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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07:04:47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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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총련 글씨.png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
General Association of Korean Residents in Japan
약칭 <colbgcolor=#fff,#191919>조총련 (대한민국)
조선총련, 총련 (북한)
의장 허종만
제1부의장 박구호[1]
부의장 남승우, 배진구[2], 조일연, 송근학[3], 서충언[4], 강추련[5]
설립 1955년
소재지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 후지미 2-14-15
규모 약 8만 명
선행 조직 재일본조선인련맹 (1945년 ~ 1949년)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1951년 ~ 1955년)
최고인민회의
5석[6] / 687석 (0.8%)
이념·정치노선 주체사상
파일:조총련25차.jpg
2022년 도쿄에서 열린 조총련 제25차 전체대회 당시 사진

1. 개요2. 역사3. 본부4. 특징
4.1. 20세기4.2. 21세기
5. 대외적 인식
5.1. 귀국자에 대한 북한의 대우
6. 민단과의 관계7. 대중매체8. 역대 의장9. 산하단체10. 그 외
10.1. 조총련계 금융기관
11. 관련 자료

[clearfix]

1. 개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ruby(在日本朝鮮人総聯合会, ruby=ざいにほんちょうせんじんそうれんごうかい)])는 일본 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지지하는 재일 조선인 단체이다. 일본에서는 조선총련([ruby(朝鮮総聯, ruby=ちょうせんそうれん)]、朝鮮総連)이나 총련([ruby(総聯, ruby=そうれん)]、総連)이라 부른다. 일본어신자체에서는 「」을 「」에 병합했지만, 조총련을 부르는 경우에는 특별히 「聯」을 쓴다. 한국에서는 조총련(朝總聯)이라고 부르며, 북한에서도 일본처럼 조선총련, 총련이라고 부른다. 또한, 북한 문화어에서는 두음법칙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총련합회」라 한다.

과거에는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경제력이 강해서 대한민국 정부 공인 단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이하 민단보다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북한의 실상이 드러나고 재일 조선인의 사망, 일본이나 남한으로의 귀화, 재일 조선인 자식 세대들의 이적 등으로 인해 조총련은 갈수록 세가 약화되는 추세. 그러나 냉전 시기 이후 민단도 절대적인 세력이 많이 약화되면서 상호 간의 직접적 마찰은 거의 없어졌다.

대한민국에서는 대법원 판례에 의해 반국가단체로 인정된 단체이다. 판례[7] 이 때문에 공식 홈페이지가 대한민국에서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의해 유해사이트로 분류되어 접속할 수 없다.

2. 역사

이 단체의 기원은 1945년 8.15 광복 후 세워진 좌우합작 전국 재일 조선인 조직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이며, 산하 단체로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과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등을 두었다. 그러나 1949년 GHQ에 의해 '폭력주의적 단체'로 몰려 김천행과 한덕수 등 주요 간부들이 쫓겨났고, 이듬해 해산당했다. 이후 조선인단체협의회, 조국통일전선실행위원회 등이 명맥을 잇다가 1951년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좌익계열의 주도로 재일조선민주전선(민전)이 결성됐으며, 행동조직으로 조국방위위원회(조방위)를 두었다.

이때부터 조선인들의 권익 향상에 초점을 맞춘 일본공산당 민족대책부 계열과 오로지 북한만을 추종하면서 일본공산당에 적대적이었던 한덕수 계열이 극심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다가 1954년 8월에 남일 북한 외무상이 재일 조선인을 북한 사람으로 하고, 한덕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1955년 5월 25일에 민전과 조방위를 해체했고, 26일 현재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로 새로 출범해 일본공산당과 관계를 끊었고, 민족대책부 계열은 모조리 추방당하였다.

창립 초기에는 한덕수 등 6명의 집단지도체제였다가 1958년부터 한덕수 1인 체제로 개편됐고, 이때부터 조선로동당의 일본 지역 공작거점이자 북한에 엔화를 갖다 바치는 빵셔틀로 전락하였다. 1970년대 초 들어서 김병식 부의장이 새로 떠오르는 듯했으나 1972년에 한덕수와 대립하다 김일성의 개입으로 실각하고 북한으로 압송당한다. 1975년부터 민단의 모국방문사업으로 인해 민단으로 전향하는 사례가 늘었으며, 2013년 이후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산하 제225부(구 대외련락부)의 지도를 받고 있다.

3.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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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본부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중앙본부는 도쿄도 치요다구에 소재하고 있다. 사실상 주일 북한 대표부 역할을 한다.

현재 일본한일기본조약으로 북한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미수교 상태이며, 조총련 중앙본부가 비자여권 발행 업무를 하고 있다.

참고로 한국 국내에서 출생한 한국 국적자가 통일부의 허가 없이 일본의 조총련 및 관련 기관(조선학교 등)을 방문하면 국가보안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다만 한국 국적자여도 일본 태생이라면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서 유연해지기도 한다.[8]

다른 것은 몰라도 북한에 관련된 사안은 국가정보원통일부가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법률 및 한국 정부의 대응 이전에 사실 한국 국적자가 조총련 관련 기관에 방문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해당 빌딩의 매각 문제를 놓고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일본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삼무사건의 최연소 범인인 이케구치 에칸이 주지로 있는 최복사(사이후쿠지)와 북한이 설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몽골의 한 무역 회사가 입찰에 나섰으나 모두 실패했다.

4. 특징

한국일본에선 북한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고, 또 이 단체 구성원들이 3D 업종에 많다보니, 전체적으로 영 삐딱하고 과격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인식이 박혀있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인상 중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다. 실제 일본에서 이들은 주로 빠칭코[9], 운수업, 경비업 등 대우여건이 비교적 낮은 직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일본 현지에서 이들의 인식이 영 좋지 않은 이유로는, 우선 북한에 대한 광신적 추종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북한의 잘못들을 옹호해주기 급급한 행태에 있다. 이들의 논지는, "우리의 정체성이 모호했을 때 우리가 조선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고, 우리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고 역사와 문화를 가르쳐 준 조국이다. 좀 이상하긴 해도 어쨌건 조국 아니냐?"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상이 달라도 그래도 동포니까 감싸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 패망 이후 돌아올 사람들은 일단 귀국했지만, 여러 이유로 귀국하기 힘든 사람들은 일본에 남아 터를 잡고 살면서 당시 일본 사회의 여러 차별과 박해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였다. 이렇게 힘든 상황일수록 자신의 정체성[10]을 명확히 인식하고 '조국'이나 '민족'과 같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과 유대감에 의지하고 싶은 경향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이 시기에 언어, 역사, 문화와 같은 민족 교육에 큰 노력을 기울인 것이 (북한과 연계된) 조총련이었다.[11] 당시 재일 조선인의 상당수가 북한과 조총련의 관점에 따라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인식했다.

사실 한국인자기들이 까면 까더라도 다른 사람이 한국을 욕하면 왠지 불쾌하고, 옹호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고, 한국보다 더 잘 살고 살기 좋은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인식하여 그런 좋은 나라보다 한국을 더 좋아하듯이, 조총련의 북한 인식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면 간단하다. 그들도 정보 유통이 자유로운 일본에서 사는 만큼 북한이 지옥 같다는 것을 도무지 모를 수가 없지만, '북한이 자신의 조국이다'라는 인식 아래서 성장하고 교육받았기에 '그래도 조국이니 버릴 수는 없다'고 반응하기 쉽다는 것.[12] 또한 조총련과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에서는 민족주의와 집단주의, 소속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어떤 국가가 좋은 나라라서 조국으로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조국이니까' 나쁜 점까지도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기 쉽다. 여기에 더해 조총련계 재일들의 경우에는 북한의 힘든 삶을 직접 체험하며 자라거나 대한민국처럼 북한군에게 일상을 직접 위협받는 위치도 아니어서 북한에 대한 인식이 더욱 막연하고 북한의 부조리한 사회체제에 대해 비판적 인식이 옅을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로는 조국이라지만 그 조국의 체제 때문에 북한 인민들이 고통받고 대한민국도 위협받고 있는 현실은 재일 조선인들에게 있어서는 제3자, '남의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맹목적 북한 찬양과 옹호 행위로 일본내 우익 세력들의 주된 타겟이자 일본 사회에서 조총련을 그래도 이해해주던 진보세력들을 팀킬하는 주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한 단체였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선 세력 자체도 많이 약해졌을 뿐더러 특히 조총련 소속 부모인 젊은층 중심으로도 북한의 실태와 자유민주주의인 일본과 비슷한 한국을 지지하는등 자유화 물결이 일면서 조총련 모두가 북한을 진심으로 추종하는 행태는 많이 사라진 편이다.[13] 이런 사람들의 경우 성인이 되고 나선 당연히 대한민국 국적이나[14] 일본 국적을 얻고 싶어하지만, 이런 '이적'은 가족과 친척마저 연을 끊어버리고 친가와 친척들을 포함해 조총련 재일조선에서 사회적 매장 수준의 보복이 가해질 수도 있는 문제기 때문에 마음은 친한국이지만 어쩔수없이 조총련 소속으로 사는 경우도 있다.

4.1. 20세기

일본에서 북한의 공작원들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점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 혹은 한국을 경유해서 북한에 자금을 대주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요코타 메구미납북 일본인 사건 뿐만 아니라 1970~80년대에는 적지않은 "북조선 공작원"들이 일본인들을 포섭했고, 때로는 납치했다.[15] 이들은 북한에 호의적인 언론인, 학자, 경제인들을 포섭해서 북한을 견학시켜주고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전파하도록 유도했다. 한때 조직원 53만명을 넘어 일본 내부에 존재하는 국가 안의 국가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위세를 자랑하였다. 허나 이것도 1980년대까지나 먹혔지 동구권 붕괴 이후에는 얄짤없는 얘기.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전혀 통하질 않는다.

199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야 조총련 내에서 이런 흐름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 역시, 1960~80년대의 조총련식 민족교육의 영향 아래서 성장한 세대와는 다른 젊은 세대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나타난 변화라고 이해하면 간단하다. 북한에 대해서 비판, 심지어는 독재 및 인권 이념 문제와 폐쇄성 같은 지극히 당연한 문제점을 지적해도, 이에 격렬한 알러지를 드러내면서 적대적인 의사를 보인다. 이들 중 극단적인 경우는 중동 국가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처럼, 북한의 독재체제도 나름대로 복잡한 이유가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북한에 실존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 화제를 꺼내도,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일은 고사하고 대부분 이중잣대를 적용하거나 북한은 그 특수성 때문에 그런 곳이 존재할 수는 있는데, 그걸 전체로 보면 곤란하다는 면피식이다.[16] 오히려 그 사실을 외부세력의 협잡으로 극구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북한은 완벽한 까임방지권을 가진 신성하고 위대한 조국이므로 깐다는 것 자체가 금기다. 이는 조총련계 학교의 철저한 세뇌교육에 기인한다.[17]

4.2. 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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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사진의 장소는 북한이 아니라 도쿄다.
물론 21세기 들어선 북한의 실체가 원체 까발려져서인지 옹호보다는 오히려 앞장서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사실 독재정권 하에서도 끊임없이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면, 조총련의 저런 이중잣대는 그냥 "세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외국인에 맞서 자기 나라를 옹호하는 경우는 정치범수용소와 같은 중대한 인권유린에 대한 지적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개고기 문제 같은 말초적인 놀림에 대응하는 경우이거나 논쟁이 분분한 정치적인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과 같은 명백한 결함파탄국가에 대한 인지부조화적 옹호에 댈 바는 아니다.

일본 사회에서 북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고립시켜서 독자세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결과 조선적[18]을 유지하는 한편, 독자적 민족학교인 조선학교[19]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계 민족학교가 단 4곳 뿐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진학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단이 운영하는 학교가 인가 학교로 운영되는데 비해, 이쪽은 비인가 학교로서 정식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결국 조선학교 출신 학생들은 사회진출을 놓고, 현시창적 이상과 현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에는 많은 수가 진학과 제도권 진입을 포기하면서까지 꿋꿋이 조선적을 유지했으나, 이제는 북한의 시궁창적인 현실과 오히려 북한보다 잘 살고 민주주의 사회인 한국 사회나 일본 사회에 정식으로 편입하기 위해서 해당 국적을 따는 소위 '이적'을 하는 경우도 많다. 이적을 원하는 자녀와 이를 막으려는 부모세대간의 갈등은 매우 심한 상태[20]이며, 일단 이적한 경우 이적 의도가 불순하다고 판단되면 조총련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을 당하다시피 한다. 사실 일본을 싫어한다는 것도 일본 내 조선인 사회에서의 전통적인 의미와 정치적인 의미가 섞인 기묘한 것으로, 실제로는 다른 일본인들과 별 차이 없이 일본의 영화나 음악 등 일본 문화를 즐기고 있다. 때문에 이를 이중잣대가 아닌 문화적인 부분과 정치적인 부분을 철저히 나눠서 생각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상적으로는 아무리 반일 성향이라고 하나, 그들은 이미 일본 사회에서 몇십 년을 부대끼며 살아왔다. 문화와 정치를 상당부분 유기적으로 보는 한국이나 문화=정치나 다름없는 북한의 시각에서 볼 때는 이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개개인이 파편화 되고 개인주의화가 상당수 진행이 된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이들은 정치적 스탠스는 북한을 긍정하지만, 실제 생활은 일본인과 별 다를바 없다. 이러한 재일동포의 복잡성과 고충이 독립영화 '우리 학교'에도 잘 드러나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새로운 세대들은 어느 정도 융통성을 보이는 한편, 이전 세대처럼 무조건적인 북한 지지자도 감소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 중에는 "한국조선은 모두 같은 뿌리인데 좀 안 싸우고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제3자처럼 간격을 두고 접근하려는 신세대도 있다. 신세대의 적지 않은 수가 조총련으로서의 정체성을 과감히 포기하고 있으며 정식으로 일본 혹은 대한민국 국적[21]을 취득하고 있다. 교포사회 전체가 2~4세까지 물갈이 되는 과정에서 적잖이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먹고 살기 편하다면 뭐 한국이나 일본 국적이 대수인가?"라며 '이적'하는 사람도 굉장히 많아진 상황. 그 결과 해방 직후엔 조선적/총련계 재일교포 숫자가 다수였지만, 현재는 대한민국 국적자들이 조총련을 제치고 재일교포 세력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 국적만 따놓고 정신적으로는 조총련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고[22], 실제로 조총련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지만 애초에 대한민국 국적을 택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현실과 타협하고 이질화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다보니 대내적으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옳은가?"라는 자성과 회의론도 적잖히 나오고 있으며,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사고의 차이도 이미 많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발언 자체만으로도 이적이라고 할 법한 "김정일 위원장도 너무한다! 자꾸 저러면 안 되는데!"라는 불평도 종종 튀어나온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김정일 위원장의 자백사건인데 일본으로부터 사죄배상금 명목으로 100억달러 받아오는데 환장해있던 김정일은 2002년, 북일정상회담 때 조총련이 앞장서서 커버치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서 특수기관과 조총련을 동원하여 일본인 14명을 북한이 납치한게 맞다고 일방적으로 인정해버리면서 조총련이 멘붕에 빠지게되는 희대의 팀킬을 자행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납북자설은 어디까지나 도시전설의 영역으로 취급하고 있었으며 일본내 진보세력과 조총련은 이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조선인 차별이라고 화를 내고 있었는데 정작 조직 수장인 북한의 김정일이 요코다 메구미의 증거사진까지 넘겨주면서 조총련의 개입까지 인정해버린터라 이후 일본사회에서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조총련에 대한 여론이 차디차게 싸늘해져버렸다.

이 사건 이후 신세대들은 성장 과정부터 일본에서 민주주의 영향과 자본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과거 세대와 달리 상당히 자유분방하며 의사가 확고해졌으며 북한에 대한 이미지와 위상도 시궁창이다 보니 한국 국적으로 이적하는 세대들이다. 이러다보니 구세대들은 어떻게든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를 통해 사상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들지만, 북한 내부와는 달리 일본은 본인의 진학 선택권도 있고[23] 환경상 일본의 법을 적용받는지라 강제적으로 통제를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윗동네의 막장화도 가속화되다 보니까 북한식 교육을 독특한 문화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일 뿐, 그 자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거나 골수적인 주체사상 지지자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24] 조선학교 교내에서는 "일본 학교로 전학 혹은 진학한다."라는 이야기만 나와도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이며 2012년까지는 확실히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만 대체적인 분위기가 그랬었다.

이처럼 세대갈등과 문화접변으로 인한 약체화 속에서 현재의 조총련은 과거와 같은 독자적 소사회로서의 위상은 고사하고 겨우 소속 교포들의 취업/주택/복지문제에 관련된 생협수준으로 크게 몰락했다. 50만이 넘던 조직원은 8만명까지 줄어버렸고 그중에서 조선적 유지하는 숫자가 일본 정부 발표로는 고작 3만명이다. 이 때문에 요즘은 1990년대 이전과 같은 사건도 많이 줄어든 대신, 오히려 혐한초딩들이나 재특회 소속의 찌질이 잉여 인간들이 가끔 조선학교에 몰려가서 깽판을 부리거나, 혹은 조총련 지부에 난입하여 분탕치는 식으로 처지가 뒤바뀌어, 오히려 일본 내의 좌파들이 이들을 불쌍하다고 안쓰러워하는 복잡한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25]

이처럼 특유의 배타성에 따른 대외적 멸시와 대내적 이반 속에서도 어떻게든 근성으로 명맥은 이어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조총련 내부 경제사정이 악화되어, 조총련의 치요다구 본부를 포함한 산하 기관의 부동산들도 압류 크리를 겪고 있다. 특히 일본에까지 민폐를 끼친 수차례에 걸친 미사일 발사, 북한의 핵개발연평도 포격전북한의 대남 도발사들을 계기로 일본 내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일본 내 모든 지방 관청의 조총련/조선학교 지원 반대가 한층 힘을 얻고 있다. 하시모토 도루가 지사로 있던 시절 오사카부의 경우 조선학교 지원 중단을 결정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꿋꿋이 종북을 고수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당연히 좌우를 막론하고 언론마다 조총련을 까대고 있다.

이 때문에 조총련뿐만 아니라 민단 등 애꿎은 한국 국적자들까지 도매금으로 피해를 보기도 한다.

2022년 5월 28일에 총련이 도쿄 도쿄조선문회회관에서 제25회 전체대회를 열었다.# 김정은이 축전을 보냈다.

2023년 4월 15일 태양절 행사에는 겨우 200명이 모여, 과거 2,000명까지 모였던 것과 비교하면 조총련의 쇠락세가 확실해보인다. 도쿄 조총련 본부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수십 명이지만, 급여는 지급되지 않아 부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재일동포들의 권리를 위해 노력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 조총련 본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북한에 열렬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사람들 뿐이며 이들마저도 북송문제나 북한과의 교역문제등으로 어쩔 수 없이 지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재일동포들의 지지를 잃고 역할과 기능이 축소되어 조총련 관계자들도 조직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26]

북한의 통일정책 개편으로 조선학교에 '자주통일'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 교육을 금지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조총련 내부에서 이 같은 방침 전환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고, 조선학교 학생 학부모 일부는 "일본 학교에 보내겠다"는 말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24년 8월 26일 조선대학교[27] 학생 약 50명이 대학 교육 이수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일본을 떠났는데, 조총련 학생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코로나19 이후 처음이다. 이외에도 대학생들의 출국 계획이 적어도 두 차례 있으며, 그 이전 조총련의 '금고지기'로 꼽히는 국장급 간부도 7월 방북했다고 한다. #

5. 대외적 인식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이들에게 영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 뿌리는 6.25 전쟁의 후폭풍으로 인한 반공의식의 심화가 원인이다. 사민주의조차 긍정적으로 거론하는 것조차 불온하게 보던 당시 시대상황에, 아예 대놓고 북한을 찬미하고 옹호하는 조총련은 그 자체로 터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남북관계가 최악의 대치를 보이던 1980년대 후반까지도 국민의 해외여행이 거의 드물던 시기에는 굳이 비지니스나 여행목적으로 해외에 나갈 경우 반드시 출국하기 전 한국자유총연맹에서 방첩교육(소양교육이라고도 함)을 받는 것이 의무였는데, 그 교육 내용에는 일본에서 '고려', '조선' 과 같은 한글 단어가 쓰여진 점포들은 대개 조총련 계열의 상점이며, 그런 곳에 드나들면 보안에 저촉됨은 둘째치고 그 돈이 그대로 북한의 자금줄이 되어 무기화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라 한다. 당시까지는 조총련이 그나마 일본 내에서 꽤 기세등등했음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반감이 완화된 지금이라고 해서 일본이든 한국이든 조총련에 대한 인상이 딱히 나아진 것도 아니다. 조총련들은 여전히 주체사상에 대한 광신적 숭배[28], 남북관계에 대한 객관적 시각 결여, 일본 내에서의 발전적인 노선 부재, 그러니까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알맹이는 이미 일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민족 개념의 쭉정이만 강조하는 부분들이 문제로 남아있다. 바꿔 말해서, 일본 내의 민주주의와 풍족한 인프라를 누리며 자기 생활을 영위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일단은 떠들고 있는 주체사상에 환상을 갖거나 체제 내에서 체제를 위협하는 외세와 결탁하며 체제를 악용하면서 자기 아쉬울 때만 소수민족 개드립을 치는 경우가 종종 존재한다는 것이다.[29] 그나마 이들 외에는 동포 사회에서 제대로 된 향후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무작정 민족주의만 내세우기보다 어느 정도는 공존을 모색해보자."라고 주장하면 해당 사회에서는 배신자로 치부되어 사회적으로 생매장되어서다.

북한과는 1960~80년대 꽤 빈번한 교류가 있었고, 지금도 서로 립서비스 정도는 잘 해 주지만 1990년을 전후해 경제난이 닥쳐오면서 북한에서 지원해주는 신세라기보다는 뜯어가는 신세로 전락한 상황이다. 북송사업이 한창 활발하던 때, 먼저 북송선을 타기로 한 교포가 대놓고 편지에다가 오지 말라는 내용을 쓰면 검열을 받을 게 뻔하니 내가 편지를 가로로 써서 보내면 너도 북송선 타고 조선으로 들어오고, 세로로 써서 보내면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오는 편지가 줄곧 세로로 쓰인 편지밖에 없어서 안 갔다는 에피소드도 존재한다.[30] 또 다른 에피소드로, 편지에 "여기는 일본의 XXX만큼 풍요롭다"는 내용을 적었는데 알고보니 그 XXX라는 곳은 빈민가였고, 일본 사정을 잘 모르는 북한 관리가 풍요롭다는 표현만 보고 부촌이겠거니 생각해서 검열을 통과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때문에 이 둘의 관계도 과거에 비해서는 다소 소원해진 상태다. 때문에 우습게도 결국 활로의 한 방편으로 1990년대 이후에는 그토록 적대시하던 민단과도 교류협력이 자주 행해지고 있다.

202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한 반감이 늘어가면서 조총련에 대한 인식도 시궁창을 달리고 있다. 오사카 츠루하시 등의 코리아 타운에서도 조총련계는 민단계, 뉴커머를 비롯한 다른 재일교포들과 다르게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지 않고 조용히 살고 있는 형편이다. 윤미향 국회의원이 조총련 행사에 참석해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

5.1. 귀국자에 대한 북한의 대우

조총련의 눈물겨운 북한 추종과는 달리 북한에서 조총련계 이주자들에 대한 현지주민들의 처우는 한 마디로 이질적 존재. ‘째뽀'[31]라는 비하하는 멸칭으로 부르면서 일본과 자본세계의 불순한 물을 먹고 온 이단아로 치부한다. 법적으로도 무조건 동요계층[32] 이하로 분류되며 분류 과정에서 적대계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암암리가 아닌 대놓고 차별과 감시가 존재하고 사회적 진출에 많은 제약이 따른다고 한다.

사실, 재일교포 북송 귀국사업 당시에도 북한을 선택한 상당수의 조총련 출신 교포들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마치거나 북한 사회에서 증발한 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수용소의 노래의 저자인 강철환씨의 경우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조총련 지역 간부 출신으로 있다가 북송교포 귀국사업 때 북한으로 간 경우이다. 이러한 현실이 알려지면서, 조총련계 교포들의 이반을 가속화하기도 했으나 북송된 교포들은 일종의 볼모이자 인질이나 다름 없었기에 일본 현지의 친척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총련에 충성하고 북한돈을 송금해야 하기도 했다.

이런 북한 현지 인식도 모르고 재일교포 북송선을 탔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일본 내의 재일동포 차별 대우 문제도 있긴 했다. 당시 일본 정부에선 재일동포를 골치덩어리로 치부하며 암암리에 차별했고, 50년대 중반 즈음 북한이 사실상 일꾼이 필요해서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일본측에 제안하자 이에 일본 정부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겉으로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며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골칫덩어리도 떠나 보내고, 거기에 세금도 아낄 수 있다며 좋아했다.

다만, 고용희김정일의 부인이 되면서 북한의 조총련에 대한 차별대우는 어느 정도 시정되었고 1990년대 경제난이 닥친 이후에는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일반인들은 수시로 굶는 게 일상이 된 반면, 재일교포들은 꽤나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가용을 가진다거나 일본에서 친척들이 벌어온 돈으로 당국과 함께 사업을 한다거나 장마당에서 장사를 해먹어서 돈을 버는 식이었다. 사실 조총련계가 일본에서 하위층에 속한다고 하지만 애시당초 압도적인 일본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를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90년대 중반에 일본의 1인당 GDP가 4만 달러를 넘어섰는데,[33] 이건 버블시대 및 엔고의 영향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당시 북한의 1인당 GDP는 500달러 선까지 떨어졌다.[34]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총련계 교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아예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며, 아직도 사회적인 차별이 남아있다. 은행업(을 빙자한 고리대업)으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사회적으로 극심한 차별에 시달렸던 중세 유럽의 유대인들에 비길 만하다.

참고로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북송된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북한에서 북한 주민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망언을 하고 있는데, 이를 논파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결과다. 이건 남한으로 치면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형식적으로는 대한민국보다 훨씬 빨리 재외국민에 대해 선거권을 인정했고, 제4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는 그래서 조총련계 대의원들이 7석이나 차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5기까지는 조총련계가 최고인민회의에 의석수를 작게나마 확보했나 싶더니, 6기부터는 슬그머니 조총련의 존재가 사라지고, 다시 조선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 2, 3당으로 떠오른다. 제5기 대의원 선거와 북한의 70년대 대격변 시기와 시점이 일치하고, 이 시기에 조총련 의장 추대와 관련하여 조총련 내부의 분열이 있었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북한사회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북한사회에 협조적이거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조총련계 인사노예들만 살아남았다는 분석이 있다. 참고자료

6. 민단과의 관계

대한민국 정부에서 인정하는 재일 한국인 조직인 민단과는 끝장나게 사이가 나빴다. 한반도남북분단에 따라 재일 조선인들도 좌우로 갈라졌는데 1945년에 재일본조선인연맹(재일본조선인련맹 약칭 조련)이라는 좌우합작 재일 조선인 단체가 공산주의 세력 주도로 좌경화되자, 우익 민족주의 세력이 이에 반발하여 조련을 나와 세운 단체가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 즉 현재의 민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북한6.25 전쟁을 겪고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한국을 옹호하는 민단과 북한을 옹호하는 조총련의 사이도 극단적으로 나빠지게 되었다. 이들은 옛날부터 서로서로 비방하고, 심지어는 상대방 사무실에 쳐들어가서 몽둥이로 조지는 등 정말 사이가 험악했다.[35] 남북관계가 재일교포 사회에까지 끼친 비극이다.

냉전이 끝난 이후로는 양쪽의 온건파들이 '한민통(오늘날의 한통련)'을 결성해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양쪽의 화해를 도우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어느 정도 화해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김정일의 끝없는 벼랑 끝 전술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특히 2006년에는 하병옥 민단 중앙단장이 조총련 측의 서만술 의장과 화해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냈다가 지방조직의 반발을 사 몇 개월 못가 사임했고, 이듬해에는 아예 민단으로부터 제명당했다. 그 후 문재인 정부에서 민단 관계자들에게 조총련과의 화해를 촉구했다는 주장도 민단 고위층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또한 탈북자 문제도 민단과 조총련을 화합하게 할 수 없는 원인 중 하나. 북한은 조총련에게 있어 돌아갈 조국이자 최후의 지상락원인 곳인데 거길 비난하며 탈출했다는 것은 용납이 어렵고 배신감마저 느낄 것이라 탈북자 단체와 상당히 사이가 나쁘다. 그런데 민단이 주로 지원하는 단체 중 하나에 탈북자, 특히 일본으로 흘러온 탈북자 관련 단체가 있다.

7. 대중매체

실제로 일본 내에서는 재일조선인 특히 조총련계가 막장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최양일영화 '피와 뼈'에 등장하는 막장 주인공 김준평이 바로 이런 조총련상의 전형 중 하나.

재일한국인으로 유명한 가네시로 가즈키가 어릴적 조총련계 학교를 다녔다. 자전적인 소설 GO에서도 나오는데 나중에 한국 국적으로 아버지가 바꾼다. 이유는 하와이를 가고 싶어서라고 한다. 사실 가즈키의 대부분의 작품에 재일한국인, 총련계 인물들이 한번씩 등장한다.

한국에서 연재 후 출간된 만화 <재일동포 리정애[36]의 서울 체류기>를 보면 조총련 골수파의 전형적이면서도 솔직한, 그리고 일반인에게는 불편한 특유의 사고관을 확인할 수 있다. 조총련 사회가 민족주의를 광신적으로 숭배함을 엿볼 수 있고, 특히 반일 경향이 아주 지독하게 강해서 일본인은 진보적인 사람까지 전부 '쪽바리'라고 여과없이 통칭하는 것도 나온다. 심지어는 "이런 쪽바리까지 욕해서는 안 되는데" 같은 여러모로 신중하게 생각한다. 또한 남북관계의 모든 문제 책임에 있어 "공화국(북한)은 전혀 잘못이 없다."며 모든 문제 책임을 오로지 한국의 탓으로만 전가하는 등,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이러한 조총련 골수파의 가치관이 흥미롭다면 일독해 볼 필요는 있다.

과거 한국 반공물에선 악의 소굴로 묘사되기도 했다. 때로는 월북의 창구로 그려지기도 했는데[37] 1975년 KBS-TV 실화극장에서 소개된 조총련 부분은 그야말로 조총련에 대한 음습한 조직이라는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38] 이후 1986년KBS1의 특집드라마 <멀고 먼 사람들>이나 1984년작 MBC의 <동토의 왕국>[39] 등에서 조총련의 행태를 크게 비판하였다. 2018년 12월 개봉된 영화 <마약왕>에서는 조선인 야쿠자로 등장하는 김순평이 1970년대 당시 조총련과 연계된 야쿠자로 나온다.

시트콤의 배경으로 나온 적도 있는데, MBC의 시트톰인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강유미의 아버지인 강철봉이 조총련에 소속된 간첩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던 도중 국가정보원에게 포섭되어 전향해 이중간첩이 되었고, 이로 인해 자신은 물론 아내 유정민과 딸 유미까지 보복의 대상이 되어 쫓기게 된다. 결국 극 중 말미에서 철봉과 정민은 조총련이 보낸 간첩에게 살해당했고, 딸 유미는 국정원 요원으로 위장한 조총련 간첩 박진우와 대적하다가 큰 부상을 입고[40] 국정원의 보호에 맡겨지게 된다.

1991년 남북 UN 공동 정회원국자격 가입 이후에 조총련이 한국 내에서 수준 이상으로 미화된 매체는 이현세남벌이며 자세한 내용은 남벌 항목을 참조할 것. 근데 남벌 자체가 불쏘시개급이다.

그 외에 1994년 9월 18일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조총련 동포 고향방문 당시의 얘기를 재연극 형식으로 다룬 바 있다.

8. 역대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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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상임위원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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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한덕수 서만술 허종만 }}}}}}}}}


의장 자리는 사실상 종신집권이 가능한 자리다. 거기에 사후 애국렬사릉 안장에서 알 수 있듯 조총련 출신 개인의 처우와는 무관하게 의장의 처우는 좋은 편이다. 특이하게도 모든 의장이 다 남한 출신이고 셋 다 경상도 출신이다.

9. 산하단체

10. 그 외

과거 일본이 북한에 관한 정보력이 나름 준수했던 이유이며 일본당국이 조총련에 대해 크게 터치를 하지 않게한 원인이기도 하다. 조총련을 통해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아사히 신문의 북한전문 기자 마키노 요시히로에 따르면 정작 그 귀한 조총련 정보통을 가지고도 일본 내각 정보조사실이나 공안당국의 북한 정보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한국 정보당국은 언제 납치 당할지 모를 동북 3성 등지로 가서 목숨걸고 정보를 얻어올때, 정작 일본 측은 자기네 안방에서 사실상 북한 대사관 노릇을 하고있는 조총련을 두고도 손가락만 빨다가 한국의 안기부 측의 정보공유나 받아먹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아주 속이 터질 상황이었던 셈. 90년대 고용희, 김정은 모자가 일본 드나드는 것도 안기부는 하나하나 상세히 다 파악하고 있어서 일본 측에 동선감시를 잘 하라고 언질까지 해주었으나 정작 일본 측은 둘이 김정일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몰라서 무시해버리기도 했다고.(...)

아무튼 21세기 초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위상을 유지해서 북한 측 정보를 얻기 위해 한국 외교관들과 정보요원들도 계속 조총련과 접촉했으나 지금은 조총련이 몰락했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다.

2024년 기준 북한이 조총련에 보낸 '교육원조비'는 도합 497억 엔(약 3억 2300만 달러)라고 한다. 물론 재일교포들이 북한에 송금한 돈은 그보다 더 많다. #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이주한 한국인 가정이 확인될 경우, 조총련 쪽 사람들이 가입을 권유하러 마치 사이비 종교다단계 업자들처럼 뻔질나게 초인종을 눌러댄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사실이었건 아니건 현재는 생활협동조합 수준으로 크게 축소된 조총련은 이런 일을 벌일 여건도 안 되고 여력도 없다.[42]

요즘은 일부에서 한국의 인터넷 게시판에 월북 권유글을 올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보지도 않고 쿨하게 무시하지만, 의외로 낚여서 연락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구글 검색 결과 극우 성향 사이트인 구 정사갤, 일베저장소에까지 글을 올려대고 있다. 월북 후 신분세탁해서 돌아갈 수 있다는 부분이 압권. 우리민족끼리처럼 나무위키 문서에 반달을 저지른 적이 있는데, 주로 김씨일가에 관한 문서에 반달을 하였다.

코나미가 게임의 한국어 번역을 할 때 조총련 계열 업체에 하청을 맡긴다고 한다. 주로 BEMANI 시리즈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으며 번역 어투나 글꼴도 묘하게 북한 느낌이 나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위엄이 넘치는 북한식 글꼴을 보자.

도시샤대학리츠메이칸대학에서 조총련 출신들이 주축이 된 서클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 출신 유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일본인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202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회의에서 김정은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고 설정한 데 대하여, 조총련계 원로들이 "어떻게 통일을 내려놓을 수가 있느냐"며 문제 제기를 한 바 있다고 한다.[43] 보통 조총련의 문제 제기가 있으면 본국 평양에선 상세한 설명 자료나 해설 자료를 만들어 보내는데, 이번엔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논리가 궁색했던지 평양에서도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했다는 것. #

10.1. 조총련계 금융기관

민단이 세운 신한은행과는 다르게[44], 조총련계 신용조합은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불량채권 문제로 일본경제의 뇌관이 되고 있다. 2020년 9월 현재 일본에는 7개의 조총련계 신용조합이 있는데, 웬만하면 이들 7개 신용조합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말자. 일본인 및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일본 거주자들도 여기 이름들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거다.[45] 만날 일도 없거니와 일본의 3대 메가뱅크와 유쵸은행도 계좌개설을 충분히 해주니 거주자 및 거주예정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애초에 유학생, 주재원, 결혼 이민자 등이 은행이 아닌 신용조합과 거래할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해당 신용조합은 다음과 같다.

한국어 위키백과의 조은신용조합 항목을 참조.

일본 국적자 및 재일 외국인을 포함한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적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위의 7개 조총련계 신용조합과는 절대로 거래하지 말 것.

정말로 한국계 금융기관과 거래하고 싶으면 KEB하나은행(도쿄지점, 오사카지점), SBJ은행, 재일한국인신용조합협회 소속 7개 신용조합(+ 킨키산업신용조합)을 추천한다. 특히 SBJ은행은 지점에 방문을 하지 않고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계좌개설이 가능하다.

11. 관련 자료

조총련의 탄생과 역사에 대해 소개된 영상

[1] 조직국장 겸임[2] 사무총국장 겸임[3] 교육국장 겸임[4] 국제국장 겸임[5] 재일본조선민주녀성동맹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장[6] 허종만(617호, 함북 명간군 극동선거구), 남승우(494호, 강원 평강군 복계선거구), 강추련(143호, 평남 양덕군 양덕선거구), 한동성(294호, 평북 의주군 의주선거구), 박충우(549호, 함남 장진군 장진선거구)[7] 이 판결례에서는 피고인이 면소를 선고받았지만, 조총련을 반국가단체로 인정하고 있다.[8] 예: 부모의 국적/지역구분이 한국과 조선적일 경우, 교육문제로 인해 아이가 조선학교에 진학할 경우. 당장 권리세조선학교에 다녔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논란이 된 적이 없었다. 물론 그가 한국어 및 한국 문화 관련 사항만 조선학교에서 배우고 나중에 처신을 잘 한 탓도 있지만.[9] 일본내 빠칭코의 상당 수가 재일 한국-조선인(민단 및 조총련을 모두 포함한)계 소유이다. 때문에 김일성 때까지만 해도 북한의 돈줄 중 하나였으며, 일본인들의 재일 조선인 관련 부정적 인식에 한몫하기도 했다. 특히 혐한초딩들의 공격 이유 중 하나.[10] 특히 일본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자신들을 '일본인'으로 인식할 수 없는 만큼, 그렇다면 자신들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11] 민단은 당시 조총련보다 세력이 약했고, 당시 한국 정부는 재일 한국인들의 민족 교육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하지만 북한은 반대로 재일 조선인들의 민족 교육에 큰 관심을 갖고 이를 지원해줬으며 이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주입시켜 북한화시켰다.[12]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초코파이 주며 월남을 권유하는 남한군 이병헌에게 북한군 역할을 맡은 송강호가 "어이, 리수혁이. 내 딱 한 번만 얘기할 테니까네 잘 들어두라우. 내 꿈은 말이야. 언젠가 우리 공화국이, 남조선보다 훨씬 더 맛있는 과자를 만드는기야. 알갔어? 기때까진 어쩔 수 없이 이 초코파이를 그리워할 수밖에..." 라고 말하며 거절한 것과도 비슷하다.[13] 일본엔 민단이 지원하는 한국계 민족학교보다 조총련이 지원하는 북한계 조선학교가 훨씬 많기 때문에, 북한을 비판적으로 생각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조총련 소속이라 어쩔 수 없이 그냥 조총련 소속으로 있는 사람도 많다.[14] 조선적자의 대한민국 국적 취득 과정에 대해서는 국민등록 문서 참조[15] 실제로 1987년 초 김만철 탈북 사건에서 일본이 멋모르고 조총련 통역사를 붙여주는 만행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 자칫 큰일 날 뻔한 사건. 당시에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일본에서 크게 관심을 못 받을 때였고, 당시로부터 불과 10년 ~ 20년 전에 활동했던 좌익 운동가가 조총련과 연계된 경우도 꽤 있었기에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당연히 조총련의 입김이 센 편이었다.[16] 굳이 따지기 시작하면 아주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 북한의 처참한 폭정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17] ‘하늘과 땅 끝까지 따르겠습니다. 해와 달이 꺼질 때까지 존경합니다. 위대한 어버이 수령님을 우러러보며 만수무강을 축원합니다.’ 이것은 조총련계 국민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 내에서 김일성 수령을 찬양하는 대목이다. #는 1994년 시사저널 기사로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 조총련의 30대 연령층이다. 조총련계 학교의 교육은 북한의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했다. 조총련 고위층은 북에서 직접 임명하는 이상 사실상 북한의 일본 지부 대외공작기구에 가깝다.[18] 사실상 무국적[19] 통칭 '조교'.[20]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인 부모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자식들이 서로의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로 인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21] 국민등록 문서 참조[22] 이러한 문제가 있다보니 2010년 이후 대한민국 법무부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측에서는 특히 조총련 활동자에 대한 국민등록 심사를 매우 까다롭게 하고 있으며, 실제로 조총련 활동이력이 많거나 활동기간이 긴 사람들의 경우 최종 심사에서 탈락되는 비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북한에서 직접 탈출한 사람들도 한국 국민으로 받아주는것을 감안하면 정부당국은 사실상 이들을 탈북민보다 이들을 더 위험인물로 보고 있는 셈이다. 물론 당연한 것이 나라로 함부로 탈출된 것이 금지된 북한에서 목숨걸고 탈출한 사람은 사실상 반북성향이라고 간주해도 되기 때문이다.[23] 부모가 조선 학교에 강제로 보내려 들자, 대판 싸우고 분가해 일본의 제도권 학교로 진학한 사례도 흔하다. 아무리 부모라고 해도 웬만한 막장 부모가 아닐 바에야 외국에서 외국 출신으로 강압으로 옥죌 수도 없는 노릇이다.[24] 이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쉽게 말하자면, 미션스쿨에 다닌다고 다 광신도가 되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미 이런 분위기는 영화 박치기에서 학생들이 "야, 미국하고 김일성 장군하고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같은 것을 농담 따먹기에 써먹는 분위기가 가감없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것은 실제로 흔히 조선학교에서 이미 일어나는 상황이고, 이런 것이 조선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현재의 조선학교 학생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북한 같았으면 무시무시한 아저씨들한테 끌려가서 코로 랭면 원샷을 할 것이다.[25] 20세기 내내 일본 내 좌파는 그 특유의 국제주의적 성격 때문에, 재일 조선인 차별에 민감했고, 이로 인해 일본의 전후 전쟁범죄 청산과 재일 한국인/조선인 차별 금지운동에 가장 힘을 많이 실어준 집단이 되었다. 요즘에서야 잊혀지기도 했고, 과거의 언론통제로 잘 안 알려진 점이 있지만, 일본 좌파는 일본 내 차별금지부터 한국의 민주화 지원까지 적지 않은 부분에서도 많이 도움을 준 바 있다. 재밌는 것은 당시에는 일본의 극우 인사로 알려진 사람들 중 일부도 당시에는 김대중, 김영삼 등을 지지하며 한국의 민주주의 정착을 도와주거나, 아예 일본 정부에서 한국 민주화 인사들을 보호하거나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 등이 일본 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많은 우익들이 반한으로 돌아선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성장을 이룩해 일본의 국익에 따라 휘둘리지 않을 존재가 되자 한국에 견제를 놓으려는 측면이 크다.[26] 앞서 언급했듯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이 조선적을 포기하고 한국, 일본 국적중 양자택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과거에는 그래도 국적만 택해놓고 실질적으로는 조총련쪽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이런 인원들마저도 거의 없어진 상황.[27] 대한민국 광주의 조선대학교와는 다른 학교[28] 겉보기엔 멀쩡해보여도 그들과 직접 얘기해보면 민족에 대한 개념이 한국 국민들하고는 다른 부분이 있다. 한국 역시 통일을 명문화 하는 등 민족주의적 성향이 있긴 하나 동화 여부만 확실하다면 어느 정도의 다문화는 인정하는 편이라면, 그들 역시 민족주의 성향이긴 하나 그 정도가 좀 더 확고한 편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분은 "위대한 령도자 동지의 훈령 아래 단결해야 한다" 라는 기승전병 뻘소리가 심하다는 것.[29] 주체사상에 대한 사상적 평가를 떠나서, 이 주체사상이란 것조차 지금 북한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김영환 등은 의문을 표한다.[30] 전승에 따라서는 반대로 편지를 세로쓰기로 쓰면 북송선 타고 가로쓰기로 쓰면 북송선 타지 말라고 했는데 오는 편지들이 죄다 가로쓰기여서 안 갔다고도 한다.[31] ‘재일동포’(在日同胞)를 북한에서는 줄임말로 ‘재포’라고 부르는데, 이 말을 세게 발음한 것이다. 이는 일본제 물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32] 혹은 복잡한 군중[33] 참고로 같은 시기 미국의 1인당 GDP가 2만 달러 대 후반이었다.[34] 북한의 80년대 초반 1인당 GDP는 700달러가 넘었고 1989년엔 800달러에 가까웠지만 90년대 초반에 이미 600달러 밑으로 떨어진 상태였다.[35] 가라테 중에서 한국인들이 만든 태권도, 극진공수도슨도메를 없애고 실제로 치고 박는 실전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것도 민단 - 조총련 싸움이 작용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36] 전주 이씨라고 한다.[37] 과거 외국여행이 제한된 시절, 월북하는 주된 코스가 바로 일본 방문 → 총련의 커넥션을 통한 월북이었다. 그리고 현재는 월북자 자체가 엄청나게 드물어졌긴 하나, 여전히 월북의 정석으로 통한다. 물론, 잘못하면 현실은 시궁창이 된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북한도 남한사람들의 월북을 잘 받아주지 않는다. 당장 철책선을 직접 넘어 월북의사를 표시한 사람도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상황이다.[38] 최은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북한으로 유출된 이 드라마에서 만경봉호 선장(겸 조총련 고위간부)으로 열연한 문오장의 연기를 본 김정일이 적화통일 후 붙잡아 손봐주겠다고 했다 한다.[39] 각본은 조선왕조 5백년의 신봉승, 연출은 바로 태왕사신기김종학이었다. 다만 이 작품은 가족을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잃은 조총련 전직 간부의 고백록을 극화한 것으로, 정치성보다 다분히 인권중시 측면에서 북한의 어두운 실태를 조명하였다.[40] 이 과정에서 박진우는 유미가 쏜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41] 한덕수 국무총리와 동명이인이다.[42] 다만 종교단체 소속인 교포들이 입교를 해달라고 초인종을 눌러대는 경우는 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조총련이 아니라 해당 종교 관련 얘기다.[43] 일본에서 소수자의 입장으로 살아야 하는 이들로서는 방어적인 민족 의식이 투철하다. 또한 '통일'은 그들이 떠받드는 김일성, 김정일의 유훈이기도 하다.[44] 씨티은행 다음으로 일본에 2번째로 외국계 은행 현지 법인허가를 받았다.[45] 단, 조선적 보유자는 제외[46] 대한민국의 우리은행은 ウリ를 사용한다. 헷갈리지 말자.