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묘호의 하나
肅宗동아시아의 군주가 사후에 받는 묘호 중에 하나다.
1.1. 설명
- 굳센 덕으로 이겨내며 나아감을 숙이라 한다(剛德克就曰肅).
- 마음을 굳게 잡고 일을 결단함을 숙이라 한다(執心決斷曰肅).
1.2. 숙종의 묘호를 받은 군주
<rowcolor=#683235> 성명 | 묘호 | 시호 | 재위 기간 | 비고 |
한국사 | ||||
<colbgcolor=#FFF6E8> 왕옹(王顒) | 고려숙종 (高麗肅宗) | 강정문혜명효대왕 (康正文惠明孝大王) | 1095년 ~ 1105년 | 15대 대왕 |
이순(李焞) | 조선숙종 (朝鮮肅宗) |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 1674년 ~ 1720년 | 19대 대왕 |
중국사 | ||||
유달(劉炟) | 한숙종 (漢肅宗) | 효장황제(孝章皇帝) | 75년 ~ 88년 | 3대 황제 |
모용홍 (慕容弘) | 서연숙종 (西燕肅宗) | 열문황제(烈文皇帝) | 384년 | 1대 황제 |
원후(元詡) | 북위숙종 (北魏肅宗) | 효명황제(孝明皇帝) | 515년 ~ 528년 | 9대 황제 |
고연(高演) | 북제숙종 (北齊肅宗) | 효소황제(孝昭皇帝) | 560년 ~ 561년 | 3대 황제 |
이형(李亨) | 당숙종 (唐肅宗) | 문명무덕대성대선효황제 (文明武德大聖大宣孝皇帝) | 756년 ~ 762년 | 7대 황제 |
완안파자숙 (完顔頗刺淑) | 금숙종 (金肅宗) | 명예목헌황제 (明睿穆憲皇帝) | - | 금태조 추존 |
베트남사 | ||||
여순(黎㵮) | 여숙종 (黎肅宗) | 소의현인온공연묵돈효윤공흠황제 (昭義顯仁溫恭淵默惇孝允恭欽皇帝) | 1504년 | 7대 황제 |
완복주 (阮福澍) | 완숙종 (阮肅宗) | 선광소렬준철정연경문위무효녕황제 (宣光紹烈濬哲靜淵經文緯武孝寧皇帝) | 1725년 ~ 1738년 | 7대 왕 |
총 수여자 10명 |
1.3. 문제 출제 유형
고려시대 숙종때 해동통보를 주조한 것과 천태종을 창시한 의천이 있는데, 해동통보를 성종때인 건원중보로 말바꾸기식과 천태종인 의천을 선종(조계종)으로 말바꾸기식으로 출제 되는 경우가 있다.조선시대 숙종 때 상평통보와 대동법을 전국으로 실시한 것이 있는데 상평통보는 조선후기때 대표적으로 쓰이던 화폐로서 유통이 활발하였다는 문제로 조금 평이한 수준으로 출제되며 대동법을 전국으로 실시하였는데 광해군때인 경기도 한정으로 오답형으로 조금 까다롭게 출제되는 경우가 있다.
2. 신라 후기의 화랑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537B, #006494 20%, #006494 80%, #01537B);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6494> 진흥왕대 | <colbgcolor=#fbe673> 국선 | <colbgcolor=#fff,#191919>설원 | 백운 |
진지왕대 | 국선 | 미시랑 | |
진평왕대 | 국선 | 구참공 | 김유신 | |
효소왕대 | 국선 | 부례랑 | |
헌안왕대 | 국선 | 김응렴 | |
경문왕대 | 국선 | 요원랑 | 예흔랑 | 계원 | 숙종랑 | }}}}}}}}} |
叔宗郞
신라 하대 인물이자, 제48대 경문왕 시대의 화랑이자, 국선.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군. 즉 금강산 인근이다. 금강산 인근 지역들에 화랑들의 일화가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일대를 계원(桂元),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등의 다른 화랑들과 유람하다가 경문왕을 위할 뜻을 품어 노래 3수를 지었고 초벌 원고를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 노래 세 곡을 짓도록 했다. 숙종이 지은 노래의 제목은 문군곡(問群曲)이었고, 경문왕이 크게 기뻐해 상을 내렸다고 한다. 문군(問群)은 "무리에게 묻는다"는 뜻이므로, 이 음악은 국왕과 백성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음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구화상은 얼마 뒤 진성여왕 시대에 김위홍과 함께 향가모음집 삼대목을 편찬하므로, 이 노래는 삼대목에 수록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