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14:36:26

아르노 드 세르볼

성명 아르노 드 세르볼
Arnaud de Cervole
생몰년도 1320년경 ~ 1366년 5월 2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페리고르 로에가론
사망지 프랑스 왕국 빌프랑슈 인근 글레이제
아내 잔 드 그라세이, 잔 드 샤토빌랭
자녀 필리프, 마르그리트
직위 프랑스 용병대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부르주아, 용병대장.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

2. 생애

1320년경 프랑스 왕국 페리고르의 로에가론에서 출생했다. 그는 일찍이 교회에 들어갔고, 페리고르 교구에서 대제사장이 된 뒤 도르도뉴의 벨린 교회 영지를 소유했다. 이 이력으로 인해, 그는 '벨린의 대제사장(Archiprêtre de Velines)'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는 곧 성직자가 되기를 관두고 용병으로서 백년전쟁에 참여했고, 1347년 보르도 대주교로부터 대제사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1351년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심복인 샤를 드 라 세르다에게 고용되어 80명의 부대를 지휘할 권한을 부여받고 페리고르에서 잉글랜드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후 몽카레, 베르주라크, 플릭스 및 기트르 성을 보수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장 2세로부터 200리브르의 연간 수입을 얻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약탈을 종종 일삼았기에, 프랑스 민중으로부터 도적이라는 비방을 받았다.

1354년 1월 8일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카를로스 2세에게 피살당한 뒤 프랑스 왕실이 자신에게 보내던 연간 수입이 끊어지자, 그는 부하들을 선동해 앙굴렘에 있는 3개의 성을 점령했다. 이후 브레퇴유 공방전에서 장 2세에게 재기용되었고, 본대가 브레퇴유를 포위하는 동안 자신은 부하들을 이끌고 노르망디의 여러 마을을 심하게 약탈했다. 나중에 이 일로 기소되었지만, 장 2세는 반역자 카를로스 2세 일당을 토벌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사면하고 샤토뇌프의 영주권을 양도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소속되어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생포되었다. 이후 회복되어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그는 르브루 영주 앙드레 드 샤토루-쇼비니의 미망인으로서 프랑스 중부에서 여러 영주권을 가지고 있던 부유한 미망인 잔 드 그라세이와 결혼했다. 그 결과 르브루의 영주이자 그라세이 남작이 되었고, 장 2세의 셋째 아들인 장 드 베리로부터 콩크리슈를 양도받았다.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평화 협상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중단되었고, 프랑스 왕국은 용병대에 대한 급료 지급을 중단했다. 이에 용병대는 프랑스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아르노는 1357년경 다른 자유 용병대가 결합된 대 용병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총 2,7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지휘해 프로방스를 심하게 약탈한 뒤 교황청의 본거지인 아비뇽으로 쳐들어가 포위한 끝에 교황 인노첸시오 6세로부터 금 20,000 플로린을 받아낸 뒤 부하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1358년 4월에 마르세유를 공략하려 했지만, 그곳의 인구가 너무 많고 방어가 잘 되어 있어서 공략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이후 느베르의 성주로서 샤를 왕자에게 고용되어 에티엔 마르셀의 난과 자크리의 난 토벌에 투입되었다. 그러던 중 말리코른 성이 잉글랜드 용병대장 로버트 놀스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방향을 돌려 그곳을 되찾기로 했다. 주변 마을 주민들이 아르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놀스는 프랑스군의 공세를 격퇴했다. 결국 아르노는 말리코른 성 탈환을 포기하고 파리로 북상해 샤를 왕자가 파리를 되찾는 데 일조했다.

1362년 프랑스 시골 지역을 심하게 약탈하고 있는 자유 용병대를 토벌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1362년 4월 6일 브리네 전투에서 장 2세 드 멜룬, 자크 1세 드 부르봉의 지휘를 받으며 자유 용병대와 교전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하지만 자유 용병대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곧 해산되었고, 그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뒤 부하들을 이끌고 부르고뉴 일대를 약탈했다.

그러다가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에 의해 고용되었다. 호담공 필리프는 마침 아내를 잃어 홀아비였던 그에게 샤토빌랭과 아르크앙바로아의 영주인 장 3세 드 샤토빌랭의 딸인 잔 드 샤토빌랭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는 1363년에 아들 필리프를 낳았고, 호담공 필리프가 아기 필리프의 대부가 되어줬다. 1364년 5월 16일, 아르노는 카를로스 2세에게 고용되어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대적했지만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곧 철수했다. 샤를 5세가 자신의 정적인 카를로스 2세를 도운 것에 분노하자, 호담공 필리프는 프랑스 왕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갖가지 조치를 내려야 했다.

1365년, 호담공 필리프는 아르노를 프랑스 바깥으로 보내기로 마음먹고, 헝가리에서 튀르크족에게 대항하는 십자군에 가담하도록 요청했다. 그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용병대를 이끌고 출진했지만, 도중에 로렌, 보주 등 라인강 유역 도시들을 황폐화시켰고, 슈트라스부르크에 그대로 머물렀다. 1366년 초, 그는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조직한 사보이아 십자군에 참여하러 길을 떠났다. 그러나 1366년 6월 25일 솜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다가 빌프랑슈 인근의 글레이제에서 어느 종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살해되었다.

그는 생전에 잔 드 그라세이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고, 잔 드 샤토빌랭과의 사이에서 아들 필리프와 딸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아들 필리프는 비트르의 세네샬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시종이 되었고, 마르그리트는 기사 자크 드 댕트빌의 부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