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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9:14:53

탕크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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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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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2106><colcolor=#FFF> 시칠리아 왕국 아우타빌라 왕조 제4대 국왕
탕크레디
Tancredi
파일:탕크레드.jpg
왕호 탕크레디
(Tancredi)
출생 1138년
시칠리아 왕국 레체
사망 1194년 (향년 56세)
재위 시칠리아 왕국의 왕
1189년 ~ 1194년
배우자 아체라의 시빌라
자녀 루제루 3세, 구기에르무 3세, 엘비라, 쿠스탄차, 메다니아, 발드라다
아버지 아풀리아 공작 루제루 3세
어머니 레체의 엠마
형제 구기에르무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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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칠리아 왕국 제4대 국왕. 하인리히 6세를 위시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부터 시칠리아 왕위를 사수했으나 재위 5년 만에 어린 아들 굴리에모 3세를 남긴 채 사망했다.

2. 생애

1138년경 시칠리아 왕국 레체에서 아풀리아 공작이자 시칠리아 국왕 루제루 2세의 장남이었던 루지에로 3세와 정부인 아크라의 시빌라 사이의 사생아로 출생했다. 형제로 굴리에모가 있었다. 초기 생애는 알려진 바 없으나, 아풀리아 공작의 자녀로서 유복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던 1154년, 루지에로 2세 사후에 왕위에 오른 굴리에모 1세는 바리의 마이오(Maio)에게 정국을 맡겼다. 이탈리아 태생의 마이오는 노르만 귀족들과 그리스인들을 국정에서 배제하고 이탈리아인과 무슬림을 중용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남부 이탈리아의 노르만 귀족들은 굴리에모의 사촌인 로베르토 데 로리텔로 백작을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에 귀순하기로 했는데, 탕크레드 역시 이에 가담했다.

1155년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명을 받들어 마누일 팔레올로고스와 요안니스 두카스의 군대가 바리에 상륙하자, 탕크레드를 비롯한 아풀리아 귀족들이 대거 시칠리아 왕국에 반기를 들고 동로마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은 몇 년 후 패퇴했고, 그는 다른 반란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팔레르모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던 그는 1161년 3월 9일 지난 해에 마리오를 살해한 뒤 굴리에모 1세의 용서를 받았지만 왕이 언제라도 보복할 것을 우려한 마테오 보넬루스 등 노르만 귀족들에 의해 루지에로 2세의 사생아 시모네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보넬루스 등은 본래 굴리에모 1세를 폐위시키고 굴리에모 1세의 맏아들 루지에로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팔레르모 주민들이 성직자들의 선동에 따라 3월 11일 대거 봉기해 궁전을 포위해버리고 어린 루지에로가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자, 공모자들은 굴리에모를 석방하고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굴리에모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발코니로 나가서 주민들에게 반란군이 도망칠 때 해를 입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후 보넬루스, 탕크레드를 비롯한 공모자들은 카카모(Caccamo) 요새로 도주했고, 굴리에모는 자유를 되찾았다.

굴리에모는 처음에는 공모자들과 화해하려 했지만, 아들 루지에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피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했다. 메시나에서 파견된 육군과 해군이 카카모 요새를 포위하자, 반란군은 항복하고 대부분 추방되었다. 탕크레드는 시모네와 함께 시칠리아 남부 지역인 부테라와 피아짜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토벌군에게 패배해 부테라와 피아짜가 초토화되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고, 굴리에모 1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166년 굴리에모 1세가 사망하고 13살의 어린 아들 굴리에모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섭정을 맡은 나바라의 마르그리트는 굴리에모 1세 치세에 해외로 망명한 정치범들을 사면했다. 그 덕분에 시칠리아로 돌아온 탕크레드는 해군 사령관이 되었다. 1174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아모리 1세의 구원 요청을 받은 굴리에모 2세는 탕크레드에게 200척의 함대를 맡겨 이집트를 공략하게 했다. 탕크레드는 그 해 7월 말 알렉산드리아 해안에 상륙한 뒤 알렉산드리아 성채 공성전을 벌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연이은 습격으로 공성 무기가 파괴되면서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 아모리 1세가 이집트로 향하던 중 사망하고 젊은 왕 보두앵 4세의 후견인을 놓고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예루살렘 왕국군의 지원이 오지 않자, 탕크레드는 살라흐 앗 딘의 군대가 오기 전에 철수하기로 했다. 300명의 기사들이 본대가 시칠리아로 떠날 때까지 해안에 남아서 끝까지 싸우다가 살라흐 앗 딘에게 사로잡혔다.

1176년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함께 프리드리히 1세의 북이탈리아 공세에 대항하는 롬바르드 연맹 지원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1185년 굴리에모 2세의 명을 받들어 육군 사령관인 아케라 백작 리샤르와 부두앵과 함께 발칸 원정에 착수했다. 시칠리아 육해군은 초기에는 안드로니코스 1세의 폭정으로 지리멸렬해진 동로마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여 디라히온, 테살로니카 등지를 잇따라 공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된 뒤 새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치하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동로마군이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장군의 지휘하에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시칠리아 육군은 모시노폴리스와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고 리샤르와 보두앵이 사로잡혔다. 탕크레드는 어쩔 수 없이 잔여 병력을 함대에 싣고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1189년 11월 18일, 굴리에모 2세가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굴리에모 2세는 아내 조안나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죽기 직전에 굴리에모 2세의 고모이자 유일한 혈육인 쿠스탄차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정국을 주도하던 마테오 데 아젤로 등 대다수 노르만 귀족들은 쿠스탄차와 결혼한 하인리히 6세가 이를 빌미 삼아 시칠리아 왕을 자처할 게 뻔하고,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시칠리아에 들어서면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게 뻔하다고 여겨 이를 거부했다.

노르만 귀족들은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의 탕크레드를 놓고 고심했다. 탕크레드는 루지에로 2세의 손자이자 굴리에모 2세의 사촌이었다. 안드레아 백작 루지에로와 오트빌 가문의 관계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 없다. 아풀리아 백작이자 로베르 기스카르루제루 1세의 형이었던 드로고의 증손자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마테오 데 아젤로는 탕크레드를 왕으로 받들기로 하고, 교황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명목상 대군주인 클레멘스 3세에게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공인하기로 했다. 이윽고 교황의 허가가 내려지자, 탕크레드는 1190년 1월 18일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마테오는 1168년 스테판 뒤 페슈의 도주 사건 이후 공석이던 수석 공증인에 선임되었고, 마테오의 장남 리샤르는 아젤로 백작령을 수여받았고, 막내 아들 니콜라는 살레르노 대주교가 되었다.

그러나 탕크레드는 즉위 직후부터 반란에 시달렸다. 1190년 1월, 팔레르모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슬림이 희생되었다. 이에 분노한 시칠리아 무슬림들은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탕크레드는 이를 수습하느라 1190년 말까지 시칠리아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다. 1190년 3월,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아풀리아 및 캄파니아 귀족들은 탕크레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탕크레드를 몰아내기 위해 하인리히 56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하인리히 6세는 1190년 5월 칸덴의 하인리히 휘하 제국군을 남부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무슬림 봉기를 진압하느라 바빴던 탕크레드는 아세라 백작 리샤르에게 남부 이탈리아를 지키는 임무를 맡겼다. 리샤르는 상당한 용병을 모집한 뒤 제국군과 반란군이 합류하기 전에 공세를 개시해 1190년 9월 반란군을 섬멸하고 제국군을 쫓아냈다.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는 토벌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1190년 9월 14일과 9월 23일, 필리프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리처드 1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메시나에 상륙했다. 이보다 앞서, 굴리에모 2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한 두 왕에게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항로를 제공하고 지원군과 보급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굴리에모 2세는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단행되기 전에 사망했지만, 두 왕은 이 제안을 이용해 시칠리아에 찾아왔다. 문제는 탕크레드와 리처드 1세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탕크레드는 굴리에모 2세의 왕비이자 리처드 1세의 아버지 헨리 2세의 딸이었던 조안나를 억류하고 그녀의 재산을 압류했으며, 결혼을 통해 그녀에게 이전되었던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에 상륙한 뒤 조안나를 석방하고 그녀가 겪은 손실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잉글랜드군과 대결할 이유는 없었기에, 탕크레드는 리처드 1세의 요구에 따랐다. 그러나 리처드 1세는 굴리에모 2세가 십자군을 위해 완전히 장비된 선박을 포함한 전쟁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면서 이를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탕크레드가 이에 난색을 표하자, 리처드 1세는 1190년 9월 30일 메시나 해협을 건너 칼라브리아의 바나라 시를 점령하고 조안나를 영국 수비대의 보호 아래 그 곳에 두었다. 이후 메시나로 돌아온 잉글랜드군은 그리스 수도원을 점령하고 그곳의 수도자들을 몰아냈다.

1190년 10월 3일, 영국인들의 행동에 분노한 메시나 주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그들을 수도원에 봉쇄했다. 필리프 2세가 양자를 중재하려 했지만, 리처드 1세는 협상 대신 무력 행사를 택하기로 하고 메시나로 진군해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후 리처드 1세는 새로운 반 영국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인질을 요구했고, 메시나 성벽 인근 언덕에 마테그리폰(Матегрифон: 그리스인을 위한 굴레) 요새를 세웠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이같은 행동에 분개했고, 카타니아에 있던 탕크레드에게 "당신이 영국인들을 대적하려 한다면 내가 도와주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적인 벨프 가문을 지원하는 영국 왕 리처드 1세는 프랑스 왕보다 시칠리아에게 더 선호되는 잠재적 동맹이었다. 탕크레드는 이 점을 고려해 리처드 1세와 화해하기로 하고, 1190년 11월 11일 메시나 조약을 체결했다. 탕크레드는 조안나에게 몬테 산탄젤로 교구의 수입을 넘겼고, 굴리에모 2세가 약속했다는 군수 물자을 모아서 리처드 1세에게 넘겼다. 그리고 리처드 1세의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르튀르는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했다. 리처드 1세는 그 대가로 남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탕크레드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주고 메시나를 파괴한 것에 대한 보상, 마테그리폰 요새 해체를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을 시칠리아에서 얼른 내보내고 싶었던 탕크레드는 1191년 3월 리처드 1세에게 지난날 필리프 2세가 보냈던 밀서를 보여줬다. 이에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한바탕 다퉜고, 곧 시칠리아를 떠나 동방으로 얼른 가기로 합의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1191년 3월 30일과 4월 10일에 각각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이끌고 메시나에서 출항했다.

1191년 1월, 하인리히 6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롬바르드 연맹과 피사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4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로마에 입성했다.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했던 클레멘스 3세는 제국군이 당도하기 직전에 사망했고, 뒤이어 새 교황이 된 첼레스티노 3세는 제국군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191년 4월 15일, 하인리히 6세와 쿠스탄차는 새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즉위식을 치렀다. 이후 하인리히 6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아베르사, 카푸아, 타란토, 몬테 카시노 등 여러 도시가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살레르노 주민들은 아예 제국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하인리히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쿠스탄차에게 자신들의 도시에서 여름을 보내도록 초대했다.

그러나 제국군의 공세는 나폴리 성벽에서 저지되었다. 아크라 백작 리샤르는 제국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지만, 살레르노 대주교 니폴라 데 아겔로가 수비를 이끌어 제국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여기에 해상에서는 브린디시의 마르가리트 제독이 지휘하는 시칠리아 함대가 제국군을 지원하던 피사 함대를 격파했다. 이로 인해 나폴리 공성전이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군영에서 전염병이 나돌면서 많은 제국 병사들이 죽어갔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1191년 8월 24일 나폴리 포위를 해제하고 독일로 철수했다. 그는 이전에 점령한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쿠스탄차는 살레르노에 남아서 자신과 남편의 시칠리아 왕관에 대한 권리를 고수하기로 했다.

하인리히 6세의 제국군이 독일로 철수하자, 그 때까지 쿠스탄차를 극진히 모시던 살레르노 주민들은 태도를 싹 바꿔 쿠스탄차를 붙잡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살레르노에 찾아온 탕크레드의 조카가 이를 막고 쿠스탄차를 메시나로 이송했다. 메시나에서 쿠스탄차와 대면한 탕크레드는 외국군을 끌여들어 조국을 위태롭게 만든 책임을 물었다. 이에 쿠스탄차는 탕크레드에게 빼앗긴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탕크레드는 쿠스탄차를 팔레르모에 유폐시킨 뒤 하인리히 6세가 남겨둔 수비대를 모조리 몰아내고 북부 캄파니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를 탈환했다.

쿠스탄차는 팔레르모에 이송된 뒤 탕크레드의 왕비 시빌라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다. 시빌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식사를 하고 그녀의 침실에서 함께 자야 했으며, 궁궐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팔레르모 시민들은 그런 그녀의 처지를 동정하자, 시빌라는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탕크레드는 마테오 데 아젤로의 제안에 따라 쿠스탄차를 나폴리로 이송해 엄중한 감시를 받게 했다.

1192년 6월, 첼레스티노 3세가 파견한 교황 특사가 그라비나스에서 탕크레드와 만났다. 하인리히 6세의 강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품었던 첼레스티노 3세는 전임 교황 클레멘스 3세와 마찬가지로 탕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탕크레드는 그 대가로 루지에로 1세 시대부터 시칠리아 왕이 누려왔던 권한인 "교황의 간섭 없이 시칠리아 주교들을 임명하고 교황 사절이 시칠리아에 방문하는 것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하지만 이것은 명목상 포기일 뿐이었고, 시칠리아 왕들은 이후로도 시칠리아 주교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이때 교황 사절은 탕크레드에게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내라고 요청했다. 첼레스티노 3세는 하인리히 6세의 황후를 인질로 삼음으로써 하인리히 6세와의 정치 대결에 이용하려 했다. 탕크레드는 이를 받아들여 쿠스탄차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은밀히 파견한 독일 기사단이 로마로 이송중이던 쿠스탄차를 빼돌려 독일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탕크레드는 이제 하인리히 6세가 대대적인 침공을 가할 것을 예상하고, 새로운 동맹국을 찾았다. 마침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는 것을 꺼린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가 접근했다. 양자는 협상 끝에 탕크레드의 장남 루지에로 3세와 이사키오스 2세의 딸 이리니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1193년, 탕크레드는 후계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루지에로 3세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해 12월 24일, 루지에로 3세는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장남의 요절에 큰 충격을 받은 탕크레드는 몸져누웠고, 오랜 투병 끝에 1194년 2월 20일 팔레르모에서 사망했다. 사후 차남 굴리에모 3세가 집권했고 시빌라 왕비가 섭정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6세가 이 때를 틈타 공세를 가했고, 귀족들이 대거 하인리히 6세 편을 들면서 대세가 기울었다. 결국 하인리히 6세는 팔레르모에 순조롭게 입성한 뒤 1194년 12월 25일에 시칠리아 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렀고, 굴리에모 3세와 시빌라는 폐위되었다. 하인리히 6세는 탕크레드를 찬탈자로 낙인찍고 그의 유해를 무덤에서 꺼내 부관참시했다. 시빌라와 딸들은 독일로 끌려갔고, 굴리에모 3세는 어찌 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도 살해되었을 것이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