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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16:02:33

덕온공주


조선의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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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순조의 황녀
덕온공주 | 德溫公主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순조의 왕녀
덕온공주 | 德溫公主
출생 1822년 7월 27일[1]
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844년 7월 9일[2] (향년 21세)
조선 한성부 저동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묘소 미상
재위기간 조선 덕온공주
1829년 4월 9일 ~ 1844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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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순조 숙황제
모후 순원숙황후
형제자매 부황 기준 2남 4녀 중 4녀
모후 기준 2남 3녀 중 3녀
배우자 남녕위 윤의선
(南寧尉 尹宜善, ? ~ 1887)
봉호 덕온공주(德溫公主)
궁호 저동궁(苧洞宮)
}}}}}}}}} ||
1. 개요2. 생애
2.1. 축복받은 탄생2.2. 공주로 책봉되다2.3. 예정된 혼인2.4. 예술 활동2.5. 이른 죽음
3. 유물4. 여담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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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순조순원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3녀. 또한 조선 역사상 왕비의 몸에서 태어난 마지막 적통 공주이다.[3]

2. 생애

2.1. 축복받은 탄생

1822년(순조 22) 6월 10일 묘시(卯時)[4]에 태어났고, 순산이었다.[5] 당시 순조는 창덕궁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공주가 태어난 곳은 창덕궁 대조전으로 추측된다. 궁중 여성들은 본인의 거처에서 출산하였으므로, 대조전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6]

공주가 태어나기에 앞서 1820년(순조 20), 순원왕후가 대군을 낳은 일이 있었다. 효명세자에 이어 차남이었다. 그러나 불우하게도 생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순원왕후의 나이 34세, 차남을 잃고 2년여 만에 낳은 자식이 덕온공주였다.

또한, 덕온공주가 태어난 1822년(순조 22)은 효명세자가 14세로 이미 혼인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공주가 태어날 당시에는 동복오빠 효명세자와 언니 명온공주, 복온공주, 이복 언니 영온옹주를 비롯해 세자빈 조씨까지 있어서 왕실이 한창 다복한 시기였다.[7]

2.2. 공주로 책봉되다

명온공주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하였듯, 덕온공주도 병치레가 잦았다.[8] 다행히 무사히 성장하여 1829년(순조 29) 3월 6일, 8세의 나이에 덕온(德溫)이라는 작호를 받고 공주로 책봉되었다.
"제삼 공주(第三公主)의 작호(爵號)를 덕온(德溫)으로 하고, 공상(供上)과 전결(田結) 등에 관한 일을 전례에 의거해 마련하라."
순조실록》 순조 29년 3월 6일

조선시대에 왕자, 왕녀는 단순히 책봉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에 수반되는 토지와 녹봉을 받았다. 순조는 덕온공주를 책봉하면서 "공상(供上)과 전결(田結) 등에 관한 일을 전례에 의거해 마련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공상과 전결 등이 직위에 수반되는 녹봉과 토지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 공상과 전결을 합해서 궁방전이라고 불렀는데, 속대전[9]에 의하면 대군과 공주가 받는 궁방전의 규모는 850결이다. 이에 따라 덕온공주도 850결의 전결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호조에서는 850결의 전결 중에서 250결은 국가에서 마련해주고, 나머지 600결은 덕온공주방에서 토지를 매입해서 대체하자고 하였다. 순조는 "언제 나머지 600결을 매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즉시 850결을 마련해주게 하였다.[10] 여기에 더하여 토지를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2,500냥의 거금이 지급되었다.[11]

뿐만 아니라 공주는 책봉되고 5년 동안 태(太) 100석과 미(米) 100석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12] 그외에 이런저런 잡물들도 공상으로 받았다.

2.3. 예정된 혼인

공주로 책봉된 뒤, 덕온공주는 차례대로 가족들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공주로 책봉된 지 1달 뒤에는 이복언니 영온옹주가, 9세 때인 1830년(순조 30)에 효명세자가, 11세 때인 1832년(순조 32)에 언니 명온공주복온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13세 때인 1834년(순조 34) 11월에는 아버지 순조마저 세상을 떠났다. 8살 때부터 13살까지 1~2년 간격으로 가족 5명이 줄초상이 난 것이다.

순조의 3년상이 끝나고 1837년(헌종 3) 5월 10일에 대왕대비가 된 순원왕후가 금혼령을 내리면서 가례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덕온공주의 나이가 16세가 되어서 더이상 부마 간택을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13] 그해 5월 2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초간택이 열렸다.[14] 이때 헌종과 순원왕후가 함께 희정당으로 나갔다. 그러나 헌종은 아직 10세에 불과한 어린아이였고, 부마 간택의 주도권은 수렴청정 중인 순원왕후에게 있었다.
생원 윤치승의 아들 윤인갑[15], 유학 서두보의 아들 서뢰윤, 부호군 오취선의 아들 오흥세, 전(前) 현감 홍재과의 아들 홍한종, 유학 박제신의 아들 박쾌열
재간택 후보자 명단
생원 윤치승의 아들 윤인갑, 유학 서두보의 아들 서뢰윤, 부호군 오취선의 아들 오흥세
삼간택 후보자 명단

다시 창덕궁 희정당에서 6월 4일 재간택, 6월 25일 삼간택을 거쳐 순원왕후는 윤치승의 아들을 낙점하였다. 하지만 간택은 형식이었을 뿐, 이미 윤의선을 점찍어놓고 있었던 것 같다. 순원pick 순원왕후는 삼간택을 치른 6월 25일 당일에 윤의선을 남녕위(南寧尉)로 봉작하였다. 보통의 순서는 이렇다. 예조에서 의논하여 3개의 작호를 올리면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알린다. 그 다음 교지를 내려 책봉하는 순서다. 이처럼 삼간택 당일에 봉작하는 것은 순원왕후가 미리 지어놓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초간택에서 수망(首望)한 동몽은 어떻습니까? 경은 노인이고 경력이 많으신데 소견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조만영이 일어났다가 엎드려 아뢰기를, “이 가문은 이전부터 복가(福家)로 전해졌습니다. 고 상신(故相臣) 윤두수는 그 공훈이 사직에 있어서 대대로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해숭위(海崇尉)[16] 역시 현명한 부마로 칭송되었습니다. 동몽의 할아버지인 고 참판(故參判) 윤명렬(尹命烈)은 관직이 아경(亞卿)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인(福人)이라고 했으며, 그 가문의 후손이 번성하였습니다. 동몽으로 말하면 몹시 정명상길(精明祥吉)합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헌종 3년 6월 4일

더군다나 윤의선의 어머니는 순원왕후와 같은 안동 김씨 가문이었다. 계보를 살펴보면, 윤의선의 어머니 김씨의 부친 김이상(金履祥)과 순원왕후의 조부인 김이중(金履中)은 모두 김생해(金生海)의 8대 후손이다.

명온공주복온공주부마안동 김씨 가문의 남자였다. 순원왕후는 이번에도 인척 관계에 있는 윤의선을 사윗감으로 고른 것이다.

한편, 현재까지 남아있는 덕온공주의 혼수 품목을 보면 순원왕후의 세심한 준비가 눈에 띈다. 특히 5m가 넘는 혼수 발기에는 200여종에 달하는 혼수 품목이 빼곡히 적혀져 있다. 노리개, 비녀, 댕기 등의 장신구부터 사발, 대접 등의 그릇과 가위, 인두 등의 바느질 도구까지 살림에 쓰이는 온갖 물건이 적혀 있다.[17]

8월 13일, 공주는 사동본방[18]에서 친영례를 치르고, 저동에 마련된 신혼집으로 갔다.

2.4. 예술 활동

효명세자는 삼매연림(三妹連林)[19]이라는 글에서 "덕온이는 성격이 총혜하고, 기골이 청명한데 하루종일 말없이 조용히 앉아있다"고 표현했다. 그 말처럼 총명하고 슬기롭지만,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이 바로 덕온공주였다.

당대 왕실의 분위기는 개인적인 취미생활과 문화 예술적인 성취에 힘쓰는 경향이 있었다. 효명세자춘앵무를 만들 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400여 개의 시를 남기고 시집을 엮을 만큼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였다. 덕온공주와 복온공주도 각자 시문을 남겼고, 순조는 딸이 쓴 시에 대해 평가하고 상을 내려주는 등 이같은 분위기에 일조하였다.

덕온공주도 이러한 환경에 영향을 받았다. 공주가 저동궁으로 들어가면서 가져간 국문·한문책의 수가 4천 권을 넘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일촬금(一撮禁)》, 《춘련(春聯)》과 같이 공주가 직접 베껴 쓴 것으로 전해지는 것이나 《제갈무후마상점(諸葛武侯馬上占)》 같이 당대 문화와 풍속을 짐작할 수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慈慶殿記)》가 있다. 자경전은 1777년(정조 1) 정조창경궁 양화당 옆의 작은 언덕에 지은 건물이다.[20] 18세의 순조는 효의왕후의 명으로 '자경전기'를 지었는데, 여기에 정조가 자경전을 지은 목적과 자경전의 이름에 담긴 뜻, 효의왕후가 혜경궁 홍씨의 양보로 자경전에서 지내게 된 사실, 효의왕후의 명으로 순조가 '자경전기'를 짓게 된 점, 창경궁 내 자경전의 위치, 효의왕후의 아름다운 덕, 자경전에서 바라본 주변 환경, 자경전의 빼어난 경치와 사계절 등을 차례대로 담았다. 덕온공주의 '자경전기'는 옛날에 순조가 한문으로 적은 '자경전기'를 한글로 옮겨 쓴 것이다.[21]

2.5. 이른 죽음

1844년(헌종 10) 5월 24일, 혼인한 지 7년 만에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22] 이렇게 순원왕후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30세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덕온공주의 갑작스러운 사망에는 '급체'가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공주가 사망한 5월 24일은 헌종계비간택하는 날이었는데, 당시 임신 중이던 덕온공주가 경사를 치르기 위해 창경궁 통명전에 들어갔다가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고 급체[23]하고 말았다. 사망하기 직전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곧바로 사망하였고, 공주 역시 아이를 매장한 지 약 2시간 정도 있다가 사망하였다는 내용이다.

다만, 현존하는 기록과 상반되는 면이 있다. 실제로 헌종의 계비 간택은 1844년 4월 22일 창경궁 자경전에서 열린 초간택, 4월 26일 창경궁 자경전에서 열린 재간택, 9월 10일 경희궁 장락전에서 열린 삼간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5월 24일은 간택이 없었다.

이듬해 2월 보름날에 순원왕후가 덕온공주 망전[24]에 갖가지 음식을 챙겨 보냈다. '망전단자'에 따르면, 보낸 음식은 밤다식, 오미자다식, 흑임자다식, 오미자병, 앵두편, 약식 등이다.

남녕위 윤의선은 이후 43년을 더 살고 1887년(고종 24년) 12월 29일에 사망하였다. 국법에 따르면 부마는 재혼이 금지되어 있다. 그는 평생 혼자 살았고, 공주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었으므로 철종 대에 이르러 친척 윤용구를 양자로 삼았다.

3. 유물

4. 여담

5. 가족관계


[1] 음력 순조 22년 6월 10일[2] 음력 헌종 10년 5월 24일[3] 순조 이후에 명성황후공주를 낳았지만 관례를 치르기 전에 조졸했고, 이후 적출왕녀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았다. 서출왕녀까지 포함하더라도 철종의 유일한 자녀였던 영혜옹주와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뿐이다.[4] 아침 5시에서 7시 사이.[5]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6월 10일 임자 1번째기사. #[6] 그 예로 명성왕후는 자신의 거처인 경희궁 회상전에서 숙종을 낳았고, 수빈 박씨는 순조를 창경궁 집복헌에서 낳았다.[7] 왕실이 아닌 민간에서는 1821년부터 시작된 콜레라의 대유행 시기였다. 이 때문에 1822년까지 순조의 명으로, 전국 각지에서 역병을 불러오는 귀신에게 여러 번 제사를 지냈다. #[8] 순원왕후가 덕온공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어디가 아픈지, 앓고 있는 병이 어떤지, 잘 나았는지 등의 공주의 건강을 언급하는 말이 자주 나온다.[9] 1746년(영조 22) 때 편찬한 법전.[10] 승정원일기, 순조 29년 3월 6일. #[11] 승정원일기, 순조 29년 3월 12일. #[12] 승정원일기, 순조 29년 3월 11일. #[13] 보통 왕실의 혼인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10세에서 13세 사이에 치러진다.[14] 승정원일기, 헌종 3년 5월 26일. #[15] 윤의선의 형 이름이 윤종선(尹宗善)인 것으로 볼 때, 윤인갑은 윤의선의 아명으로 보인다.[16] 해숭위 윤신지. 윤두수의 손자로 선조의 서3녀 정혜옹주의 부마이다.[17]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덕온공주의 당의, 원삼 등의 의복 유물 및 장신구 일체는 혼수로 마련된 것들이다.[18] 사동궁과는 다른 곳으로, 순원왕후의 친정집을 말한다.[19] '3명의 여동생들이 숲처럼 연달아 있다'는 뜻이다.[20] 자경전의 '자경(慈慶)'은 임금의 어머니가 장수하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21] 덕온공주가 직접 번역하여 한글로 옮겨 적었을 수도 있고, 다른 이가 번역한 것을 공주가 필사만 했을 수도 있다. 학계에서는 후자에 더 가능성이 실린다.[22] 승정원일기, 헌종 10년 5월 24일. #[23] 현대에는 급체가 심각한 질병이 아니나, 당시엔 급체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24] 음력 보름날 아침에 지내는 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