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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독일 연방의회 의원 쿠르트 슈마허 Kurt Schumacher | |
<colbgcolor=#707070><colcolor=#fff> 본명 | 쿠르트 에른스트 카를 슈마허 Kurt Ernst Carl Schumacher |
출생 | 1895년 9월 2일 |
독일 제국 서프로이센 쿨름[1] | |
사망 | 1952년 8월 20일 (향년 56세) |
독일연방공화국 본 | |
학력 | 마르틴 루터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법학/정치학) |
정당 | |
지역구 | 슈타트 하노버-쥐트[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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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부터 서독 시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활동한 사회민주당의 주요 지도자로, 서독의 초대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의 정적이었지만 한편으론 나치즘에 함께 대항하고 전후 독일 재건에 힘써 아데나워와 함께 독일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사실 나치즘 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폭력 사태를 일으키던 공산당에도 강경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었으며[3], 결국 반나치 활동으로 인해 1933년 나치 집권 후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강제수용소에 보내지는 등 여러모로 고난의 삶을 산 정치인.
2. 생애
2.1. 전간기
1895년 지금은 폴란드의 영토인 서프로이센 쿨름에서 태어났다. 이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나 큰 부상을 입고 오른팔을 절단한 채 군에서 제대해야했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베를린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영향을 받고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 사민당에 입당한다.이 무렵부터 슈마허는 극우뿐만 아니라 공산당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1차 대전의 패배 이후 곳곳에서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공산당이 주도하는 폭동 및 반란이 일어나자 슈마허는 '공산당은 파괴주의자이므로 저지되어야한다.'는 입장을 지키며 공산당을 격렬히 비판한다.
이후 1930년 국가의회에 의원으로 선출된 슈마허는 사회적 혼란을 틈타 점점 부상하는 나치당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나치의 돌격대에 저항할 국기단의 조직을 도왔다.
2.2. 나치 정권기
1933년 집권한 나치는 곧바로 사민당을 불법화하고, 사민당의 주요 지도자였던 그는 당해 7월 나치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와 같은 독일 내 여러 강제수용소에서 10년이라는 세월을 보낸다. 혹독한 고문과 노동으로 인해 이 시기 그의 건강은 크게 악화됐고, 1943년에는 거의 죽음 직전에까지 이른다. 그가 빈사 상태에 놓이자 나치 정권은 그를 석방시키지만 이듬해 검은 오케스트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지면서 재수감. 그리고 다음해 수용소가 영국군에게 해방될 때까지 다시 강제 수용소에 머무른다.2.3. 연합국 군정 시기
나치의 몰락 이후 슈마허는 나치당에 의해 산산조각났던 독일 사민당을 재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나치와 일절 타협하지 않고 독일 내부에서, 그것도 강제수용소에서 전쟁 기간을 보낸 그는 사민당 내에서 가장 권위있고 도덕성있는 지도자였기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민당이 여러 계파들로 나뉘어 사분오열했던 것과 달리, 이 시기 사민당은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의 점령지가 된 동독 지역 사민당은 스탈린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렸고 슈마허는 독일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하는 동독 지역 사민당 지도자 오토 그로테볼과 대판 싸우고 그대로 결별했다. 그리고 1946년 4월 동독 지역 사민당과 독일 공산당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으로 합당한 직후인 1946년 8월 슈마허는 서독 지역에서 재건된 사민당의 당대표로 취임하였다.그리고 이 무렵부터 죽을 때까지 주요 정적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와의 정쟁이 시작된다.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통일된 중립국 독일을 꿈꾼 슈마허와 달리, 사회주의에 반대하며 친서방 기류에 분단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마음이 있던 아데나워 둘 사이의 다툼은 어찌보면 필연적이었다.
2.4. 독일 연방공화국 시기
1949년 5월 헌법이 제정되고, 같은 해 8월에는 초대 총리와 의원들을 뽑을 선거가 시작되었다. 슈마허는 자신이 승리를 거두고 초대 수상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대다수 언론에서도 그렇게 예상했지만 현실은 기민당의 승리였다.슈하머와 사민당의 패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존재했다. 우선 독일 제2제국 및 후신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시점으로 생각해볼 때 바이에른과 라인란트 같은 보수 성향 지역은 미영불 서방 연합군 점령지였기 때문에 서독으로 귀속되었지만, 작센, 튀링겐, 메클렌부르크, 포메른, 브란덴부르크 같은 전쟁 이전 사민당의 표밭이었던 지역은 다수가 소련 점령지였기 때문에 이후 동독으로 넘어가면서 서독 내에서 사민당 지지자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둘째로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독 지역의 점령군인 미군과 프랑스군은 은연중에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당을 슬쩍 밀어주었다.[4] 세번째로, (평생 반공 스탠스를 유지했던 슈마허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의해 모조리 공산화된 동유럽 일대의 국가들과 그들에 의해 추방당해 서독으로 흘러들어온 수백만 명의 독일계 추방민들[5]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에 공포심을 가지게 하였다.[6]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화개혁 및 생산통제/가격제한 폐지와 같은 개혁책으로 독일 내 경제사정이 호전됐는데, 이게 기민당 소속 관료였던 에르하르트의 공으로 유권자들에게 인식되어 기민당이 득을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민당은 이 선거에서 원내 제1당을(131석) 차지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기민당(115석)과 그 자매정당이자 연합교섭단체인 기사당(24석)[7]을 합치면 사민당의 의석수를 넘겼고, 기민당을 이끄는 아데나워는 사민당에게 대연정 제의를 했으나 슈마허는 이를 거부했고, 그 결과 아데나워는 자민당(52석), 독일당(17석)을 포섭하면서 초대 총리 자리에 오른다.[8]
선거 패배로 인한 충격과 더불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모진 고문으로 인해 슈마허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는 팔에 이어 한 쪽 다리마저 절단해야 했다. 그렇지만 강인한 정신의 슈마허는 정치활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계속 하여 정치활동을 해 나간다. 이 시기 슈마허의 정치노선은 말 그대로 타도 아데나워로 정리할 수 있을 만큼 아데나워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루르 지방의 군수공장 해체 문제를 놓고는 이를 용인한 아데나워를 "독일의 총리가 아니라 연합군의 총리다."라고 비난하다가 20일 동안 의회 참석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고, 독일의 재무장 문제를 놓고는 독일의 통일에 방해막이 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특히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가입 문제도 자본주의와 연합국 점령군들의 힘을 증대시킬 뿐이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2.5. 죽음
1995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독일에서 발행된 우표 |
정계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52년 슈마허는 뇌졸중으로 인해 급사하고 만다. 반나치/반전체주의 운동을 하며 모진 고생을 하다 떠난 거물급 정치인의 급사에 독일 정계와 국민들은 정치노선을 막론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하며, 그의 일생의 라이벌이었던 아데나워 총리 역시 슈마허의 죽음에 다음과 같은 애도문을 발표했다. "우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9], 우리는 독일 국민의 이익과 복지 향상을 위한 가능한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하나였다."
[1] 現 폴란드 쿠야프스코포모르스키에 주 헤움노 군.[2] 현재의 슈타트 하노버 2구[3] 공산당을 붉은 나치라고 깠다. 오죽하면 전후 냉전 시기 스탈린이 이끌던 소련 코민포름에서 슈마허를 주적 제1호로 거명하기도 했을 정도.[4] 다만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던 영국군은 사회민주당 재창당을 승인해주는 등 비교적 중립을 유지했다.[5] 당시 서독 인구 6명 중 1명 꼴로 독일계 추방민이었다.[6] 나중에 한 사민당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이었다면 우리가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첫 선거는 1949년이었다."[7] 보수색이 훨씬 짙기는 하지만 기민당의 자매정당으로 바이에른 지역에서만 활동한다. 그리고 기민당은 바이에른에서는 활동하지 않는다.[8] 당연한 얘기지만 정치성향상 아데나워 역사도 사민당과의 불편한 동거보다는 중도우파 성향의 자민당, 독일당을 끌어들이는 걸 선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데나워가 대연정을 형식상으로나마 제의한 이유는 (대연정이 성립이 된다면) 기민/기사/사민당의 의석수가 전체의 60%에 육박하기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골칫거리였던) 정국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였다. 실제로 기민/기사/자민/독일당의 의석수를 합치면 208석인데, 반란표가 속출하면서 아데나워는 총리 인준안 가결 마지노선인 202표를 단 1표 차로 넘긴 203표로 총리 인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1표는 훗날 아데나워 본인이 두고두고 회고했지만 본인이 본인을 찍은 것이었다.[9] 훗날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가진 인터뷰에서 본인과 슈마허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대해 아데나워는 내셔널리즘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유럽 내 정계에서의 통상적인 스탠스와 달리, 좌파 성향의 슈마허가 우파 성향의 아데나워보다 더 내셔널리즘이 강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