 동원해서 로마를 포위하고 교황을 압박했지만, 교황이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데다가 전염병이 돌자 결국 평화협약을 맺고 물러났다.
865년, 루도비코 2세는 파비아에서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겠다고 선포한 후 이탈리아 북부의 전사들에게 루세라에 집결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병력이 제대로 모이지 않아 출진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 엥겔베르가와 함께 캄파니아 일대를 여행했다. 이에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가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조속히 바리 토후국을 정벌하지 않으면 무슬림이 이탈리아 남부 전역을 석권하고 로마까지 몰아붙일 테니 서둘러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867년 봄, 루도비코 2세는 비로소 바리 토후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는데, 마테라를 공략한 뒤 철저히 파괴하고 오리아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무슬림이 장악한 바리와 타란토와의 교통로가 끊어졌다. 이후 868년의 겨울 동안 베네벤토에 머물면서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바리 토후국을 향한 합동 공세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당시 루도비코 2세에게는 마땅한 해군이 없었기에, 해안도시인 바리의 해상을 봉쇄하려면 동로마 함대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마침 바리 토후국이 아드리아해 연안을 연이어 습격하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바실리오스 1세는 루도비코 2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루도비코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확실히 얻기 위해 혼인 동맹을 맺기로 하고, 자신의 딸 에르멩가르다 황녀를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1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황자와 결혼시키고자 했다.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되었다면 동로마 제국과 카롤루스 제국의 사이가 돈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의 사령관이 루도비코 2세를 '프랑크의 황제(βασιλεύς των Φράγκων, Basileus Phrangias)'라고 부르자 루도비코 2세가 이를 모욕으로 간주하는 바람에 혼담은 어그러졌다. 루도비코 2세는 '로마인들의 황제(Αυτοκράτωρ των Ρωμαίων)'라는 칭호로 불러주기를 원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럴 의사가 없었다.
이 시기에 루도비코 2세가 바실리오스 1세에게 보낸 편지가 유명하다.영어 번역 '로마인'의 정의에 대한 바실리오스 1세와의 극명한 관점의 차이가 돋보이며, 이 주제에 대한 논쟁은 루도비코 2세가 붕어한 이후로도 천년 가까이 남아 유럽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단 이 편지는 루도비코 2세 본인이 승인한 내용이긴 해도 그가 직접 쓴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 저자는 로마 시민이자 로마 교회의 사서였던 아나스타시오였다.
869년, 동생 로타르 2세가 사망했다. 로타르 2세는 생전에 발트라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샤를 2세와 동프랑크 왕국의 독일인 루트비히 2세는 교회로부터 사생아로 간주된 아이들의 영지 상속을 인정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조카인 로타르 2세의 영지를 분할하고, 870년 메르센 조약을 체결해 분할을 확정했다. 루도비코 2세는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교황 하드리아노 2세에게 두 숙부가 자신을 무시한 채 죽은 동생의 영지 분할을 진행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교황은 랭스 교구장 힌크마르 주교에게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를 찾아가 루도비코 2세의 입장을 고려하라고 권하도록 했다. 그러나 힌크마르 주교는 자신의 주권자인 샤를 2세를 따르기로 하고, 교황의 바람을 무시한채 메르센 조약을 공인했다.
871년 2월, 루도비코 2세는 동로마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바리 토후국을 정복했다. 베네벤토 대공 아델치스는 바리 토후국이 지배하던 아풀리아를 자신의 영역으로 삼기를 바랬지만, 루도비코 2세는 그가 그다지 유순하지 않은 가신이라 여기고, 아풀리아를 넘겨주길 거부했다. 게다가 베네벤토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켜서 베네벤토를 완전히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자 아델치스는 베네벤토에 머무는 황제 일행을 습격했고, 루도비코 2세는 황후와 함께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 40일 동안 억류되었던 황제 루도비코 2세는 베네벤토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며 랑고바르드인에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야 풀려났다. 이때 루도비코 2세가 옥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숙부인 샤를 2세는 소문만 믿고 조카인 루도비코 2세의 영지를 취하고자 군대를 보냈다가 뒤늦게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자 군대를 물렸다.
그 후 로마로 이동한 루도비코 2세는 873년 카푸아에서 숙적인 사라센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남부를 통제하려는 그의 시도는 영주들의 거듭된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루도비코 2세는 북상하다가 875년 8월 12일 롬바르디아 지방 브레시아 지역의 게디 시에서 사망했다. 일주일 후 황제의 시신은 밀라노의 산탐브로지오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루도비코 2세가 정말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샤를 2세는 즉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프로방스와 이탈리아 북부 전역을 확보한 후 이탈리아 국왕을 겸임했다.
3. 가족 관계
- 알자스의 엥겔베르가(830 ~ 890)
[1] 871년 바리 정복 후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