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000000>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도 1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Erzherzogin Maria Carolina von Österreich | ||
<colbgcolor=#FFC1C1> 이름 | 독일어 |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제 요제파 요하나 안토니아 (Maria Carolina Luise Josepha Johanna Antonia) |
이탈리아어 |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사 주세파 조반나 안토니아 (Maria Carolina Luisa Giuseppa Giovanna Antonia) | |
출생 | 1752년 8월 13일 |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쇤브룬 궁전 | ||
사망 | 1814년 9월 8일 (향년 62세)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헤첸도르프 궁전 | ||
배우자 | 페르디난도 1세 (1768년 결혼)[1] | |
자녀 | 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카를로, 마리아 안나, 프란체스코 1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아말리에, 젠나로, 주세페,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안토니아, 마리아 클로틸다, 마리아 엔리케타, 레오폴도, 알베르토, 마리아 이사벨라 | |
아버지 | 프란츠 1세 |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지아 | |
형제 |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마리아 요안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페르디난트, 마리아 안토니아, 막시밀리안 프란츠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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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의 10녀. 애칭은 샤를로트.[2]2. 생애
2.1. 어린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10녀로 태어났으며 마리아 카롤리나는 요절한 언니들인 3녀[3]와 7녀[4]의 이름을 물려받았다.그녀는 총명한 머리와 여장부같이 활달하고 강인한 성격을 지녔으며, 수많은 남매들중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가장 닮은 딸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여러 명의 남매들과 자매들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유별난 편애를 받아서 모든 남매들의 공공의 적이었던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를 제외하고 그녀는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하게 지냈으며 특히 3살 아래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는 서로 장난을 치고 장난감과 옷도 나눠 가지는 등 제일 친했다.
이후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서로 다른 나라로 시집을 간 후에도 안부를 주고 받았으며, 프랑스 혁명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주리에 유폐된 상황에서도 언니 마리아 아말리아와 더불어 유일하게 마리 앙투아네트와 계속 서신 왕래를 했다고 한다. 나중에 조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는 카롤리나에게 "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모를 가장 사랑하셨어요"라고 언급했을 정도.
2.2. 동생과 뒤바뀐 운명
사실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야 할 사람은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닌 마리아 카롤리나였다.당시 합스부르크 가와 부르봉 가문 간의 협력과 화해를 위한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마리아 아말리아는 파르마 공국의 후계자, 요제파는 나폴리-시칠리아 왕세자, 카롤리나는 프랑스 왕태자와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 카롤리나의 바로 윗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요제파 언니를 대신해 나폴리-시칠리아 국왕과 카롤리나가 결혼하게 되고 카롤리나를 대신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세자와 혼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나폴리로 시집가서 많은 자식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리고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을 때까지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던 카롤리나의 행보를 감안할때 만약 그녀가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5]
2.3. 결혼 생활
페르디난도는 사냥과 낚시를 즐겼지만 정치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그런 남편과 달리 그녀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랬듯이, 남편과 권력을 보필하기만 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달리 최고의 교육을 받은 데다가 야심도 강했다.
2.4. 정치적 활동
불과 만 15세에 나폴리에 도착한 마리아 카롤리나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정치적 권력을 손에 얻고자 했다. 당시 나폴리는 친 스페인계의 총신인 베르나르도 타누치 후작이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페르디난도의 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가 직접 임명한 대신이었다. 마리아 카롤리나가 처음 한 일은 그를 제거하는 일이었다.[6]처음에는 자신의 세력이 없었지만 약 10년 동안 남편의 신뢰를 얻고, 후계자를 낳은 이후에 강화된 입지를 바탕으로 1776년 타누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마리아 카롤리나는 실질적인 나폴리-시칠리아의 지배자로 군림했고 기존의 프랑스-스페인-파르마 공국으로 이어지는 부르봉 동맹 대신 친 영국-오스트리아 외교 정책을 수립했다.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이 프랑스계임에도 수백 년의 철천지 원수인 오스트리아와 친했던 이유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카롤리나는 전형적인 계몽 군주로서 봉건적이고 낙후된 나폴리-시칠리아 왕국을 서유럽 열강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자 했다. 그녀는 프랑스계 영국인 존 액튼을 중용하여 해군을 증설하고 상업을 개혁하였으며, 영국과 스페인과의 동맹을 갱신하는 등 전면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개혁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나폴리의 내정이 튼실해졌지만, 여러 급진적인 정책으로 인해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왕비였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기에는 가장 친했던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으로 인해 프랑스를 적대시했다.[7] 그녀는 나폴레옹 전쟁 시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열렬한 반대자였으나 대 프랑스 전쟁에서 패한 이후 나폴리 왕위를 잃고 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로 넘어가 망명 정부를 세웠다.
1802년 잠시 왕정이 복고되어 나폴리로 돌아왔지만, 1806년에 다시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침략하고 이번에는 시칠리아까지 위협에 놓이자[8]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야 했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마리아 카롤리나를 보고 "나폴리 왕국 안에 남자라고는 저 왕비밖에 없다"라는 평을 했다. 나폴리 사람들에 대한 조롱에 더 가까운 발언이기는 했지만.[9] 이 일을 두고 마리아 카롤리나는 나폴리에 왕정이 복고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814년 62세의 나이로 빈에서 사망했다.
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이 출범하면서 남편 페르디난도도 양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로 즉위하였지만, 마리아 카롤리나는 양시칠리아 왕국 출범 이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양시칠리아 왕비의 칭호를 받지는 못했다. 때문에 양시칠리아 왕국의 첫 왕비 자리는 마리아 카롤리나의 며느리인 마리아 이사벨(프란체스코 1세의 왕비)이 갖게 되었다.
2.5. 프랑스 혁명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조차 마리 앙투아네트를 외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 카롤리나는 여동생이 '죽음의 집'이라 불린 콩시에르주리에 수감되기 직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당대의 외교 표준 언어이자 전 유럽 궁중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는데[10] 마리아 카롤리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들은 후로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프랑스인들을 증오해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다.[11]그러나 결국 프랑스에 의해 나폴리 왕국을 빼앗긴 데다 딸마저 원수 오를레앙 공 루이필리프 2세의 아들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3세[12]와 연애 결혼 하는 걸 보아야 했다.[13]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Carolina of Austria)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Francis I) |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 |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ke of Lorraine) | |||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Austria)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 |||
카를 6세 (Charles VI) | |||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 |||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
3.2. 자녀
남편 페르디난도와의 사이에서 1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그 중 11명이 요절했고 7명만이 살아남았다.[14] 카롤리나는 자신의 자녀들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과 혼인시키는 등, 친정과 지속적인 교류를 맺었다. 딸들의 이름을 상당히 규칙적으로 지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올케인 마리아 루이사의 이름을 따 지은 후에 다음 딸들에게는 자매들의 이름을 태어난 순서대로 붙였다.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Holy Roman Empress) | 1772년 6월 6일 | 1807년 4월 13일 | 프란츠 2세[15] 슬하 4남 8녀[16][17] |
2녀 | 토스카나 대공비 루이사[18] (Luisa, Grand Duchess of Tuscany) | 1773년 7월 27일 | 1802년 9월 19일 | 페르디난도 3세[19] 슬하 2남 3녀[20] |
1남 | 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왕자 (Prince Carlo, Duke of Calabria) | 1775년 1월 4일 | 1778년 12월 17일 | |
3녀 | 마리아 안나 공주 (Princess Maria Anna) | 1775년 11월 23일 | 1780년 2월 22일 | |
2남 | 프란체스코 1세 (Francis I) | 1777년 8월 19일 | 1830년 11월 8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클레멘티나[21] 슬하 1녀 |
스페인의 마리아 이사벨[22] 슬하 6남 6녀[23] | ||||
4녀 |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Maria Cristina, Queen of Sardinia) | 1779년 1월 17일 | 1849년 3월 11일 | 카를로 펠리체 |
3남 | 젠나로 왕자 (Prince Gennaro) | 1780년 4월 12일 | 1789년 1월 1일 | |
4남 | 주세페 왕자 (Prince Giuseppe) | 1781년 6월 18일 | 1783년 2월 19일 | |
5녀 |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아멜리[24] (Maria Amalia, Queen of the French) | 1782년 4월 26일 | 1866년 3월 24일 | 루이필리프 1세 슬하 6남 4녀[25] |
6녀 | 아스투리아스 공비 마리아 안토니아 (Maria Antonia, Princess of Asturias) | 1784년 12월 14일 | 1806년 5월 21일 | 페르난도 7세 |
7녀 | 마리아 클로틸다 공주 (Princess Maria Clotilde) | 1786년 2월 18일 | 1792년 9월 10일 | |
8녀 | 마리아 엔리케타 공주 (Princess Maria Enrichetta) | 1787년 7월 31일 | 1792년 9월 20일 | |
5남 | 살레르노 공 레오폴도 (Leopold, Prince of Salerno) | 1790년 7월 2일 | 1851년 3월 10일 | 오스트리아의 클레멘티나 여대공[26] 슬하 1녀 |
6남 | 알베르토 왕자 (Prince Alberto) | 1792년 5월 2일 | 1798년 12월 25일 | |
9녀 | 마리아 이사벨라 공주 (Princess Maria Isabella) | 1793년 12월 2일 | 1801년 4월 23일 |
[1] 페르디난도의 누나 마리아 루이사는 카롤리나의 오빠 레오폴트 2세와 결혼했으니 겹사돈이다.[2]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샤를로트를 마리아 카롤리나의 애칭에서 따왔다고 한다.[3] 1740~1741.[4] 1748년에 출생 직후 사망.[5] 물론 당시 프랑스의 사회상과 루이 14세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의 파멸적인 재정상황 등을 감안하면 혁명은 필연적이었지만 적어도 왕의 처형과 왕당파 분열 사태까지는 안 갔을지도 모른다.[6] 베르나르도 타누치는 남편 페르디난도의 어린 시절인 1759년부터 1767년까지 국왕의 섭정을 맡기도 했다. 그의 통치는 무난했지만 자신의 야욕을 위해 페르디난도의 교육을 등한시하여 일부러 잉여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7] 마리아 카롤리나는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애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라는 얘기를 했을 정도였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프랑스의 왕비로 복위될 수 없다면 수녀원에 들어가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고 하나 그마저도 이뤄지지 못했으니 매우 한스러웠던 듯하다.[8] 시칠리아는 영국 해군의 강력한 보호 덕분에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폴리 왕국군이 붕괴된 데다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반도까지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나폴리 왕국이 점령당한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프랑스군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9] 나폴레옹은 마리아 카롤리나의 조카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을 한 바 있다. 부르봉 왕정 복고 시기에 그가 엘바 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향하자 왕실 사람들이 죄다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마리 테레즈만이 항전을 주장하며 버티다 결국 아랫 사람들의 설득에 고집을 꺾었다. 이 때도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에 사내라곤 저 여자(마리 테레즈)뿐"이라 했다고.[10]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부친인 프란츠 1세는 프랑스어권에서 장가 와서 일평생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만 쓰고 살았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나라에 시집가거나 심지어 왕위를 계승하러 가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이 덕분이었다.[11] 당시 프랑스어는 지금의 영어와 같이 세계적인 공용어였다.[12] 루이 필리프 1세는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으로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이다. 부친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는 부르봉 왕조의 가까운 친척이었으나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베는 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정작 본인도 혁명 정부 당시 쿠데타에 연루되어 똑같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13] 루이필리프와 마리아 아말리아는 무려 6남 4녀를 두었는데, 요절한 3녀, 4남을 제외해도 5남 3녀가 성인으로 성장했다. 또한 루이필리프의 후계자들도 대부분 자녀를 여럿 둬 왕족의 배우자를 다수 배출했고, 때문에 루이필리프의 후손들 중에는 현직 군주도 3명이나 있는 등(펠리페 6세, 필리프, 앙리) 루이필리프의 후손들은 상당히 번성한 편이다.[14]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도 무려 1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마리아 카롤리나는 그보다 2명이나 더 낳았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품뿐만 아니라 생산 능력까지 닮았다는 평가가 있으나 애석하게도 자녀들이 장성하는 확률은 높지 못했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1700년대 후반에 18명 중에서 7명이 살아남은 거면 꽤 많이 살아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낳은 5남 11녀 중에서는 4명을 제외한 12명이 장성했다. 물론 이는 당시에 천연두 등으로 높았던 영유아 사망률을 감안하면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15]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마리아 루이사의 장남으로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다.[16] 프랑스의 황후 마리 루이즈, 페르디난트 1세, 브라질의 황후이자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 레오폴디나, 프란츠 카를 대공 등[17] 마리아 테레사의 장녀이자 마리아 카롤리나의 외손녀인 마리아 루도비카는 마리아 카롤리나의 원수 중 하나인 나폴레옹 1세와 결혼했다. 다만 연애결혼이 아니라 정략결혼. 그러나 나폴레옹을 천하의 개쌍놈 취급하던 카롤리나는 오히려 나폴레옹의 몰락 때 외손녀에게 “너의 남편 나폴레옹을 선택하라”고 충고했다. 나폴레옹도 싫지만 주변에 휘둘려대는 사위가 더 꼴 보기 싫었기 때문(...)[18] 결혼 11년 만인 1801년에 나폴레옹에 의해 남편이 토스카나 대공위를 상실하면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야 했고 이듬해인 1802년 빈에서 막내아들을 사산하고 사망했다.[19]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마리아 루이사의 차남으로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다.[20] 레오폴도 2세,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카를로 알베르토의 왕비) 등[21] 외삼촌 레오폴트 2세와 고모 마리아 루이사의 3녀로 외사촌 겸 고종사촌이다.[22] 큰아버지 카를로스 4세의 4녀로 친사촌이다.[23] 스페인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나, 페르디난도 2세, 브라질의 황후 테레사 크리스티나 등[24] 원래 이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남으로 이종사촌인 루이 조제프와 혼담이 오갔으나 그가 요절하면서 무산되었고 이후 루이필리프와 사랑에 빠져 당시 왕족으로서 드문 연애결혼을 했다. 하지만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는 프랑스 왕위를 탐내 이모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앞장선 사람이었고,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는 당연히 사랑하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이는데 한몫한 원수의 아들과 딸이 결혼하는 걸 결사반대했다. 그래도 루이필리프에게 네 애비에 대해 아는 대로 불라는 압박 면접까지 치른 끝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다.[25] 오를레앙 공작 페르디낭 필리프, 벨기에의 왕비 루이즈,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비 클레망틴 등[26] 사촌 프란츠 2세의 6녀로 오촌 조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