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嫡長子정실(正室) 부인이 낳은 자식 중 맏아들을 의미한다.
적장자에서 적(嫡)이란 정실 적(嫡)의 의미이다[1]. 흔히 적자(嫡子)라고도 한다. 그리고 적1남이라는 기록도 적장자를 뜻한다.
중혼과 축첩,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불법이 된 현재의 일부일처제의 대한민국에서는 자연히 거의 대부분의 경우 부인이 정실이기 때문에 적자/서자 개념이 없어졌기에[2] 현재 이 단어를 볼 방법은 역사책에서밖에 없다. 다만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아주 없진 않다. #
조선 왕조나 중국 여러 왕조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동서양 막론하고 역사속의 모든 왕조 국가에서는 적장자의 왕위 계승이 원칙이었다.[3][4]
2. 역사
여말선초까지만 하더라도 적서의 차별이나 제사와 상속에서 큰 차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5]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유교질서가 확립[6]됨으로써 적서의 구별이 점차 뚜렷해지고, 종법 질서가 강화됨에 따라 집안의 계승과 재산 상속에 있어서 적장자가 가지는 지위가 대폭 강화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족보 보학의 발달은 지배층인 사대부는 물론 피지배층인 평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조선 왕실에 있어서 적장자의 왕위계승은 왕실의 정통성과 직결되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 여기서 적장자란 왕의 정비(正妃)의 첫째 아들을 의미하며, 정궁(正宮)의 맏이는 태어나면서 원자(元子)로 칭해진다. 원자는 왕위 계승에 하자가 없는 한, 7~8세에 왕세자에 책립되었고, 왕이 승하하면 왕위를 계승하여 다음 왕이 되었다. 이러한 왕위계승은 즉위한 왕에게 강력한 정치적 정통성을 담보해 주었으며 왕권강화에도 매우 요긴한 일이었다.
이는 적장자인 숙종실록의 행장을 보면 잘 나타난다.
國王姓李氏, 諱焞, 字明普, 顯宗大王之嫡嗣, 孝宗大王之孫。 母妃 明聖王后 金氏, 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佑明之女也。 "국왕(國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순(焞), 자(字)는 명보(明普)로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적사(嫡嗣)이며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손자이다.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 청풍부원군(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우명(佑明)의 딸이다. |
반면, 적자였지만 적장자는 아닌 효종실록의 행장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國王諱淏, 字靜淵, 仁祖大王之第二子, 元宗大王之孫。 母妃仁烈王后 韓氏, 領敦寧府事西平府院君 浚謙之女, 生王于鄕校洞潛邸, 己未五月二十二日亥時也。 국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으로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둘째 아들이고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준겸(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 |
결국 이것이 예송논쟁의 발단이 되었다.
왕비는 왕의 정실로서, 안으로는 내명부의 후궁과 종친, 의친, 상궁, 궁녀뿐만 아니라 외명부의 첩지[7]를 받은 이들을 통할하는 내외명부의 수장이고, 밖으로는 왕과 함께 종묘를 받들고 후손을 이어가는 존엄한 존재다. 이 중에서도 후손을 잇는 일은 왕비의 가장 중요한 책무인데, 만약 왕비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면 왕위계승권이 후궁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이럴 경우, 필히 여러 명일 후궁들 사이에서도 자기 아들을 왕에 앉이기 위한 온갖 권모술수가 벌어지면서 왕실과 조정에 큰
시열의 논의에,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은 것을 두 번 세 번 말했는데, 그가 가장 요점을 두고 단정한 말은 ‘장자가 비록 성인이 되어 죽었더라도 그 다음들을 모두 장자로 명명하고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존엄하지 못하다.’ 한 것입니다.......... ‘적(嫡)’이라는 것은 형제 중에서 적우(嫡耦)할 사람이 없다는 칭호이고, ‘통(統)’이라는 것은 물려받은 사업을 잘 꾸려가고, 서물(庶物)의 으뜸이 되며, 위에서 이어받아 후대로 전한다는 말인데, 차장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으면 적통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로서 살림을 맡은 뒤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타인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게 가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 시열의 말에, ‘부왕(父王)이 서자(庶子)를 위하여 3년을 입지 않았으면 비록 이미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후(母后) 혼자서 어떻게 감히 3년을 입을 것인가?’ 한 그 말은 더욱 무리한 말이고 더욱 알쏭달쏭한 말입니다. 대체로 태자(太子)의 ‘태(太)’는 바로 ‘적(嫡)’ 또는 ‘장(長)’과 글자 뜻이 같은 자인데,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이고, 세자(世子)의 ‘세’도 적·장과 뜻이 같은 글자이나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태자’ ‘세자’라고 했으면 그가 바로 살림을 맡고 승중(承重)을 하고,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다는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서 ‘적’ ‘장’ 두 글자보다 오히려 더 돋보이는데, 이미 세자가 되고서도 장자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러한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조대왕이 하늘의 섭리를 따르시고 문무의 도를 지키면서 효종대왕을 세자로 삼으셨는데, 효종대왕이 이미 세자가 되신 후에도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적자라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나라의 어른이 되어 군림한 그 후까지도 장자·적자라 하지 않고 끝까지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효종대왕을 끝까지 서자에다 비기려고 한 그 뜻을 신은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시열이 또 말하기를, ‘효종대왕이 대왕대비에 대하여는 군신(君臣)의 뜻이 있는데, 대왕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것인가?’ 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그 말대로라면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며, 임금이 세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랍니까? 어쩌면 그의 말이 이렇게도 사리에 당찮습니까. 아, 선왕조 시절부터 믿고 소중히 여겨 모든 것을 맡겼던 자로 두 송(宋)[9]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4월 18일 임인 1번째기사- |
이렇듯 정궁의 소생이 아닌 후궁의 소생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당연히 정통성에 흠집이 날 수밖에 없고 후궁으로 왕위를 이은 왕들은 모두 적장자 출신이 아니라는 것에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다.[10]
장씨(張氏)[11]를 추존(追尊)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라 하였으니, 장씨는 임금의 생모(生母)이다. 예조(禮曹)에서 추보(追報)하는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고, 조목을 열거하여 올리기를, "길일(吉日)을 가리어 신주(神主)를 개제(改題)하고,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제주관(題主官)을 차송(差送)케 하고, 사우(祠宇)의 간가 제도(間架制度)는 한결같이 신비(愼妃)의 사우(祠宇)와 같게 할 것이며, 물력(物力)은 호조·병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별도로 감역관(監役官)을 정하여 조성(造成)케 하소서. 사중삭(四仲朔)518)의 시제(時祭)는 초정일(初丁日)을 채용하되, 기제(忌祭)와 사우(祠宇)에서 아울러 거행하고, 사절일제(四節日祭)는 묘소(墓所)에서 행사(行祀)하소서. 그리고 모든 제사(祭祀)는 모두 내시(內侍)로 하여금 축문(祝文) 없이 설행(設行)하게 하고, 제수(祭需)는 해조(該曹)와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인빈(仁嬪)의 예와 같이 봉진(封進)하게 할 것이며, 묘소의 수직군(守直軍)은 15명으로 정하여 급복(給復)하고 호역(戶役)을 면제하게 하소서." -경종실록 10권, 경종 2년 10월 10일 임술 네 번째 기사- |
상이 대빈(大嬪)의 사묘(私廟)에 거둥하였다. 거기에 숭품(崇品) 종신(宗臣) 2명이 입시(入侍)하였으니, 이것은 선조(先朝) 때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12]의 사우(祠宇)를 전배(展拜)하던 때의 예(例)이다. 그러나 그 당시와는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함에도 종부시(宗簿寺)에서 그것을 예로 원용할 것을 청하였으니, 무식함이 심한 것이다. 대신(大臣)과 승지(承旨)가 비가 오기 때문에 기한을 물리자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종실록 12권, 경종 3년 6월 9일 병진 첫 번째 기사- |
영조의 추숭.
임금이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비로소 창빈(昌嬪)·인빈(仁嬪)의 아버지에게 모두 의정(議政)을 추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이조 참의(吏曹參議) 서종옥(徐宗玉)을 불러 하교하기를, "나는 선왕(先王)의 측실(側室)의 아들로서 외람되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자리를 더럽히고 있는데, 외가(外家)가 한미하여 친속(親屬) 가운데 태복시(太僕寺)에서 복역(服役)하다가 그 일신을 마친 사람이 있으니, 내가 외가(外家)를 대우한 것이 너무 야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친(私親)에 대한 겸공(謙恭)하는 뜻을 본받으려고 한 때문이다. 그리고 사친의 아버지를 증직(贈職)시키는 일은 이미 선조(先朝)의 구례(舊例)가 있으니,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인빈(仁嬪)의 아버지 김한우(金漢祐)의 예(例)에 의거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게 하고 나서 이어 조보(朝報)에는 내지 말게 하였으니, 이는 더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날 임금이 서종옥을 면대하여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말을 마치고 나서 또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조금 전에는 마음이 편치 못하여 즉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엊그제 능상(陵上)에서 함원(咸原)을 대하였을 적에도 슬퍼서 말소리를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나도 또한 그러는 것이 지나친 것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였다. 대개 임금이 자인(慈仁)은 여유가 있으나 강단(剛斷)은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말이 선고(先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렸고,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게 되어도 반드시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 대신(大臣)에게 출사(出仕)할 것을 면려할 때에도 눈물을 흘렸다. 이날의 전교(傳敎)에 처음에는 ‘외친(外親)’이라고 썼었는데, 유신(儒臣)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마땅히 ‘사친부(私親父)’라고 일컬을 것이요, ‘외친(外親)’이라고 일컫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사친(私親) 고비(考妣)’라 고쳐 쓰라고 명하였다. - 영조실록 37권, 영조 10년 2월 18일 갑자 세 번째 기사 - |
3. 조선의 적장자 저주
조선의 적장자 출신 임금 | ||||||
제5대 | 제6대 | 제10대 | 제12대 | 제18대 | 제19대 | 제27대 |
문종 | 단종 | 연산군 | 인종 | 현종 | 숙종 | 순종 |
세종+소헌왕후 | 문종+현덕왕후 | 성종+제헌왕후 | 중종+장경왕후 | 효종+인선왕후 | 현종+명성왕후 | 고종+명성황후 |
그러나 그토록 적장자 계승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던 조선왕조에서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한 왕은 27명의 조선 임금 중에서 겨우 7(+1)명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대부분 '저주'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조선의 태조인 이성계는 나라를 개국한 인물이니 적장자인가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지만 바로 다음 세대인 2대부터 문제가 된다.
이성계의 적장자 이방우는 효자로 이름이 났고 형제들간의 우애도 두텁게 챙기는 등 세자로 삼는 데에 크게 흠이 없었으나[13], 문제는 그가 고려 기득권층과의 혼맥이 닿아있었다는 점으로, 쿠데타로 집권해 기반이 부족한 조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선 그를 세자로 삼는 게 불가능했고[14] 1393년에 술병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후계 구도에서 완전 이탈하고 만다.
자연스럽게 그 다음은 적차자인 이방과의 차례였지만[15] 태조는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세웠고, 그 결과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말았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원은 죽은 맏형 방우 다음의 둘째 형인 방과를 정종으로 옹립한다.
이러한 혼란 정국 속에서 즉위했으니 정종은 확고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허수아비 신세가 되어 왕 노릇 제대로 한번 해보지 못하고 3년 만에 동생 정안공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고 만다. 한마디로 말해 적장자 계승은 첫 후계부터 완전히 어긋난 셈이다. 이것이 완벽히 확립되기 위해서는 정통성 있는 정종이 강한 왕권을 쥐고 왕실의 기강을 세워줘야 했었으나, 정종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정종이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된 이방원이었으나, 천하의 그 역시도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는 못한다. 태종의 적장자는 양녕대군이었지만,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학문도 멀리한채 노는데 정신이 팔려 결국 작은아버지 이방석 다음으로 조선사 두 번째 폐세자가 되었다.[16][17][18] 태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제4대 세종대왕은 태종의 3남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대왕과 그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적장자 향이 장성하여 5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조선 최초의 적장자 출신 왕이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그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만 3년을 재위하지 못한채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낳은 적장자 홍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게 되니 그가 바로 단종이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단종의 정통성은 막강했다. 그는 최초의 적장손 출신의 왕으로 적장자 출신 왕세자의 적장자로, 태어나자마자 원손 지위를 단 것을 시작으로 세손-세자 단계를 거쳐 왕이 되었는데 이렇게 모든 단계를 거쳐 왕이 된 사람은 조선 왕조내에서 단종이 유일하다. 그나마 그에게 비빌 정도로 정통성이 강했던 왕은 숙종인데 그는 아버지인 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일때 태어난 탓에 원손과 세손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세자가 되었다.
문제는 그 강력한 정통성을 채 발휘하기도 전에 문종의 동생이자 자신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인해 노산군으로 폐위된 후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왕이 된 세조는 왕위를 찬탈한 만큼, 정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왕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형, 아버지, 할아버지가 이룩한 조선의 체계를 크게 뒤틀어버린다. 사실상 이때부터 정도전은 물론 태종과 세종대왕이 꿈꾸던 조선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여기에 세조의 적장자인 의경세자는 세조보다 먼저 급사했고, 차남인 해양대군이 왕세자로 왕위에 오르니 제8대 예종이다. 그런데 예종은 재위 1년 만에 죽는 바람에 적장자 계승은 둘째치고 왕위 계승 자체에 상당히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다행히 예종이 일찍 결혼한 덕에 적장자 제안대군를 두긴 두었으나, 그의 나이 겨우 4살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예종의 어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반대가 컸다.[19] 그렇다면 2순위 왕위계승권자는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에게 돌아가야 했으나, 이 역시 정희왕후와 생모였던 수빈 한씨의 반대[20]로 차남 자을산군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성종이다.[21] 성종의 뒤를 잇는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적장자였으나, 중종반정의 폐위로 막을 내렸다.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성종의 차남이다.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의 적장자였으나, 효심이 너무도 지극하여, 중종의 3년상을 치르다가 재위 8개월 만에 요절하고 만다.[22] 13대 명종은 문정왕후의 아들로 중종의 차남이었다. 14대 선조는 아예 조선 최초의 서자 계통 임금이다. 그는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선조 본인은 서자가 아니었지만 장자도 아니었고, 중종의 수 많은 후궁 중 한 명이었던 창빈 안씨의 3남인 덕흥군의 3남이었다. 즉. 핏줄로만 보면 세조보다도 정통성이 떨어지는 왕이었다. 15대 임금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차남이다.[23]
16대 인조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5남인 정원군[24]의 맏아들이었다. 그 역시 정통성이 바닥이었는데 일단 중종과 달리 추대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반정을 주도했고 선조와 같이 왕위 계승 순위와는 영 거리가 멀었다. 17대 효종은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차남으로 소현세자가 급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18대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적장자로 왕위에 올랐으며 19대 숙종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적장자로 왕위에 올랐다. 20대 경종은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의 적장자이나, 희빈 장씨가 왕비에서 후궁으로 강등됨에 따라 "서장자"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21대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숙종의 차남으로 왕위에 올랐다.
22대 정조는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차남으로 영조의 손자로 왕위에 올랐다. 23대 순조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차남[25]으로 왕위에 올랐고 24대 헌종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26]의 적장자인 효명세자(익종)와 신정왕후 조씨[27]의 적장자로 순조의 손자로 왕위에 올랐다. 헌종은 적장자는 아니고, 적장손(孫)으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 김씨의 명령으로 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 이인의 5남 전계군의 3남으로 할아버지 은언군이 강화도 유배에서 사사된 후 왕족임에도 빈농으로 전락하여 봉군되지도 않고 이원범으로 생활하다 일약 조선의 지존으로 왕위에 오르니 그 유명한 강화도령 25대 철종이다.
하지만 철종의 외아들이 요절하고 이에 상심하여 철종도 죽자 안동 김씨 세력에 억눌려 있던 헌종의 생모이자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씨는 흥선군[28]과 결탁해 흥선군의 2자를 익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올리니 26대 고종이다. 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8대손으로 철종과는 17촌간이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29] 초창기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고자 호포제를 실시하고 서원 95%를 철폐하였으며 남인을 끌어다 쓰는 개혁정치를 단행했다.[30]
고종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후에 고종이 을사조약을 폭로하려고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다가 일제에 찍혀서 사실상 폐위당하고 그 아들 순종이 즉위하니 망국의 왕 27대 순종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적장자이다.[31]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과 대한제국의 총 27명의 군주 중 단 7명만이 적장자 출신이다.
적장자 출신 7명의 임금은 5대 문종, 6대 단종,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7대 순종이 있으며 추가로 서장자 출신이나 적장자로 보기도 하는 왕으로 20대 경종[32]이 있다.
조선 초 10명의 임금 중 적장자 출신은 3명 뿐이었고[33], 그나마도 제대로 나라를 다스렸다 할 만한 왕은 없었다. 적장자 출신 왕의 재위기간을 다 합쳐도 20년도 못 된다.
적장자 출신의 7명의 왕들 중, 유일한 적자가 아닌 '적자들 중의 맏형'으로서 왕위를 이은 임금은 5대 문종과 10대 연산군, 12대 인종 뿐인데, 그마저도 연산군과 인종은 각자의 동생인 중종, 명종과 동복은 아니며 그 외 다른 적자 형제는 없었다. 즉, 즉위 당시 기준으로 '여럿 동복 적자 형제들 중의 가장 큰 형'으로서 왕위를 이은 임금은 조선 왕조 통틀어 문종이 유일하다.
그 중에서도 단종과 숙종은 그 아버지까지 적장자 출신이니, 정통성으로 따지자면 조선왕조 투톱인 셈이다.
적장자 출신 왕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0년 9개월인데, 이 평균 수치도 숙종이 45년을 재위한 덕분에 많이 올라간 것이다. 숙종을 제외하면, 평균 재위기간이 약 5년으로 확 줄어든다. 심지어 다른 적장자 출신 왕의 재위기간을 모두 합쳐도 숙종보다 낮다. 평균 수명은 약 36세이다. 그런데 평균 수명이 역시 혼자 58세를 산 숙종 덕에 평균이 좀 올라간 것. 숙종을 제외하면 약 33세로 줄어든다.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단명한 왕들 대부분이 적장자 출신이었다.
적장자 출신의 임금 중 2명의 왕이 반정[34]으로 폐위되었고[35] 그 와중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36] 4명의 왕[37]이 5년을 채 재위하지 못했으며, 1명은 외세에 의해 나라를 빼앗겨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그 외 왕들의 계승 형태는 손자로 계승하거나 동생으로 계승하거나 반정으로 계승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계승하는 등 매우 다양하였다.
종합해보면 제대로 통치한 적장자 출신 임금은 현종과 숙종뿐이니[38], 가히 조선의 적장자 저주라고 이를만 하겠다.
유럽에서는 포르투갈의 브라간사 왕조가 이에 비견할 만하다. 여기는 서자를 인정하지 않는 문화권이니 장자의 저주.
4. 여담
조선 24대 헌종이 자손없이 죽음으로써 정조는 대가 끊겼다. 현재 정조의 후손은 없다.[39]영조의 손자는 정조 외에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었다. 그중 은신군은 영조 말년에 영조 눈 밖에 나 제주로 귀양갔다가 15세에 객사한다. 은전군도 후사없이 1777년(정조 1년)에 역적으로 몰려 죽었다. 마지막 은언군[40]은 여러 자식을 두었으나 거의 대가 끊겼다.[41] 은언군의 후손 중에 풍계군의 서자 익평군의 서자인 경은군만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이 아들들에게 후사가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영조의 남자 형제 경종과 연령군은 후사가 없고, 현종과 숙종은 전부 독자였으므로 만약 경은군의 대가 끊겼다면 효종의 남계 후손은 전부 단절된 셈이 된다.[42]
[1] 현재는 축첩제가 법으로 금지되었지만, 암암리에 나오는 사생아에 대조되는 의미로서의 적자, 적장자라는 용어는 지금도 남아 있다.[2] 혼외자식을 출산하지 않는 건 아니나 첩의 자식이 아니기에 혼외자녀, 사생아라고 부른다.[3] 정작 조선은 별의별 사유들로 적장자 계승이 온전히 이어지지 않은 경우가 상당했다. 이유는 하단 참고. 비단 조선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이런저런 사유로 인해 오로지 적장자로만 대를 꾸준히 잇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4] 한편 서양에서도 적장자 왕위 계승이 웬만해선 원칙이자 유효했다. 아무리 서양이라도 적서의 구분은 동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며 혈연도 필수였기 때문이다. 다만 적자의 정통성을 뒷받침해주는 요인 중 하나인 왕비가 만일 서유럽 문화권의 경우 귀천상혼의 문제로 국내 일반(?) 귀족 출신은 거의 없고, 아무리 귀족 출신이라도 왕족의 방계이거나, 아니면 주변 국가 왕실의 여성이거나의 경우로 양분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종친 및 신하들의 견제로 외척은 파워가 약한 편이며, 그나마도 종친과 신하 두 세력이 치고박고 싸워 약화될 때를 노리는 형태다. 외척이 왕비 - 태후(대비)일 때부터 일찌감치 세력을 바로 형성하여 바로 종친 및 신하들과 대립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동양 왕조 국가와의 큰 차이점. 이로 인해 세력 판도 및 그로 인해 벌어지는 구도는 동서양이 서로 상이하다.[5] 이와는 별개로 서얼 차별은 암묵적으로 있었다. 단지 고려는 첩을 들이지 않는 사회제도를 지녔기에 정실 외의 여자는 정부(情婦) 대우였고 그런 여자와의 관계로 낳은 아이들은 사생아 대접을 받았다. 즉 유럽과 비슷했다.[6] 고려는 불교 사회였고 조선 초기에는 불교와 유교가 섞여있었다.[7] 정경부인이나 정부인 따위.[8] 실제 왕비가 적자를 두지 못해 혼란을 초래한 예는 조선 역사에 수도 없이 많다. 대표적으로 선조 때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영창대군을 낳자, 후궁 공빈 김씨 소생의 세자였던 광해군과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골육상잔이 벌어진 일이 있다. 숙종 때에도 인현왕후가 후사를 보지 못하여 희빈 장씨와 대립하다 폐비되는 사건이 있었다.[9] 송시열과 송준길[10] 그래서 광해군은 아예 어머니이자 선조의 후궁이였던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였고, 후궁 소생인 경종이나 영조나 순조 등도 왕위를 이은 후에 모두 생모 추승 작업에 나선다. 경종은 대빈궁, 영조는 육상궁, 순조는 가순궁으로 추승하였다.[11] 희빈 장씨를 의미한다[12] 선조의 생부이다.[13] 단 과거에 합격했다는 이야기가 없는 걸로 보아 능력 자체가 뛰어난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이방원은 고려 때 과거에 급제했었다.[14] 사실 다른 형제들도 혼맥이 닿아 있긴 했다.[15] 이방우가 세자 취급을 받았다면 다음 차례는 이방우의 아들인 이복근에게 갔겠지만 전술했다시피 이방우는 세자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16]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혹한 이미지의 태종이었으나, 양녕을 폐하고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태종 본인도 적장자가 아니었기에 양녕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후 태종은 세종에게 양녕이 종묘사직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그러나 세종은 양녕을 평생 동안 보호했다. 그런 양녕은 동생의 적장손을 축출하고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 올리는 데 앞장섬으로써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17] 양녕이 품행이 영 바르지 못하고, 학문을 등한시 했어도 내(태종)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미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원경왕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세종실록 3권 1년 2월 무인조>에 기록된 것처럼 양녕을 몹시 아꼈다.[18] 취급 자체는 적장자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적4남이다. 양녕의 형 3명이 조졸했기 때문. 다만 장성하기 전에 죽은 인물들은 후계 구도에서 아예 언급이 안되므로 실질적인 적장자는 양녕이 맞다.[19] 그래서 예종의 정비 안순왕후 한씨는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동서 소혜왕후(인수대비)와 사이가 나빴고,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를 지원했다. 그 덕에 제안대군은 연산의 총애를 받아 갑자사화의 무시무시한 숙청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20] 이로 인해 월산대군과 인수대비는 사실상 모자의 연을 끊어버리는 파국을 맞는다.[21] 성종의 왕위계승에는 고도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었다. 예종의 첫번째 왕비인 장순왕후는 당시 막강한 권신 한명회의 맏 딸이다. 그리고 한명회의 둘째 딸이 바로 자을산군의 부인(공혜왕후로 성종 2년에 급사)이었고 성종의 즉위는 이런 한명회와 인수대비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22] 사실 3년상은 말이 3년상이지 절대 3년을 다 채우지 않는다. 길게 잡아봤자 몇 주 만에 일상으로 복귀한다. 안 그러면 나라가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23] 선조의 첫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는 불임이었고, 당시 조야에서는 광해가 명망이 가장 높았다. 그러다가 선조의 재혼으로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인목왕후 김씨가 왕비로 간택되어 영창대군을 생산하자 폐세자의 위기에 몰린다. 하지만 영창대군이 고작 3살일 때 선조는 병이 깊어져 죽었고, 그대로 왕이 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에는 매우 총명했으나, 선조의 질투로 인해 온갖 구박과 모욕을 받아서인지 왕이 된 이후론 선왕의 비인 왕대비를 폐하고(폐모론) 옥사를 많이 일으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다.[24] 훗날 원종으로 추증.[25] 장자는 문효세자이다[26] 이때부터는 왕비가 모두 안동 김씨이다[27]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와 세도정치로 같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28] 흥선군은 본인이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물론 무리이긴 하지만 말이다.[29] 완전히 몰아낸건 아니다. 김병학은 흥선군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고 김병국 역시 흥선군의 지략을 높이 평가해 친분이 있었다[30] 당시 안동 김씨들 다수는 세력을 잃었지만 워낙 민란이 폭주하고 사실상 통치 질서가 무너져 묵인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00년의 뿌리 깊은 세도 정치를 제 아무리 흥선대원군이라도 철폐할 수 없었을 것이다.[31] 면밀하게 따지면 적차자이긴 하다. 왜냐하면 순종황제의 형이 항문 없이 태어나는 바람에 생후 며칠 만에 바로 죽어버려서 사실상 적장자나 다름없이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걸 적차자라고 적는다면 태종의 아들인 양녕대군도 적장자가 아니게 된다.[32] 장자는 맞으나 엄밀히 말하면 서장자이다. 그러나 학계는 희빈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 있었기에 사실상 적장자로 간주한다. 참고로 경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공식적인 조선왕가의 입장은 숙종의 서장자로서 계승했다는 것이다.(경종은 다른 서자 출신 왕처럼 부왕의 정궁인 인현왕후에게 입적되었다.)[33] 문종, 단종, 연산군[34] 계유정난, 중종반정[35] 정확히는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폐위된 게 아니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 나중에 폐위된 것이다.[36] 경종은 독살설이 당대에도 파다했지만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37] 문종, 단종, 경종, 순종. 심지어 인종은 1년도 채우지 못한 8개월 3일이란 조선 임금 중 가장 짧은 기간 재위라는 충격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38] 문종의 경우 세종의 건강 문제로 인해 10년 가까이 대리청정을 하며 실질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던 적이 있긴 하다.[39] 남계 뿐만 아니라 여성 여계 후손도 없다.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자손은 옹주의 손자대에서 끊겼고 손녀인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영온옹주는 후사가 없거나 자손이 모두 요절, 현손녀(헌종의 딸)는 태어난 당일 사망하였다.[40] 은언군도 1801년(순조 1년) 정순왕후에 의해 사사당했다. 죄명은 당시 사학이던 천주교 숭배.[41] 당장 철종의 형인 이원경(훗날 화평군 작호가 내려짐)도 역모로 처형당했다.[42] 반면 왕위후계에서 효종에게 밀려난 소현세자의 계통은 여러차례 단절의 위기를 겪었으나 현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