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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e3061><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2대 국왕 페드루 5세 Pedro V | |||
출생 | 1837년 9월 16일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네케시다데스 궁전 | |||
사망 | 1861년 11월 11일 (향년 24세) |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네케시다데스 궁전 | |||
재위기간 | 포르투갈 국왕 | ||
1853년 11월 15일 ~ 1861년 11월 11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e3061><colcolor=#fff> 가문 |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 | |
이름 | 페드루 드 알칸타라 마리아 페르난두 미겔 하파엘 곤자가 샤비에르 주앙 안토니우 레오폴두 빅토르 프란시스쿠 드 아시스 줄리우 아멜리우 (Pedro de Alcântara Maria Fernando Miguel Rafael Gonzaga Xavier João António Leopoldo Víctor Francisco de Assis Júlio Amélio) | ||
아버지 | 페르난두 2세 | ||
어머니 | 마리아 2세 | ||
형제자매 | 루이스 1세, 주앙,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페르난두, 아우구스투 | ||
배우자 |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스테파니 공녀 (1858년 결혼 / 1859년 사망) | ||
자녀 | 없음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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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12대 국왕. 별칭은 "거룩한 자(o Esperançoso)" 또는 "많은 사랑을 받는 자(o Muito Amado)"이다. 정확히는 페드루 5세부터 포르투갈 왕조가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으로 바뀌었다.[1]2. 생애
1837년 9월 16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네케시다데스 궁전에서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와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출신이며 포르투갈 국서(이후 공동 국왕) 겸 포르투갈 원수인 페르난두 2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루이스 1세, 주앙,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페르난두, 아우구스투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상한 부모의 사랑을 받아 무탈하게 성장한 그는 매사에 진지하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추호도 하지 않으면서도 주변인들에게 다정한 성품을 갖추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사에 깊이 탐구했고,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철학, 자연사, 그림,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1853년 11월 15일 어머니 마리아 2세가 아우구스투를 낳던 도중 사망하면서 포르투갈의 새 국왕에 올랐다. 하지만 16살의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아버지 페르난두 2세의 섭정을 받았다. 아버지가 포르투갈을 대리 통치하는 동안, 그는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을 방문하여 빅토리아 여왕과 회동[2]했으며,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여러 독일 제후국들을 거쳐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방문하는 곳마다 예의바르게 행동하면서도 명석한 면모를 드러냈으며, 외모도 잘생겼기에 많은 이들의 호감을 샀다.
1855년 18살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한 페드루 5세는 1851년부터 지금까지 총리를 맡았던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우 도밍구스 비센테 프란시스쿠를 해임하고 진보당의 누누 주제 세베루 드 멘도사 롤림 드 모라 바레투를 총리로 선임했다. 이후 진보당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면서도, 보수파 인사들을 내각에 상당수 가담시키고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이후 두 주요 정당의 대표가 번갈아가며 내각을 이끄는 관행이 페드루 5세의 후계자들에 의해 대대로 이어졌다.
페드루는 오랜 내전으로 피폐해지고 유럽 열강에 비해 한참 뒤쳐진 포르투갈의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개선하는 사업을 단행했다. 주요 도심을 연결하는 도로, 교량, 철도 및 전신선이 그의 치세에 건설되었으며, 포르투갈과 앙골라 사이의 최초의 정기 선박 여행이 시작되었다. 또한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왕립 과학원 구내에 상급 문학과정을 설립해 포르투갈 작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게 했으며, 과학적 발견에 관한 소식을 전하는 책을 포르투갈어로 번역하여 대중에 번역했다. 그는 때때로 많은 과학 서적들을 자기 돈으로 구입한 뒤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
페드루는 정부에서 제안한 정책을 심도있게 분석해 문제점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봤으며, 정책이 시행된 후에도 부작용이 있는지를 세심하게 따져봤고, 인프라가 잘 갖춰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시찰했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를 확고하게 지지했으며 모잠비크 해안에서 흑인 노예를 끌고 가던 프랑스 노예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의 항의에 배를 풀어주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1858년 5월 18일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공자이자 프로이센 장관이었던 카를 안톤의 딸인 스테파니 공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859년 스테파니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페드루 5세는 아내의 요절에 큰 충격을 받고,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의료 시스템을 현대화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많은 병원을 설립하고 하수 시스템을 개선했으며,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스테파니의 이름을 딴 어린이 병원을 설립했다. 오늘날 이 병원은 도나 에스테파니아 병원(Hospital de Dona Estefânia)이란 명칭으로서 리스본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페드루는 자신을 맞이하는 이들이 무릎을 꿇고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는 관습을 폐지하고, 궁전 문에 녹색 상자를 만들어서 시민들이 거기에 요구사항을 적은 편지를 넣게 한 뒤 하나하나 읽어본 후 반드시 답장을 보냈으며, 사형제도를 전격적으로 폐지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콜레라가 창궐했고 1856~1857년 황열병이 창궐해 수천 명이 죽었지만, 그는 안전한 곳에 피하라는 신하들의 권고를 묵살하고 병원을 돌아다니며 병자들을 일일이 위로했다. 백성들은 이렇듯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는 왕에게 진심으로 감격해 "거룩한 자(o Esperançoso)"라는 별칭을 붙였다.
이렇듯 국정에 전념하여 국가를 훌륭히 이끌고 인품도 훌륭했기에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페드루는 1861년 여행 중에 두 형제 주앙, 페르난두와 함께 장티푸스에 걸렸다. 먼저 페르난두가 1861년 11월 6일에 사망했고, 페드루 왕이 11월 11일에 사망했으며, 주앙은 12월 27일에 사망했다.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포르투갈인들은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깊은 충격과 슬픔에 잠겼다. 사후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고, 동생 루이스 1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