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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0:14:32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colcolor=#000000> 스페인-포르투갈 왕국 펠리페 4세의 왕비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Élisabeth de France
파일:Elisabeth_of_France.jpg
이름 프랑스어 엘리자베트 드 부르봉
(Élisabeth de Bourbon)
스페인어 이사벨 데 보르본
(Isabel de Borbón)
포르투갈어 이자벨 드 보우르본
(Isabel de Bourbon)
출생 1602년 11월 22일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1]
사망 1644년 10월 6일 (항년 41세)
스페인 왕국 마드리드 왕립 알카사르[2]
배우자 펠리페 4세 (1615년 결혼)
자녀 발타사르 카를로스, 마리아 테레사
아버지 앙리 4세
어머니 마리아 데 메디치
형제 루이 13세, 크리스틴, 니콜라 앙리, 가스통, 앙리에트 마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사망 및 사후
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여담

[clearfix]

1. 개요

프랑스 왕국 앙리 4세마리 드 메디시스의 장녀이자 루이 13세의 동생이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첫번째 왕비.

루이 14세의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의 어머니이다. 또한 루이 14세와 필리프 1세 형제[3]의 큰고모이자,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제임스 2세의 큰이모이다.[4]

2. 생애

1602년 11월 22일 퐁텐블로 성에서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장녀로 태어났다.

엘리자베트는 스페인의 카탈리나 미카엘라와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의 장남인 피에몬테 공 필리포 에마누엘레[5]와 약혼했다. 그러나 1605년 필리포가 천연두로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610년 아버지 앙리 4세가 암살당하고, 오빠 루이 13세가 왕위를 물러받아 부르봉 왕조의 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1612년, 엘리자베트가 열 살이었을 때,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사이에 이중 결혼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아스투리아스 공 펠리페와 결혼했다.[6] 결혼 이후 스페인어식 이사벨로 개명하고, 아스투리아스 공비(왕세자비)가 되었다. 이후 스페인 왕궁에서 엘리자베트의 아름다움과 지성, 고귀한 성격으로 유명해지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1621년, 시아버지 펠리페 3세가 사망하자 엘리자베트는 스페인의 왕비가 되었다.

1640년에서 1642년 사이에 엘리자베트는 카탈루냐 반란 동안 왕이 없을 때 왕의 섭정으로 일했으며 그녀의 노력에 대해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만토바 공작부인 아나 데 게바라와 마리아 데 아그레다, 그리고 루이사 만리케 데 라라 백작부인, 파레데스 데 나바 공작부인과 함께 "여성 음모"의 일환으로 올리바레스의 몰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리바레스의 몰락으로 펠리페 4세는 그녀를 자신의 유일한 정치적 파트너로 여겼고, 1643년 왕이 다시 전선으로 떠났을 때 엘리자베트는 다시 후안 추마세로 카리요 이 소토마요르의 도움을 받아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두 번째 섭정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군대에 필수 물품을 제공하려는 노력과 군대에 재정을 제공하기 위해 은행과 협상하고 자신의 보석을 담보로 제공하려는 노력으로 남편 펠리페 4세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녀가 이사벨 1세 여왕의 선례를 따라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바다호스를 탈환할 작정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2.1. 사망 및 사후

1644년 10월 6일 사산으로 인해 41세의 나이로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엘리자베트가 낳은 8명의 자녀들 중 생존한 아이는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마리아 테레사뿐이었다. 하지만 발타사르 카를로스마저 1646년 10월 9일 천연두에 걸려 1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하나뿐인 남자 계승자를 잃은 펠리페 4세는 다시 후계를 보기 위해 부랴부랴 자신의 조카이자, 아들과 결혼할 뻔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결혼하여 마르가리타 테레사카를로스 2세를 낳았다. 하지만 마르가리타는 장녀 마리아 안토니아를 제외한 모든 자식들이 요절했고 카를로스는 아예 자식을 두지 못한 채로 사망하면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의 후손은 사실상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엘리자베트의 유일하게 생존한 자녀인 딸 마리아 테레사의 둘째 손자 필리프[7]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 즉위하면서 엘리자베트의 후손이 프랑스 왕위에 이어 스페인 왕위까지 이어받게 되었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Élisabeth of France)
<colbgcolor=#fff3e4,#331c00> 앙리 4세
(Henry II)
<colbgcolor=#ffffe4,#323300> 방돔 공작 앙투안
(Antoine de Bourbon,
Duke of Vendôme)
방돔 공작 샤를
(Charles de Bourbon,
Duke of Vendôme)
프랑수아즈 달랑송
(Françoise d'Alençon)
호아나 3세
(Joanna III)
헨리케 2세
(Henry II)
마르그리트 당굴렘
(Margaret of Angoulême)
마리아 데 메디치
(Maria de' Medici)
토스카나 대공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Francesc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1세 데 메디치
(Cosimo I de' Medici,
Grand Duke of Tuscany)
레오노르 데 톨레도
(Eleanor de Toledo)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여대공
(Joanna of Austria)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Anna of Bohemia and Hungary)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아스투리아스 공 발타사르 카를로스
(Baltasar Carlos, Prince of Asturias)
1629년 10월 17일 1646년 10월 9일
1녀 프랑스의 왕비 마리 테레즈
(Maria Theresa, Queen of France)
1638년 9월 10일 1683년 7월 30일 루이 14세
슬하 2남 1녀[8]

4. 여담



[1]프랑스 일드프랑스 세네마른 주 퐁텐블로[2]스페인 마드리드 왕궁[3] 오빠 루이 13세의 자녀들.[4] 막내 여동생 앙리에트 마리 왕비의 자녀들.[5] 어머니 카탈리나 미카엘라가 펠리페 2세의 차녀여서 펠리페 2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6] 오빠 루이 13세는 펠리페 4세의 누나 안 도트리슈와 결혼했다.[7] 마리아 테레사의 장남 그랑 도팽 루이의 차남.[8] 루이 왕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