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Niemöller 마르틴 니묄러 | ||
본명 | 프리드리히 구스타프 에밀 마르틴 니묄러 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 |
출생 | 1892년 1월 14일 | |
독일 제국 립슈타트 | ||
사망 | 1984년 3월 6일 (향년 92세) | |
서독 비스바덴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목사, 반나치 운동가 | |
종교 | 개신교 (루터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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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루터교회 목사로 나치 독일 시기 독일 내에서의 반 나치 투쟁을 이끈 인물이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로도 유명하다.2. 생애
2.1. 초기의 삶
1892년 프로이센 왕국(오늘날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지역에서 보수적인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대학교를 마칠 무렵은 1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그는 해군으로 입대, 유보트 함장으로 지중해에서 근무한다. 이 시기에 세운 공훈으로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종전 후에는 뮌스터로 이주하여 이 곳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본격적으로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친우이자, 후대에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 발터 모델의 결혼식 주례는 물론이고, 그 세 자녀들의 세례도 담당하였다. 두 사람의 교류는 니묄러가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2.2. 나치 독일 시기
이 시기 대다수의 독일 교회인들이 그러했듯이 니묄러 역시 초기에는 민족적 보수주의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고 있었고,이렇게 모호하고 모순적인 행동을 보였던 탓에 그가 정말로 반나치주의자인지 아니면 기회주의자였던건 아닌지를 놓고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많은 설왕설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다만 니묄러 본인은 자신의 이 시기 행동에 대해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으며, 전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그의 반유대주의 성향에 대해 묻자 자신이 강제수용소에 억류되었던 시기에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1935년의 니묄러에게 반유대주의 성향이 있는 것은 맞았지만 이에 대해 반성했고, 그때도 나치의 유대인 말살에 동조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2] 거기에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 자체는 나치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당장 2차 대전 중에 나치 독일하고 목숨 걸고 싸웠던 영국이나 프랑스만 해도 반유대주의자들은 꽤 존재했고, 당장 위 발언에도 있듯이 유대인들이 유럽 내에서 탄압 받았던 것이 딱히 이 시기만이었던 것도 아니다.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로 인한 충격 때문에 이후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많이 사그라든거지 저 시기만 하더라도 단순히 '반유대주의 = 나치'라고 볼 순 없었다는 것.
어찌됐든 나치가 한창 힘을 쓸 때 이에 반항하면서 공공연히 나치를 비난하는 언행을 일삼은 것은 목숨을 내걸만한 용기가 있는 것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고, 그는 마침내 1937년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첫 재판에서 그는 벌금과 함께 7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공판기간이 이미 7개월을 넘겼기 때문에 선고가 내려지자마자 석방된다. 하지만 그에게 내려진 선고가 너무 가볍다고 여긴 루돌프 헤스와 하인리히 힘러는 그를 좀 더 무자비하게 탄압하기로 결심했고, 석방과 동시에 게슈타포에게 다시 체포된 그는 이후 1938년부터 1945년의 세월을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보내게 된다.
2.3. 말년과 동독 옹호 논란
1945년 미군에 의하여 석방된 니묄러는 이후 라인란트와 헤센 지방에서 기독교 단체의 수장이 되어 철저한 반전주의자 및 평화주의자로 활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독에 방문중일 때 동독 정권이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와 관련해서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책의 저자(와 번역회사)가 신뢰성이 적다는 것은 감안하기를 바란다. 오컬트 쪽으로 유명한 마법사를 자처하는 프란츠 바르돈이 저자이다.
말년의 니묄러 목사는 독일평화협회(DFG)의 회장을 맡았고(1954년), 프라하와 헬싱키에 본부를 둔 세계평화협의회 명예회장직도 맡았다(1967년). 문제는 이 단체 자체가 (범 동구권인 프라하와 소련의 간접적인 눈치를 보던 헬싱키의 위치에서 보듯)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것. 이 단체는 동독의 일당독재당인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3]은 물론 서독의 독일 공산당(DKP)과도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는 동독 사통당 중앙위원회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1974년에 독일 공산당(DKP)과 기타 공산주의 단체들이 공동으로 창설한 '평화 군축 및 상호협력위원회(KFAZ)'와 1980년 니묄러 자신이 위원회 위원이자 지도 간부로 있었던 '크레펠트 평화호소회'에 역시 소련과 동독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다. 독일평화연맹(DFU)을 비롯해서 독일평화협회(DFG), 병역거부자연맹(VK), 평화 군축 및 상호협력위원회(KFAZ), 나치박해자연맹(VVN), 반파쇼동맹(Bda) 등이 그에 속한다[4]. 독일 공산당(DKP) 간부회의 위원이었던 페터 슈트는 1994년에 밝히기를 슈타지는 개인적으로 니묄러의 수발노릇을 할 전문연구원까지 붙여 주었다고 폭로했다.
"가장 나쁜 악은 공산주의가 아닌 돈이다. 왜냐하면 돈은 인간을 완전히 소유하려 하지만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그래도 얼마만큼의 자유는 남겨두기 때문."[5]
"독일인들은 분단된 상태로 살 것이냐, 소련식 독재의 재통일이냐는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공산주의의 위험을 감수할 것."
다만 니묄러의 인명은 슈타지 인사기록부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다. 혹자는 공산 정권이 무너진 직후에 슈타지 중앙본부에서 인사기록 카드를 폐기시키면서 이때 니묄러의 카드도 함께 없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공산주의자가 되어 소비에트를 지지하게 된 니묄러 목사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공산주의에도 문제가 있지만 자본주의에 비하면 차악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동독에 애증을 가졌듯 말이다. 다만, 정치범 탄압 방조는 비판받을만 할 것이다.
[1] 뉘른베르크 법의 시초로 각종 기업 및 사회단체에서의 활동을 오로지 아리아인만이 할 수 있는 자격으로 만들어 비(非)아리아인이라 쓰고 유대인이라 읽는다을 배척한 조항.[2] 어떠한 집단을 어떠한 이유로 (그것이 정당한 이유이든 아니든) 싫어하는 것과 그 이유 때문에 그 집단이 말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3] 통일 이후 좌파당으로 이어진다[4] 나치박해자연맹과 반파쇼동맹의 사무국장인 쿠르트 에얼레바르는 독일 공산당(DKP) 간부회의의 위원이기도 했다. 슈타지와 동독 정부는 이런 서독과 유럽의 평화단체들을 간첩 침투 양성소로 활용하면서 들통나지 않기 위해 사회주의 색채적인 단어나 이론 사용도 금지했다고 한다.[5] 흔히 공산주의 하면 모두 북한 같은 전체주의 사회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동독은 구공산권에서도 제법 자유가 보장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