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라마르슈와 퐁티외 백작 자크 1세 드 부르봉 Jacque Ier de Bourbon, comte de La Marche et de Ponthieu | ||
이름 | 자크 1세 드 부르봉 (Jacques Ier de Bourbon) | |
출생 | 1319년경 | |
프랑스 왕국 미상 | ||
사망 | 1362년 4월 6일 (향년 42~43세) | |
프랑스 왕국 리옹 | ||
배우자 | 잔 드 샤티옹 (1335년 결혼) | |
자녀 | 이자벨, 피에르, 장 1세, 자크 | |
아버지 | 루이 1세 드 부르봉 | |
어머니 | 마리 드 에노 | |
형제 | 잔, 피에르 1세, 베아트리스, 마르그리트, 마리, 필리파 | |
직위 | 라마르슈 백작, 퐁티외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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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라마르슈와 퐁티외 백작.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로잡혔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 체결 후 석방된 뒤 프랑스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용병 집단 토벌에 나섰으나 용병들의 기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2. 생애
1319년경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과 에노 백작 장 1세의 딸 마리의 막내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잔[1],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베아트리스[2], 마르그리트[3], 마리[4], 필리파[5]가 있었다.1347년 로베르 드 워랭 원수와 함께 포르투아 북동부의 주요 도시인 베쑨네로 진군한 뒤 플란데런 반란군 축출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릴, 베듄느 수비대와 샤를 드 라 세르다의 부관인 샤를 드 몽모랑시 휘하 부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프랑스 북동부 국경부대를 에어쉬르라리스, 생오메르 주둔군 대다수와 합께 소집했다. 그 해 6월 13일 플란데런 반란군 숙영지를 야습 공격해 격파했고, 여세를 이어가 플란데런으로 진격했지만 플란데런인들이 군대를 재정비한 뒤 반격을 가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물러났다.
1349년 랑그독 중위로 선임되었고, 1350년 아게니스 변경의 무아삭에서 집결한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맡았다. 그해 2월 2일 두 명의 교황 사절과 함께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협상을 한 끝에, 랑그독과 아게니스 등지에서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 휴전은 4월에는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354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된 뒤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잉글랜드와의 전쟁 재개 계획 구상에 참여했다. 그러나 나바라 국왕에자 에브뢰 백작 카를로스 2세의 음모가 프랑스 정부를 혼란에 빠뜨리면서,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뒤로 미뤄졌다.
1355년 5월, 카를로스 2세의 군대가 노르망디의 코탕탱 반도로 진격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군은 6월 4일 노르망디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는 캉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지휘해 카를로스 2세를 저지했다. 그러면서도 코탕탱 반도에 상륙한 카를로스 2세와 만나 장 2세가 그를 용서하기로 했으니 협상에 응해달라고 건의했다. 카를로스 2세는 7월 5일 세르부르에 도착한 직후 협상을 시작했고, 9월 10일 발로뉴 조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의 조항 중에는 노르망디에 있는 카를로스 2세의 성채와 도시 중 7개가 명목상 자크 1세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1355년 가을, 자크 1세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 프랑스 원수 장 드 클레르몽과 함께 흑태자 에드워드의 슈보시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아르마냐크에서 대대적인 약탈에 착수했다. 그들은 약탈과 파괴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평행하게 진군하는 3개의 종대로 나뉘었고, 11일 동안 아르마냐크 전역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며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대부분의 마을은 명목상으로만 요새화되었기에 쉽게 습격당하고 파괴되었다. 세 장군은 야전에서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툴루즈에 웅크렸다. 그러면서 툴루즈로 접근할 때 건너야 하는 가론 강과 아리에주 강의 다리를 절단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여울목을 통해 강을 건넜고, 그 과정에 말 몇 마리와 적은 수의 병사만 잃었다.
자크 1세는 에드워드 왕자가 툴루즈로 쳐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나른 강과 기론 강의 교차점을 지키기 위해 몽토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툴루즈로 가지 않고, 이전에는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던 툴루즈 동쪽의 곡창지대로 향했다. 동시대 역사가는 툴루즈 동쪽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기름진 땅"이라고 묘사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 풍요로운 곳을 계속해서 약탈하고 불태웠다. 강력한 요새를 제외한 모든 곳이 습격되었으며, 수많은 이들이 피살당하거나 생포되었다. 일부 잉글랜드군은 본군에서 최소 39km 떨어진 범위 내에 흩어져서 수많은 작은 마을들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잉글랜드군이 툴루즈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카르카손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인근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했다. 이에 공성을 개시해 한나절 만에 함락시키고 사흘간 심각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11월 8일, 잉글랜드군은 지중해에서 16km 떨어진 나르본에 도착했다. 그들은 인근 요새를 무시하고 마을을 빠르게 점령하고 약탈했다. 요새에 있던 프랑스군은 그들에게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이후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나르본에서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그는 장 1세 드 아르마냐크, 장 드 클레르몽과 함께 군대의 일부를 나르본에서 서쪽으로 24km 떨어진 홈프스로 이동시켰다. 이 곳은 오데 강을 건너는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로 돌아갈 때 오데 강을 무리하게 건너 이들과 싸우다가 막심한 손실을 입도록 강요하려 했다.
11월 10일,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그는 당초 적군 정예병이 주둔하고 있는 홈프스를 회피하고자 북동쪽의 베지에로 향했지만, 정찰병들이 그곳이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전쟁 회의를 열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들은 뒤 홈프스를 무력으로 뚫기로 결의하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물이 부족해지면서 다들 갈증에 시달렸다. 한 연대기에 따르면, 말에게 먹일 물이 없어서 포도주를 줘야 했다고 한다. 잉글랜드군이 이러한 역경을 무릅쓰고 홈프스에 접근하자, 프랑스군은 막상 적과 대결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게 싫었는지 툴루즈로 후퇴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카르카손까지 추격한 뒤 자신이 파괴해서 황량해진 진군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남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이후 자크 1세는 에드워드를 쫓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장 1세 다르마냐크와 논쟁했다. 그는 적을 추격해서 행군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 1세 다르마냐크는 툴루즈에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다. 며칠간의 논쟁 끝에, 장은 자크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잉글랜드군을 아르마냐크 동부에 있는 세바 강에서 차단해 적지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려 했다. 11월 20일, 자크와 장이 파견한 선봉대가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과 맞붙었다가 패퇴했다. 에드워드는 적과 회전을 벌이기 위해 11월 22일에 프랑스군 가까이에 진을 쳤지만, 자크와 장은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도 회전을 피하기로 하고 밤중에 철수했다. 에드워드는 가스코뉴로 계속 행군하여 11월 28일 가스코뉴에 도착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프랑스 남부에서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는 동안, 그와 장 1세 다르마냐크, 장 드 클레르몽은 잉글랜드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두려워 해 그 뒤를 쫓아갈 뿐 이렇다할 군사 작전을 벌이지 않아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는 국왕 장 2세에게 자신이 적극적으로 싸우려 했으나 장 1세 다르마냐크가 툴루즈에서 농성만 하려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고 호소했지만, 세간의 비난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1356년 5월 무관장 직을 사임했고, 그 해 9월 19일에 발발한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했다가 생포되었다. 이후 장 3세 드 그라일리를 비롯한 동료 5명과 함께 흑태자 에드워드의 포로가 되었고, 몸값은 25,000 에퀴로 책정되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이 체결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평화가 성립되었다. 그 덕분에 석방된 그는 1362년 제대한 용병 부대가 프랑스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것에 질린 장 2세로부터 용병 부대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장 2세 드 멜룬과 함께 브리네에서 군대를 집결했지만, 그 해 4월 6일 아침에 용병부대의 예상치 못한 기습 공격으로 발발한 브리네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큰 아들 피에르와 함께 중상을 입고 패주한 뒤 리옹에서 피에르와 함께 사망했다.
3. 가족
- 잔 드 샤티옹(1323 ~ 1371): 루제의 영주인 위그 드 샤티옹의 딸.
- 이자벨(1340년에서 1350년 사이 ~ 1371): 보몽 자작 루이 2세 드 브리엔과 초혼, 방돔 백작 부샤르 7세와 재혼.
- 피에르(1342 ~ 1362): 라마르슈 백작. 1362년 브리네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함.
- 장 1세(1344 ~ 1393): 라마르슈 및 방돔 백작.
- 자크(1345년에서 1350년 사이 ~ 1416년에서 1417년 사이): 쁘호 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